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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칼럼】Syngman Rhee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 정성구 고문
  • 승인 2019.10.22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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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박사와 영부인이었던 프란체스카 도너 리

최근에 광화문을 이승만 광장으로 명명하는 그룹이 생겼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 동상과 기념관을 만들기 위한 캠페인도 벌어지고 있다. 몇 해 전에는 연세대학교 이승만 연구소가 이승만 박사 자료전집출판계획이 이루어지고, 아마도 그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 줄 알고 있다. 한 인물을 평가하는데도 그가 가진 세계관, 가치관과 신앙관에 따라 서로 다르다. 역사를 평가하는 것도 그가 가진 정치적 입장과 역사관이 중요하다고 본다. 지난 70여년동안 이른바 역사학자들과 교육가, 정치가들은 이승만 폄하하기와 이승만 죽이기를 해왔다. 바로 이승만 지우기와, 이승만 비판이 마치 애국인 듯 회자되고 있었다. 

또 그 동안 이승만이 새운 대한민국은 이 땅에 태어나지 말아야 할 나라라고 선동하는 자들도 많았다. 두 말 할 필요 없이 지난 70여년 동안 북쪽의 선동선전이 세작들을 통해서 의식화 된 사상체계를 만들었고, 이른바 민족주의를 앞세워서 우리 민족끼리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김일성 종교의 붉은 전도사들이 이승만 하면 무조건 3.15 부정선거, 독재자 프레임을 만들어서 교육했다. 급진주의자들은 더 나아가서 이승만이 남북 분단의 원흉으로 치부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남북 좌우합작을 부르짖다가 공산당에게 속은 민족 지도자 김구선생은 존경의 대상이자 민족의 영웅으로 높였다. 그리고 효창공원 안에 아름답고 웅장한 기념관도 있다. 하지만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치고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자,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은 말도 안 되는 말을 만들어 배척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금년에는 임시정부 100주년이라고 큰 행사를 하면서, 정작 대한민국의 건국은 말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기 짝이 없다. 요즈음 우리나라는 임시와 정시를 구별도 하지 못한다. 1945년 8월 15일 뉴욕타임즈(NewYork Times)조간 일면 톱기사는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이 탄생되다」이승만 박사에 의해서 「자유」「민주주의」국가가 출현했다고 분명히 썼다. 오늘의 정치권이 임시정부의 의미와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대한민국의 건국일도 잊어버리니 마치 임신한 날을 생일날로 우기는 코미디이다. 

나는 1980년 대 중반, 그러니까 35년 전에 이승만 박사의 사저였던 <이화장>에 가서 예배 인도를 했다. 영부인이었던 프란체스카 도너 리를 비롯해서 양자 이인수 박사, 며느리 조혜자, 그리고 평소 이승만 박사의 유지를 받드는 몇 몇 지인들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다. 하도 오래되어 내가 무슨 성경을 읽고, 어떤 설교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국부이신 이승만 박사의 유족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 후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의 사생활이 담긴 물품을 둘러 보는 중에 경무대 시절, 떨어진 양말을 꿰매어 신은 것을 보고 마음이 울컥했다. 이승만 죽이기와 이승만 지우기에 앞장 섰던 정치꾼, 언론인, 역사학자, 교수들, 문학작가들 모두가 입만 열면 이승만을 3.15 부정선거, 독재자, 부정축재자라고 입에 거품을 물지만, 이승만 박사는 마지막까지 청빈하게 나라의 독립,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사수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던 어른이었음을 깨닫고 난 후, 나는 나름대로 이승만 변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이승만 박사의 사료수집에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나는 이승만 박사의 하와이 독립운동 하던 곳을 세 번이나 방문했고, 하와이 대학 동서센터(East-West Center)에서 상당한 자료를 발견했다. 그 후에도 이승만 박사가 마지막 공부하던 프린스턴 대학교와 신학교를 십 여 차례 방문했고, 휴스턴의 남감리교 대학(SMU)들에 가서 자료를 모았다. 

금년 국가적 위기에 나는 큰 결심을 하고, 이승만이 미국에서 공부했던 학교들을 다시 방문하기로 했다. 금년 봄 나는 프린스턴 신학교 총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9월 중에 방문할 터이니 이승만의 프린스턴 대학에서 Ph.D를 받기 전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때의 모든 자료를 준비해 달라고 했다. 드디어 9월 20일 금요일 프린스턴신학교 총장실에 들렀더니, 이미 총장 비서와 스텝들이 모든 모든 자료를 준비하고 나를 기다렸다. 우선 이승만 박사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공부하기 전에, 신학을 공부한 학적부를 볼 수 있었다. 프린스턴 신학교 때 이승만이 기거하던 기숙사 핫지홀(C.Hodge Hall)에 들어가서 3층 이승만이 공부하던 방에 들어갔다. 침대와 책상은 그대로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사진도 찍었다. 만감이 교차되었다. 거기서 그는 기초신학인 히브리어, 라틴어, 교회사, 변증학 등을 공부했었다. 식대가 없었기에 이승만은 칼빈클럽(Calvin Club)에서 무료로 주는 식권을 도움 받아 졸업 때까지 숙식을 해결했다. 그 후 그는 총장 윌슨의 도움으로 국제 정치학으로 박사(Ph.D) 학위를 받는다. 당시 이승만 박사의 사상적 스승은 아무래도 1902년까지 교장으로 있었던 프린스턴의 대 칼빈주의 학자 비 비 월필드(B. B. Warlfield) 박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월필드 박사는 1898년에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를 초청해서 그 위대한 스톤랙쳐(Stone Lecture)를 하게 하고 「칼빈주의 강연」(Lecture on Calvinism)을 하게 했다. 즉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높이는 칼빈주의 사상이 프린스턴에 넘치던 시기였다. 즉 하나님의 주권은 신학과 신앙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삶의 전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역사한다는 사상인데, 이승만은 여기서 그것을 배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의 꿈은 광복해서 나라를 세울 때 기독입국을 가슴에 품었을 것이다. 또 당시에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성경신학의 아버지 겔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박사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 나는 보스 박사의 손주와 저녁 만찬을 같이 했다. 

나는 이번에 1904년 이승만이 미국 가서 처음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를 찾아갔다. 여러 차례 이메일을 통해서 이승만 박사가 신앙생활 했던 교회였던 국가장로교회(National Presbyterian Church) 도서 및 사료 당담 목사에게 이승만 족적을 찾겠다고 연락했다. 이 교회는 1795년에 스코틀랜드 언약도(Covenanter)들이 세운 교회로 이승만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교회 이름이 <언약도 교회>(Church of Covenanters)였다. 당시 담임목사님은 헴린(Tuenis S. Hamlin) 목사로서 이승만에게 세례를 주었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신학과 신앙을 가르쳤던, 미국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목사였다. 그는 이승만을 조지 워싱턴 대학과 하버드대학교에 가도록 모든 정성을 다했다. 왜냐하면 그는 조지워싱턴 대학의 이사이자, 하버드대학의 이사장이었다. 스코틀랜드 정통 장로교회였던 언약도 교회가 이승만을 키워냈고, 그에게 하나님 중심의 국가 건설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에 감사할 뿐이다. 한국의 국부, 독립운동가, 외교의 귀재, 불세출의 영웅, 대한민국을 기도로 세운 대통령, 자유 민주 대한민국을 세우고 기초를 놓은 이승만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했지만, 미국에서 이승만의 학문과 독립운동을 기도와 물질로 도왔던 수많은 손길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만세!

정성구 고문  webmaster@bonh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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