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삼서는 장로인 사도 요한이 사랑하는 가이오에게는 보내는 편지이다.

첫째, 가이오에게 사도 요한이 편지를 하고 있다. 가이오(Gaius)는 신약성경에서 3사람이 등장할 정도로 매우 흔한 이름이다. 그런데 세 이름의 공통점은 모두 바울과 관계가 있기는 하다. 가이오가 교회 지도자가 되었는데, 버가모 지역으로 추정한다. 서신서의 내용으로 보면 가이오에게 교회와 건강상의 문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이오가 사도 바울의 제자이지만, 사도 요한이 편지를 써서 권면을 하고 있다. 사도의 가르침, 사도의 동역과 동일 권위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다. 사도적 가르침의 통일성과 권위과 존경의 동등성이 준수되고 있다. 교회 사역자는 동등 권위를 갖음으로 상호간의 동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보다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한다. 장로 교회는 노회에서 시찰회를 두어 사역자의 동일 권위로서 위로와 권면 사역을 이루고 있다.

둘째, 가이오는 개인이다. 본문으로만 보았을 때, 가이오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회에서 중요한 지도자임에는 틀림없다. 요한삼서는 바울이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에게 보낸 동일한 개인 서신이지만, 상황은 다르다. 빌레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네시모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고, 요한삼서는 가이오에게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빌레몬서와 요한삼서는 공통으로 개인에게 보내진 서신이다. 사도가 사역자이지만 개인적 사유로 쓴 편지가 만대에 읽혀질 성경이 된 것은 한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나 혼자 어떻게 될것인가?라는 비관적인 생각은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상황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한 개인은 하나님의 자녀로 권세를 갖고 있다(요 1:12).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은 개인에게 편지를 썼고, 그 편지는 계시 문서이다.

셋째,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두 사람의 표준을 주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데메드리오(12절)와 디오드레베(9절)의 두 사람을 제시했다. 먼저 디오드레베는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교회에서 문제가 많은 지도자이다. 디오드레베는 사도의 가르침을 외면하며 자기를 드러내는 지도자였다(9절). 이 지도자는 스스로 잘 하지 못할뿐더러, 남이 하는 것까지 해방하는 적극적인 악행자이다. 그들은 사도를 비방하며 사도를 용납하는 형제들을 훼방했다(10절). 그럼에도 교회에서 우월적 지위를 갖고 있다. 1세기 교회에도 이러한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사람의 영향을 피할 수 없는 교회는 강력한 소용돌이나 깊은 수렁에 빠질 것이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디오드레베를 본 받지 말라고 권면했는데(11절),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며 악한 자를 징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쓴뿌리를 제거하는 것보다 잘 보존하는 것을 추구한다. 성경은 본받지 말라(11절)고 명령했다. 제거할 목표는 내면에 있는 자기 죄를 제거하는 것을 추구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2절)은 “삼박자 축복(영혼이 잘됨, 범사가 잘됨, 강건함)”으로 알려진 유명한 성경구절이다. 그러나 성경본문은 삼박자가 아닌 한 박자뿐인 가이오에 대한 사도의 기도이다. 가이오에게 영혼의 잘됨은 있는데, 범사에 잘됨과 건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장로는 가이오의 영혼의 잘됨 수준으로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주 하나님께 기도했다. 사역자가 강력하게 주께 드릴 수 있는 기도이고, 동역자에게 영광스럽게 고백할 수 있는 문장이다. 장로 요한은 가이오의 영혼에 대해서 형제들의 증언(3절, 진리 안에서 행하는 가이오)에 근거해서 판단했다. 사역자는 판단할 주체를 직접 판단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들어 판단하는 것이 주요한 능력 중 하나이다. 마치 조선 시대 어의가 중전마마 등 후궁들을 실로 진맥하는 것과 유사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선한 표증으로 데메드리오를 제시했다(12절). 데메드리오의 선한 것을 본 받아야 한다(11-12절).

교회 안에 디오드레베와 같은 부류가 있고, 데메드리오와 같은 부류도 있다. 참된 주의 자녀들은 악한 것을 본받지 않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11절). 세상은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며 좋은 것도 아니라고 하여 판단을 유보시킨다. 그런데 성경은 디오드레베는 악함, 데메드리오는 선함으로 대조시켰다. 사도가 사람의 완전한 것을 규정한 것이 아니지만, 가르침을 위해서 교회와 사역자는 인격을 결정할 수 있다. 악한 사람에게 선한 면을 보려고 노력하지 말고, 선한 사람에게 악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야 한다. 사람은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보고 본받으려는 사랑의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러나 선인과 악인을 결정한다면 좀 더 빠르게 분별할 수 있다. 그 권위가 사도에게 있다. 동역이란 동역자의 선함을 드러내는 것이 동역이다. 사도는 자기 동역자를 밝힘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협력을 도모했다.

선한 자는 진리를 위해서 함께 수고하며 나그네를 잘 접대한다. 진리는 믿는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진리는 믿는 자에게 자유를 주었다(요 8:32). 진리는 은혜로 받았지만, 그 은혜에 근거해서 사는 자녀는 합당한 대가(代價)를 지불해야 한다. 마태복음에서 감추인 보화나 값진 진주를 소유하기 위해서 한 행위와 유사하다. 요한삼서에서는 나그네를 잘 보살피는 헌신이다. 나그네를 보살필 때에 소요되는 수고까지 잘 감당해야 한다. 나그네는 순회사역자들이다. 지금은 교회 사역자가 나그네이다. 지금도 선교지에서는 순회 사역자의 모으로 교회를 이루고 있다. 회집처 형제들은 나그네를 분별하여, 참 교사에게 존대와 헌신을 야 한다. 교회가 사역자를 존대해야 할 이유는 외인에서 아무 것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7절). 우리시대에 자비량 사역이 증가하고 있는 모습은 긍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자는 어떤 환경에서도 복음을 전해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알곡을 수확하기 위해서 농부의 땀이 필수적인 조건이듯이, 진리의 결실을 보기위해서는 사역자와 지체들의 수고로움이 필요하다. 그 수고로움을 기쁘게 감당하는 헌신된 백성을 통해서 교회와 진리는 굳건하게 세워지며 확장해 나간다. 그 수고로움을 은혜로 여기며 기쁨으로 감당하며 종의 무익을 고백하는 것이 성도이다.

동역은 서로 보기를 간절히 바란다. [성도의 교제; 보기를 간절히 바람] 성도의 교제는 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13-14절). 사람이 사람을 보아야 할 당위성은 강력한 끈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인간적인 끈은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의 백성은 성령의 교통으로 연합되어 교제를 이룬다. 성령의 사람들은 성령의 사람을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성령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뻐하며 연합하며 동역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은 큰 평안과 위로와 확신을 나눌 수 있다. 성령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육의 방식으로 교제한다면 육의 사람이다. 성령의 사람은 사랑으로 끊임없이 경건을 증진하며, 진리를 추구한다. 동역자들의 선을 본받으려는 행동 방식으로 형제의 연합을 이룬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너무나 짧아 선을 다행하지도 못하고 죽을 확률이 너무나 확실하다. 주께서 허락하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주를 사모하며 아름다운 동역이 있기를 바란다. 사역자의 문안으로 사역자와 성도, 그리고 성도와 성도들의 동역은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 평강이 있을 것이다. 그 믿음의 길에서 만나고 기억되는 친구들을 위해서 문안하며 기도해야 한다(15절).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