【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30) 종(servant)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인구 100만에 달하는 인류 사상 최대 도시를 형성했다. 이 규모는 중국 송나라 시대나 19세기 초 영국 런던이나 일본 에도에 와서야 다시 도달하는 엄청난 수준이다. 반면 중세가 되면 로마라는 도시의 규모는 인구 3~4만 정도로 대폭 줄어든다. 로마 제국 안에 도시의 수가 2500여 개에 달했다. 이탈리아에만 400개가 넘었다. Mary R. Beard는 ‘폼페이, 사라진 로마 도시의 화려한 일상’이라는 책에서 폼페이 도시를 조명한다.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 비운의 역사를 지닌 도시다. 폼페이의 인구를 1만2000명의 절반이 노예였을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B.C. 18세기 바빌로니아 제국의 왕 함무라비가 함무라비 법전을 제정할 당시 바빌론 사회의 5%는 자유인, 65%는 소작농, 나머지 30%는 노예였다. 아카드어로 ‘와드둠(wardum)’이라 불렀다. 제국 로마의 수도 로마에는 강한 권력의 귀족 가문이 100개쯤 있었다. 실제 유사한 규모의 저택을 가진 가문은 500여 개에 달했다. 이 귀족들의 저택은 10여 명 정도의 가사 노예를 부릴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문제는 비록 부모는 귀족이지만 자신의 자식들을 직접 교육할 만하나 지적 역량을 지닌 로마인이 아니었다. 인문학을 자신들의 언어인 라틴어로 연구해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에게 읽힐 만한 라틴어 동화책조차 전무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은 정신문화의 선진국인 그리스의 텍스트를 받아들여야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리스어를 알고 가르칠 수 있는 개인교사를 모셔야 했다. 그리스인들을 노예가 아닌 가정교사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로마서를 그리스로 읽을 수 있는 로마인들은 대체로 그리스 노예였거나 저축을 통해 로마시민권을 취득한 자유인이었을 것이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생각한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그의 밀접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종(servant)에 해당하는 ‘δουλος’(둘로스)를 사용하고 있다. 이 칭호는 그의 신분을 역시 암시한다. 사실 노예(slave)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둘로스라는 용어는 ‘에베드 야훼’의 구약 용법에 기초하고 있을 것이다. 이 용어의 초점은 구약의 탁월한 인물처럼 특권을 받은 직무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도적인 사역을 하는 것에 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언급하기 앞서 둘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사용하는 권위가 종에게 위임된 권위임을 강조한다.

노예(slave)는 내키지 않아 마지못해 하는 복종이라는 의미를 시사한다. 요즘 직장인 사이에 창궐하는 ‘넵병’의 차원에서 종인지 노예인지 주인의 메신저에 도착한 답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넵!’과 ‘뉍’이다. 누가 종인가, 노예인가. 전자는 ‘당연하죠! 가능합니다’, 후자는 ‘절대적으로 따르겠습니다’라고 답한 것이다. 이어령은 ‘기업과 문화의 충격’에서 노예와 자유인을 이렇게 구분한다. 전자는 기개를 잃은 사람, 명예도 위신도 실리를 위해서는 모두 다 내던지고 무릎을 꿇는 사람이다. 후자는 편안한 잠과 배부른 삶에 얽매이지 않고 따뜻한 가슴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이라 한다.

Gustave Boulanger's painting The Slave Market

바울은 로마서 포문을 열면서 첫 두 단어 가운데 둘로스를 사용한 까닭은 특별히 구약구절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구약에는 모세와 여호수아로부터 시작해서 스스로를 야훼(הוהי)의 종 혹은 노예라고 불렀던 존경할만한 이스라엘인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시편 116:16에서 시인은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라고 노래한다. 이전에는 결박에 묶여 있는 노예였는데 이제 주의 종이 되었음을 노래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사도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로마 교인들 가운데 유대인들은 ‘바울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는 첫 네 마디를 읽었을 때 이사야 49:5-6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할 뿐만 아니라 이방의 빛으로 삼아 하나님의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는 종을 생각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역사·인물·소설 전문 작가로 꼽히는 Max Gallo는 ‘장편 소설’에서 로마가 노예제 사회였다고 진단한다. 노예로 삼지 않을 포로는 가차없이 죽였던 로마인은 후회 없이 두려움 없이 타인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둘로스에 대한 신약의 묘사는 비록 전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경멸이나 멸시를 암시하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신약은 헬라 세계와 다를 뿐만 아니라, 또한 종들의 사회적, 제의적 및 윤리적 지위를 낮게 보고, 종들이 오로지 그 주인의 지배 아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종이라는 말을 심히 모욕적이 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유대교와도 다르다.

헬라인들은 둘로스가 자기 자신의 자율을 파기하고 주인의 뜻에 자기 뜻을 복종시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노예의 지위에 대하여 오직 반감과 모욕감을 느꼈다.

종이라는 개념은 로마의 노예제도가 아닌 특별히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되었다는 이스라엘의 확신으로부터 그 의미를 끌어온 것이다. 둘로스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적용될 때 복종과 하나님을 섬기도록 선택받은 명예를 가리킨다. 이것은 자기보다 상관에게 말할 때 자기를 비하시키는 셈족의 언어 윤리를 반영한 것인 듯하다(왕상 1:26, 27 참조).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은 오직 야훼(הוהי)께 속했다는 의미다. 모세와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과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간의 언약을 지키는 것으로 인해 그런 하나님의 종이라는 칭호로 영예를 얻었다.

 

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표현은 바울의 서론적 도입 가운데 오직 빌립보서 1:1에서만 그렇게 형성되어 있다. 여기서 바울은 분명히 자신의 유대적인 유산에 의존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바울의 명함과 다를 바 없다. 명함이 자신을 소개하는 주요한 방편이다 보니 처음 인사를 할 때면 으레 명함을 주고받는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먼저 명함을 드리면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 윗사람이 그 명함을 살펴본 뒤 자신의 명함을 주는 것이 명함 교환의 일반적인 예법이다. 바울은 생면부지의 로마 교인과 위아래를 따지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윗사람은 한 분 뿐임을 선언한다. 예수 그리스도이다. MBC TV 탤런트 한인수씨의 명함에 적힌 글귀이다. “우리가 만난 후 당신이 나를 잊는다 해도 당신은 잃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분을 잊는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라는 글귀를 명함에 새겼다.

저자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서두를 시작하는 것은 ‘나는 종이다. 그리스도의 종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다.’라는 뉘앙스를 갖고 있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고 나의 왕이시다라는 고백이기도 하다. 나는 왕이신 예수님의 종이다라는 표현이다.

배부름을 잠재워주는 밥보다도, 갈증을 풀어주는 물보다도 인간은 가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 바울이 생면부지의 로마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가장 먼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으로 시작한다. ‘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바울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편지를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하고 바울은 대답한다. ‘나는 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시로 노래한다면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는 누구인가’란 시가 가사가 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인가/ 둘 다인가/.../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오, 하나님!” 바울은 사람의 것이 아닌 예수님의 것이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을 선언하면서 로마서 문을 연다.

바울이 자기 자신을 종이라는 용어를 어떤 의도를 갖고 사용하였을까. 구약의 하나님의 종들처럼 자신이 오로지 하나님께 속해 있고 또 의존하는 데 있어서 동일한 배타성과 무조건적인 특성을 시사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종은 영예가 아닌 헌신에 한 표시로서 표현한 것이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렇게 사용할 수 있다. 신약에서 ‘주’에 해당하는 ‘κυρος’(퀴리오스)라는 칭호가 야훼(הוהי)를 나타내는 것에서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제 주님의 종은 그리스도의 종이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상관없이 주님의 종, 즉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로마에는 강한 권력의 귀족 가문이 100개쯤 있었다. 이 귀족들의 저택은 10여 명 정도의 가사 노예를 부릴 정도의 규모였다. 또한 주인을 도와 사업의 비서·회계·대리인 등의 역할을 담당했던 자들이 노예들이었다. 종은 노예와 다르다. 노예는 기본적으로 열심히 일할 유인이 전혀 없는 생산요소다. 따라서 노예를 부리기 위해서는 채찍이 필요하다. 그러나 때로는 당근을 사용하는 것이 더 이익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의 주인은 노예에게 의도적으로 사유재산을 허용한 것이다. 이런 유인체계에 의해 노예가 열심히 일하게 되면 그것은 주인에게도 좋고 사회적으로도 좋다. 로마의 노예는 저축을 통해 해방의 비용을 지불한 뒤 자유인이 될 수도 있었다. 달리 말해 로마 사회는 노예에게도 급격한 신분 상승이 가능한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체제였다는 것이다. 둘로스는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에게 사용되고 있다(빌 2:7).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그들이 자유민이지만 그들 자신을 왕의 종으로 생각했다. 바울이 자신을 종으로 서두를 시작하면서 자신을 독자와 같은 수준으로 두고 있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