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홍아 선교사(알바니아)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발칸의 화약고 독수리의 땅 알바니아에 1998년 6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우리 가족은 이민 가방을 들고 무작정 비행기 트랩을 내렸다. 야자수 나무 사이로 흙먼지가 날렸고, 우린 비포장의 흙길을 따라 걸어서 공항에 들어왔다. 한참을 기다리니 땀을 뻘뻘 흘리며 아저씨들이 짐수레에 싣고 온 큰 가방들을 공항 대기실 바닥에 쏟아 놓았다.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이 머리를 뒤 밀며 자기의 가방을 집어서 그냥 밖으로 나갔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황량한 바위산과 공항에서 수도 티라나로 들어오는 도로는 비포장 길로 한국의 농로처럼 느끼면서 ‘앞으로 이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걱정했던 일이 벌써 20여년을 지나오면서 살아가고 있다.

난 사실 대학에서 지리학을 공부했지만 알바니아에 대하여 국명도, 위치적으로도 잘 몰랐다. 알바니아에 가겠다고 생각하고 관심을 갖고 배운 지식은 고작 사회주의에서 개방한 지 7년이 되었고, 97년 한국에서 대서특필 된 금융피라미드 내란으로 치안이 불안하다는 것과, 마더 테레사의 나라였다는 것뿐이었다. 사회주의에서 개방된 지 아직 10년도 채 되지 않아서 그 당시 우리나라의 60년대~70년대 초 정도의 경제 수준으로 짐작이 간다.

수도 티라나 조차 도로는 비포장이 많았고 길을 나서면 젖소도 함께 다녔다.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많은 외국인들이 들어왔었지만 외국인이 살 만한 집은 거의 없었다. 집을 구할 때 전화가 있는지, 물을 담아 놓을 데포짓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아이들 학교가 가까운지 그게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우린 한 가지 더 조건을 추가하였다. 알바니아어(쉬칲)를 배울 욕심으로 현지인하고 한 마당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구한 집은 방 1개, 거실 1개, 아주 작은 화장실 1개 였는데 집 상태에 비하여 월세는 많이 비쌌다. 그러나 주인장이 역사 교수로 재직하다가 은퇴하신 분이고, 여동생이 간호사로 일하는 집이라 언어를 배울 욕심으로 한 방에서 네 명이 잠을 자는 불편함을 참기로 했다.

우린 ‘쉬칲’을 한마디도 못했고 알아듣지도 못했다. 남편과 언어 학교에 등록을 하고 언어를 배우는 시간 동안 아이들은 집 마당에서 놀게 했다. 대문을 밖에서 잠궈 놓고 자전거를 타고 그 뜨거운 불볕 더위에도 아랑 곳 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학교에 다녔지만, 전혀 듣도 보지도 못했던 언어가 쉽사리 익혀질 리가 없었다. 감사하게도 주인아저씨께서 일주일에 세 번, 한 시간 반씩 우리에게 쉬칲을 가르쳐 주셨다.

그 분은 영어를 한마디도 모르셨고, 우린 불어를 몰랐다. 그래서 그 분이 불어로 말씀하시면서 영어사전을 찾아 주시면, 우리가 또다시 한글 사전을 찾아서 단어를 배웠다. ‘쉬칲’을 배우는 동안 우린 손짓, 표정, 그리고 영어 불어 등등 얼마나 우스운 광경이었는지 언어는 꼭 말로 하는 것이 아님을 그 집에서 6개월을 사는 동안 배웠다.

초기엔 인터넷이 없어 손편지로 한국에 소식을 전하였는데, 어느 날 주인집 아저씨 대학생 조카에게 우표를 사다 달라고 부탁을 했다. 난 우표를 부탁했는데 그 아가씨손에 들고 온 것은 생닭을 사왔다. 알바니아말로 우표는 pulle, 닭은 pule였으니 아무래도 발음을 잘 못했던 책임이어서 웃고 말았다.

어느 날 우리 가족은 마당에 앉아서 아이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두꺼비 집에서 불이 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먼저 보고 소리를 질렀더니 남편이 다가가서 불을 껐다. 하마터면 집을 홀라당 태울 뻔 하였다. 오래 된 집이기도하고 공산주의 때는 가전제품이 없어서 전구 정도만 켤 수 있는 전력이었는데 우리가 살면서 전기밥솥, 믹서기, 전기장판..등을 사용하니 과부하가 걸렸던 것이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이사를 마음 속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도 물이 시간제로 공급되지만 초기에는 더 심했다. 그래서 여름엔 남들이 사용하지 않는 새벽에 세탁기에 물을 부어가면서 빨래를 해야 했다. 겨울이 되면 전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자주 전기가 나갔다. 어떤 날은 전기가 없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래서 겨울에도 남들이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새벽에 일어나 세탁기를 돌려야만 했다. 입국한 첫 겨울 섣달 그믐에 우리 동네 변압기가 터져서 설날에도 전기가 없이 지내야만 했다. 전기 기사들도 휴일이기 때문에 고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변압기를 교체 해 줄 재정적 여력이 정부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동네 주민들이 각각 돈을 걷어서 3일이 지난 다음 고쳤다.

그 해 추위는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낡은 집이라 창문 틈으로 황소 바람이 들어오는 것은 물론 난방 시설도 없고 라디에이트를 켤 수 없으며, 가스질이 나빠서 가스 난로를 켜면 숨이 막혀서 사용할 수 없었다. 우린 그 추위를 이기려고 물을 끓여서 핫백을 끌어 안고 잠을 청하였다.

알바니아는 1991년도에 동구권에서 마지막으로 약 50년간의 공산 독재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 때 국민들은 스컨델 배우 광장에서 공산 독재자 엔벨 호자의 동상을 부술 뿐만 아니라 지난날들 공산주의의에 대한 울분의 분풀이로 관공서의 건물, 공장, 학교를 파괴하고 심지어 산에 있는 과일나무 올리브 나무까지도 찍어 버렸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바니아인들은 많이 후회하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의사를 더욱 강하게 표출 할수록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나라인 미국이 자신들을 많이 도와 줄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후회해 보아도 나무는 다시 심어야 하며 시간이 걸려야 열매를 얻을 수 있고, 공장은 부수었으니 일할 곳이 없어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공산 독재 정치에서 개방을 하였지만 국민들은 자본주의를 배우지도 못하였고 극한 빈곤으로 인하여 알바니아인들은 우왕좌왕하였다.

97년도에는 금융사기사건으로 내란이 일어 났는데 이것은 자본주의에 대하여 경험이 없었던 국민들이 은행에 돈을 넣으면 30% 이상의 이자를 처음엔 꼬박꼬박 받게 되니 얼마 후에는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국민 대부분이 집도 팔고 가진 것을 다 넣었는데 그 회사가 부도를 내고 공중분해 되었다. 그러니 분노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고 전쟁터처럼 탱크가 시내를 활보하였다고 하며 또 무정부 상태로 무기고가 털려서 많은 사람들이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그 여파로 98년도에도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탄피가 마당에 떨어져 있기도 하고, 지나가다 보면 우리에게 다가와 총 사시겠습니까? 하고 묻기도 했다.

한 번은 우리가 탄 차는 미니버스였는데, 좁은 다리 앞에서 승용차와 마주치게 되었다. 우리 뒤에 차가 붙어 있어, 뒤로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앞 차의 기사가 총을 꺼내 차 위에 얹어 놓으면서, 무언의 협박을 해 왔다. 일반적으론 작은 차가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원칙이지만 우리 뒤에 선 현지인 차들이 먼저 뒤로 빼 주었고, 우리도 벌벌 떨면서 길을 열어 주었다.

입국 한 그 해 10월 엔 야당 지도자였던 아젬 하이다리가 피살되었고, 국민들은 유혈사태로 방송국을 장악하고, 거리로 나아와 시위를 하였다. 밖에 나가보니 티라나 시민들은 음식과 물을 사다 재어 놓느라고 부산한 움직임이 있었다. 나도 뭔가 사다 놓아야 할 것 같아서 빵과 고기를 조금 사다 놓고 커턴을 내리고 텔레비전만 보았다.

97년에 이미 내란으로 외국인들은 위기를 경험한 바 가 있어서 긴장하며 침착하게 여권과 약간의 돈을 미리 준비해 놓고 상황이 어떤지 주시하고 있었다. 그 때 샬리우를 체포함으로 사태는 진정되어 가고 있었다. 그 사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코소보에서 전쟁이 터졌다.

코소보 전쟁은 ‘인종청소’를 목적으로 세르비아 군인이 코소보 해방군들과의 전쟁을 하면서 코소보 인들을 학살하였고, 점진적으로 국제적인 전쟁으로 번져가는 양상이었다.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은 잘 모르지만 대부분의 코소보인들은 알바니아로 피난왔다. 우린 열심히 난민들을 도왔다. 그들에게 들은 얘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가족을 세워 놓고 남자들을 총살 시키는 장면을 목격한 이들도 있었고, 아들과 남편이 전쟁에 나가서 소식이 없다고 떨리는 가슴으로 울면서 극도의 긴장과 충격으로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여인들의 얘기를 그냥 들어 주었다.

주 2회 난민들이 먹을 음식을 봉지에 넣어 150~200개씩 가정에 나누었고, 또 교회로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는 일은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한국에서도 기자, 난민 사역을 위한 봉사원...이 오셨는데 그 분들을 돕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그 분들이 기거할 집을 구하고, 난민 촌을 방문 할 때 동행을 하면서 어슬프지만 통역도 도와야 했다. 한국에서 난민을 도우려는 마음으로 후원금을 보내오면 상황에 맞게 재정을 사용하고, 장부를 정리하여 보고하는 일도 한 일이었다.

어느 날, 코소보 난민들이 전쟁 가운데 제대로 못 먹었을 것 같아서 햄을 준비했다. 대부분의 난민들은 그 햄을 되가지고 왔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모슬렘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린 그들의 문화를 몰랐고, 그들은 아무리 전쟁 중이어도, 그리고 얻어 먹는 신세에 있었지만 그들의 문화와 자존심을 지켰다. 우린 실컷 좋은 일을 하고도 미안하다고 연신 용서를 구했다. 내가 보기에 아무리 좋은 일일지라도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행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여성 난민들이 머뭇머뭇하면서 다가와 귓속말로 요구하는 것은 아기들의 기저귀와 여성용품이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기쁨은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은 기뻤었다.

코소보 난민들과 얼마간 친해지자 그들이 알바니아인들을 보고 이런 환경에서 너희들은 어떻게 사냐고 오히려 난민들이 알바니아인들을 불쌍하다는 듯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랬다. 경제 사정이 그 당시만 하더라도 코소보가 훨씬 좋았던 것이었다. 그 후 전쟁이 끝나고 난민들은 한 가정도 남지 않고 3일도 안 되어 싹 다 본국으로 돌아갔다. 세계 전쟁사에서 아주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알바니아에 입국한 지 1년 6개월이 지나서 자동차를 구입했다. 20여년 된 수동식 벤츠였는데 ‘썩어도 준치’라더니 튼튼하고 잘 나갔다. 남편이 닦고 조이고 기름칠을 하니 우리 눈에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차였다.

그런데 1999년 섣달 그믐 날, 그 날 밤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더니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억수 같이 쏟아졌다. 아침에 누군가 대문을 꽝꽝 두드리길래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대문을 열어보니 주차를 하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 “니네 차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 집으로 뛰어갔다. 그 집 마당에 몇 대의 이웃집 차들도 같이 주차되었고, 외국인인 우리를 배려하여서 우리 주차 자리는 제일 안쪽 주인 방 앞에 자리를 내어 주었건만 우리 차만 쏙 빼갔다. 자동차를 산 지 한 달 만이었다. 아직 자동차에 대한 사랑땜도 끝나지 않았는데....

우리가 알바니아에 와서 해코지 한 것도 없는데 우릴 이렇게 대접하는가?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누구가 가져 간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말을 못했다. 왜냐하면 이 나라의 문화 중에 ‘하크마리, 자크마리’라고 하는 ‘피의 복수’가 두려웠다. 경찰에 얘기해서 잡히면 그 사람들이 우릴 가만두지 않기 때문에 알고 있어도 입을 다물었다.

우린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기사를 두었다. 자동차 도난이 너무 심하여 무슨 일을 볼 때도 항상 둘이서 차를 타고 나가서 한 명은 사무실에 들어가고 한 명은 차를 지켜야만 했다.

외국인들 사이의 뉴스는 누가 식당에서 식사하고 나오니 차가 없어졌더라. 길 가다가 차를 세워서 서면 총을 들이대고 뺐어갔다 등등 차 도난에 대한 얘기가 끊임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기사를 두고 차를 운행했다. 우리에게도 기사를 두라고 했지만 우리 스스로 용납 할 수 없었다. 그 때 기사 월급이 120,000원정도 였다. 기사가 있으면 현지인들이 그 기사의 밥줄 때문에 차를 훔쳐가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지만 설마 했다가 그런 일을 당하고 말았다.

한참 동안 알바니아 사람들이 미워졌고, 내가 이 나라에서 계속 살아야 하나?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얼마 후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겠다는 이름 모를 분께서 새로운 차를 사라고 돈을 보내 주셨다. 오래된 승합 차를 사고 기사를 두고 나니 도난당한 차로 인한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갔다.

길을 나가면 제일 많이 듣는 말이 “o! kinez” 라는 말이었다. “야! 중국 뗏놈” 이라는 뜻이 더 가깝다. 독재정권 때 중국과 북한과의 교류가 잦아서 중국인들이 알바니아에 들어 왔는데 대부분이 노동자였었고, 그들의 모습이 초라하고 깨끗지가 않아서 아시아 인들을 보면 그렇게들 놀렸고, 심지어는 우리에게 다가와 때리려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들은 놀리면서 우릴 보고 비비총을 쏘아대곤 하였다. 그래서 우린 외출을 할 때 옷을 잘 차려 입고 나가려고 애썼다.

옷이 허름하면 ‘중국놈’ 옷이 깨끗하면 ‘일본인’이냐고 물어오고 대우도 달랐다. 역시 사람은 외모로 판단한다는 진리의 말씀이 틀리지 않는 진리이다.

아파트 입구에서 자주 마주치는 6층의 남자는 만날 때마다 기분이 나빴다. 인사는커녕 마주칠 때마다 아무 이유 없이 우릴 무시하는 눈빛으로 차갑게 대했다. 주인 아들한테 듣기론 알바니아 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라고 했다. 그 후 이사를 오고 그 남자를 만나지 않으니 속이 시원했다.

몇 개월쯤 지났을 때 주인집 아들을 만났는데, 6층의 남자가 주인집 아들보고 “그 코레안들 어디로 갔냐? 하면서 하는 말이 정부의 일로 해외의 출장이 잦는데 자기가 다녀 본 나라들을 열거를 하면서 하는 말이 자신이 다녀 본 나라 중의 제일이 서울이었다면서 그 코레안들 좋은 자기네 나라를 두고 왜 여기에 와서 사는지 불쌍하다고 얘기했다면서 주인집 아들이 일러 주었다.

서울 어디를 보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얘기를 들을 땐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앞으로 우리 조국의 발전에 조그마한 기여라도 할 수 있기를 다짐하였다.

윗층에 사는 아주머니(엘비라)가 한국에서 왔다니까 나를 당신의 집에 오라고 하더니 앨범을 꺼내 왔다. 남편이 기술자였는데 북한에 가서 일했다면서 북한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기분이 묘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알바니아에 대하여 몰랐는데 알바니아인들은 한국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남한이니? 북한이니? 라고 꼭 물어 오곤 했다. 남한에서 왔다고 하면 그들은 엄지척 하며 남한은 좋은 나라라고 칭찬하느라 바빴다. 북한하고 교류가 가까웠던 이유로 대다수의 알바니아인들이 한국을 알고 있으며 우리나라가 분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안타까워 하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몇 번의 이사를 더 하였는데 지금의 아래층에 사시던 할머니가 어느 날 캐나다로 이민 간 아들이 왔다면서 우릴 초대하였다. 우리 또래 쯤 되었는데 말을 들어보니 북한식 엑센트였지만 한국 말을 곧잘 해서 우린 오랫 만에 알바니아인과 한국말로 실컷 떠들고 웃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본인은 평양 김일성 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고, 평양 주재 알바니아 대사관에서 일하였으며, 개방 후 캐나다로 이민을 갔는데 한국인이 운영하는 고급 시계점에서 일한다고 소개하였다. 2년에 한 번씩 고향을 방문하여 부모님을 만나러 올 때마다 한국어가 일취월장하다고 칭찬을 했더니 우리에게도 알바니아말을 잘 한다고 칭찬을 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친구를 만나 본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다. 할머니께서 치매를 앓으셔서 어디론가 가셨고, 그 후론 만나지 못했다.

이스마엘 카다레는 알바니아의 작가로 노벨 문학상의 후보로 거론되는 분이다. 그 분의 책 ‘부서진 사월”을 보면 알바니아 문화로서 관습법인 <카눈>에 대하여 잘 묘사되어 있다. 하크마리(피의 복수)로 인한 살인은 그들의 관습법인 <카눈>에서 관대하다. 피의 복수를 하는데도 규칙이 있다. 집 안에 있을 때는 죽이면 안 된다. 나이가 18세 이상의 남자만 복수의 대상이다. 그 가정의 남자는 가문의 명예 때문에 반드시 복수를 해야 한다 등 여러 가지 규칙이 있다.

지금도 알바니아에서 이 하크마리에 걸려서 본국에서 살지 못하고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해 가서 살고 있지만 때때로 타국에서 알바니아인들이 잔인하게 죽음을 맞게 되는데 그것도 알고 보면 하크마리로 끝까지 따라가서 살인을 한 것으로 신문에 나기도 한다.

문화를 생각하니 우리와 다른 점으로 우스운 생각이 나서 한가지 소개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몸으로 표현하는 ‘예’는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끄덕하고, ‘아니오’는 도리도리로 나타낸다. 그런데 알바니아는 반대로 표현한다. 한국 청년이 알바니아에 와서 머리를 깎으러 이발관에 갔다. 언어가 되지 않으니 몸짓과 손짓 표정으로 의사를 전달해야만 했다.

이발사가 빗을 들고 이 만큼 자를까? 청년은 ‘아니요’ 하면서 고개를 도리도리...그러자 이발사는 싹뚝...또 빗을 들고 그럼 요만큼 원하니? 청년은 더욱 속이 상해서 ‘아니’라고 고개를 더 세게 옆으로 흔들어 댔더니 싹뚝.... 완전히 머리카락을 다 베이고 돌아오면서 제가 “자르지 말라”고 했는데 이렇게 해 놓았다고 눈물이 글썽글썽~~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죽겠다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언어를 익혀가면서 알바니아 텔레비전을 열심히 보았다. 특별히 오락 프로가 재미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KUTIA E FUNDIT”(마지막 상자)라는 프로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0분간 생방송 프로그램인데 인기가 좋았다. 열 명의 아가씨들이 박스를 들고 서 있는데 사회자가 출연자와 더불어 얘기를 하다가 박스를 하나씩 열고, 나머지 박스에 남겨진 숫자만큼 은행에서 돈을 주는 게임이었다.

나도 심심하여 출연하고자 방송국을 찾으니, 현지인들의 출연 대기가 엄청나게 길었지만 외국인은 처음이라 내일 당장 나오라고 했다. 나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갔다. 사회자가 여러가지 질문을 하면서 박스를 하나씩 열어갔는데 나의 마지막 남은 박스 안에 숫자는 500이었다. 방송을 마치고 나니 방송국에서 하는 말이 지금 당장은 돈이 없으니 다음 주에 오라고 했다. 방송 출연 후 집에 오니 한국교민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너무 잘 했다고 칭찬도 들었고, 그 다음부터 그 프로그램을 꼭 보게 된다면서 좋아들 해 주었다, 다음 주에 방송국에 출연료를 받으러 갔더니 내 앞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얘기를 들어 본 즉 몇 개월 전에 출연하였는데 그들의 숫자는 10000, 1000, 3000등 큰 숫자들이었다. 작은 숫자는 금방 해결해 주었다고들 하는데 큰 숫자는 방송국에서 하는 말이 후원하는 은행에서 돈이 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계속 미루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약속한 날에 가니 아직 은행에서 돈이 오지 않았다고 또 다음 주에 오라고 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에 화가 났다. 그것도 전 국민 보는 카메라 앞에서 약속을 하고 광고를 하면서 왜 돈을 안주고 빚쟁이처럼 대하면서 초라하게 만들까?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난 즐기려 나갔고, 재미 있었으며, 오랫만에 한국에 관한 얘기도 하고 소위 국위도 선양했는데 돈은 그만둘까? 했다가 시청자나 출연자를 우롱하는 처사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그래서 나도 한마디 했다. “방송국에서 전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500유로는 안 받아도 괜찮은데 방송국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에 대해서 신문에 기사화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그 자리에서 돈을 내주면서 사인(sign)하라고 했다. 나만 받았는지 아니면 내 앞에 3개월이 넘도록 못 받은 그 아저씨도 받았는지 확실히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의 500유로는 몇 명의 제자들에게 장학금으로 부족하지 않았다.

이곳도 K-POP 열풍이 대단하다. 남편이 천국에 가기 전엔 나도 한국어를 몇 년 동안 가르쳤다. 지금도 그 때 나에게 배운 학생들과 가끔 만나서 차도 마시고 수다도 한다. 그동안 한국어 교사 자격증도 받았고, 알바니아 대학에 한국어 학과 개설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8년엔 티라나 국립 대학에 중국어 학과가 개설되었는데 영어로 한자를 배우려니 힘이 든다고 학생들이 하소연하는 것을 들었다. 반면에 한국어는 알바니아 말로 설명해 주니 재미있다고들 했다. 계속해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젊은 청년들과 만나고 싶다.

결혼을 하고 한국에서 산 시간보다 알바니아에서 산 시간이 더 길다. 한국에 가면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느라 깜짝 놀란 일도 있다. 나에게 있어 휴대폰 뱅킹은 충격이었다. 같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옆에 계신 분이 전화로 통화를 하시더니 곧장 다시 전화를 하시면서 “ 지금 은행 가셔서 확인해 보세요. 방금 송금했습니다.” 라고 하셔서 그 때 엄청 놀란 기억이 생생하다.

알바니아는 나라는 좁지만 전통이 살아 있는 나라다. 작은 나라지만 문화는 달라서 북부, 중부, 남부에 따라 의상, 음식, 결혼식때 춤, 음악등이 다르다. 또 오스만 터어키에 450년간 지배를 받았었지만 자신들의 언어인 쉬칲을 빼앗기지 않았다. 가끔 텔레비젼을 통해 그들의 언어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영화를 볼 때면 우리나라와 비슷한 역사를 가진 이 나라가 친근하게 느껴진다..

이 나라에 사는 동안 나는 남편을 먼저 천국에 보냈다. 남편은 잃었지만 나의 아픔에 함께 울어주고, 기쁠 때 함께 웃어주는 새로운 가족들이 생겼다. 초등학교 때 만났던 아이들이 이제 자라서 의젓한 사회인이 되었고, 그들이 지금은 나를 위로하고, 나의 보호자가 되어준다.

빠른 속도로 경제도 성장하여 이젠 돈이 없어서 물품을 구입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지난 20여년 동안 알바니아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몸으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가끔은 어릴 적 먹었던 음식이 그리울 때가 있다. 나이가 들면 회귀 본능이라나 할까?

그런데 한국에서 살고 있는 둘째 아이는 나와 반대로 알바니아를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다. 무서웠고, 추웠고, 전기가 없어 촛불을 켜고 피아노를 쳤고, 마땅한 놀이 시설도 없었지만 어릴 적 먹었던 동네 집 앞의 ’작은 피자‘ 가게가 아직도 있어요? 물어 온다. 알바니아가 그의 고향이 되어서 그런가 보다.

유럽의 챔피언 리그 축구라도 할 터이면 우린 당연히 알바니아를 위해 목이 터져라 응원한다. 나의 주위의 알바니아인들도 나를 통해서 한국을 이해하고 한국에 관한 기사를 보면 나에게 전해 준다. 지난 세월호 땐 모두들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려 준 고마운 친구들이다.

인생의 연수는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 자랑할 것은 수고와 근심 밖에 없다고 하였듯이 살아온 삶을 얘기하자니 기쁨보다는 수고와 근심만이 기억에 남은 것 같다. 앞으로 남은 생애도 살아 갈 이 나라가 도덕적으로, 경제적으로 더욱 발전 되는 모습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나의 제 2의 고향으로 이 나라 사람들과 사랑하며 재미있게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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