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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칼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자가 아름답다【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31) 이웃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18 더 나은 삶의 질 지수’(The Better Life·BLI)에 따르면 우리나라 종합순위는 조사국 40개국 가운데 30위를 기록했다. 11개 영역 중에 사회적 관계, 환경 영역은 각각 40위로 꼴찌를 기록했다. 사회적 관계 영역은 10점 만점에 0점을 받았다. 세부 지표로는 ‘필요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비율이 78%로 OECD 평균 89%에 한참 못 미치며 가장 낮았다. 한국 사회는 필요할 때 의지할 이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웃이란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 다섯 가운데 가장 중요한 단어는 ‘לְרֵע’(레아)이다. 구약성경에서 이웃은 동료 이스라엘인을 가리킨다. 레위기 19:18은 대구 형식(parallelism)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동포’와 ‘이웃’은 동일하다. 그런데 외국인, 즉 이방인에 대해서는 이웃과는 달리 대하라는 규정이 기록되어 있다(신 23:19, 20; 참조, 마 5:43). 레위기 19:18에서 말하는 ‘이웃’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염두하고 있다. 이웃에 해당하는 ‘plhsivon’(플레시온)은 ‘매우 가까이’의 의미가 있는 ‘plhsivo"’(플레시오스)에서 파생되었다. 이웃이란 ‘옆에 있는 사람’ 따라서 보다 일반적으로 ‘이웃 사람’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윤리적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플레시온는 단지 공간적으로 이웃에 사는 사람 이상의 이웃을 의미한다. 주후 1세기에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인들이 섞여 살았다. 유대인들의 눈에 비치는 비유대인들은 ‘아무 죄도 없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외인들이 아니라 대체로 이방의 지배라는 가증스러운 상태의 표현으로 비춰졌다.

 

1. 누가 이웃인가

구약에서 이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다섯인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לְרֵעֲ’(레아)이다. 이 용어가 사용된 배경은 특히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본문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율법은 분명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으며,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 적용되었음이 분명하다. 신약에서는 ‘plhsivon’(플레시온)이 명령에서 8회 인용되었다. 이 단어는 부사로서 서술어로 사용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정관사와 더불어 사용된다(눅 10:29). 요한복음 4:5을 제외하고는 명사로만 사용된다. 예수님은 율법에 대한 그의 요약을 통해 하나님뿐만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계명에 대해 언급한다.

이웃의 반대어는 무엇일까. ‘네 자신’은 있고 ‘네 이웃’이 없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나는 있는데 너가 없는 세상은 고독한 세상이고, 너와 관계를 끊고 사는 무연(無緣) 사회다. ‘무연사회’란 2010년 일본 NHK가 방영한 특집 이름이다. 특집 다큐멘터리에서 “한 해 무연고 사망자가 3만2000명에 이른다”고 보도해 충격을 던졌다. 혼자 1인 가구에서 외롭게 살다가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혼살혼죽’ 현상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내 이웃’이 없이 ‘나 혼자’ 사는 1인가구가 대세가 되었다. 보건복지부의 ‘통계로 보는 사회보장 2018’에 따르면 1인 가구 수는 2017년 기준 561만9000가구로, 전체 가구의 28.6%로 가장 높은 비중을 기록했다. 가구 유형별 구성비를 보면 2047년 37.3%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 때가 되면 이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해야 할지 모른다. 이웃에 해당하는 가족․친척․사회 구성원에서 단절된 채 홀로 살다 아무도 모르게 최후를 맞는 것을 고독사라고 한다.

이웃이 없는 사회가 무연사회일 것이다. 이 말은 1인 가구의 증가와 경기 침체 등의 요인으로 인간관계가 약해진 사회를 뜻하는 말로 수년 전 일본에서 생겨났다. 한국에서도 무연고 사망자가 꾸준히 늘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실태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고독사도 문제지만 시신을 인수할 연고자가 없거나, 가족이 있어도 시신을 인수를 거부하는 무연사, 즉 무연고 사망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연간 무연고 사망자 수는 2012년 이후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2018년 무연고 사망자 10명 중 7명은 기초생활수급자였다. 보건복지부는 국회에 “2018년 무연고 사망자가 2447명”이라고 보고했다. 독거노인 증가 등 사회적 요인, 노후 파산 등 경제적인 요인이 겹치면서 무연고 사망자가 늘어나는 상황은 계속 악화할 가능성이 높다.

가족과 관계가 단절 된 채 이웃도 없이 쓸쓸히 혼자 최후를 맞는 50대 남성은 332명으로(26.6%)으로 다른 연령대에 비해 특히 무연고 사망이 많았다. 또한 중․장년층 남성이 931명(75%)으로 여성(18%, 미상 7%)보다 4배 넘게 많았다. 40․50대 무연고 사망자들의 집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네 가지 있다. 텅 빈 냉장고와 술병․병원진단서․복권 등이다. 경제력의 부재와 가족과 사회로부터의 고립이 무연고 사망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2.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율법은 예수님에 의해서, 바울에 의해서(롬 13:9; 갈 5:14) 그리고 야고보에 의해서(약 2:8) 인용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새롭고 참신한 의미로 제시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이웃에 대한 대상에는 친구들뿐만 아니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 특히 원수와 대적하는 자, 즉 적들도 포함된다(마 5:44).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들을 때 ‘누구를 사랑할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이웃이 누구냐고 물어야 한다.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상이 없다. 세리도 이런 사랑은 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한다(마 5:44). 하나님을 사랑하는 계명은 십계명의 다섯 계명을 요약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은 둘째 부분의 다섯 계명을 요약한다. 예수님은 율법을 두 계명으로 요약함으로써 유대 경건의 중심에 서시게 된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고대 규례로서는 대단히 특이한 것이고 현대 사회에서는 특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사회에서 이스라엘만이 유일하게 이웃에게 유리하게 행하라는 암시적이고 공공연한 의무를 부과하기 때문이다. 이기적이 아닌 이타적인 사랑이 첫째 되는 계명에 속하고 있고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는 점은 특이하지 않을 수 없다.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의 대상에게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신다. 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언약적 갱신을 언급하는 레위기 17-26장의 일부에 해당하는 연설로서(19:1-37) 이스라엘 삶이 하나님의 거룩(19:1)을 반영한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인다.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1647) by Balthasar van Cortbemde [Wikipedia]

곤경에 빠진 사람을 모른 체 하고 자기 이익만 챙기면 ‘짐승 같은 사람’이라는 욕을 먹는다. 짐승도 그런 짓은 안 한다는 것이다. 2011년 미국 시카고대 연구진의 실험에서 쥐도 눈앞의 먹이와 물에 빠진 동료 중에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은 동료를 구하는 것으로 국제학술지 ‘동물 인지’ 인터넷 판에 실렸다.

나르시시즘의 어원이 된 그리스 신화 속 나르키소스(Narcissus)는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져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그렇게 그 자리에서 메말라갔다. 자기애가 너무 강한 사람이 있다. 잘난 체와 오만에 빠져 지구가 자기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한다. 반면 자기애가 부족한 사람이 있다. 누군가의 칭찬에도 움츠러들고 끊임없이 회의를 품으며 외로워하는 경우도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계명은 자기애의 강도와 무관하다.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냐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애가 시작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시작이다. 오히려 자신을 사랑하는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권면이 없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본문의 논리는 마치 자기 자신이 받는 쪽인 것처럼 다른 사람을 향하여 사랑을 실천하라는 언약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 명령은 결코 자신을 배려하거나 잘 대하라는 의미를 보여주지 않는다(참조, 엡 5:29). 자신을 강하게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가 이웃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율법교사는 레위기 19:18 중 일부분을 인용한다. 이 부분에는 자기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들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 사랑은 사랑의 이중계명이다. 율법교사는 레위기 19:18의 말씀을 중심으로 ‘내 이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레위기 19:34의 말씀을 확대하여 말씀한다. 전자에 나오는 이웃은 ‘이스라엘 사람’이 율법교사나 유대인의 이웃이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이웃은 이스라엘 땅에 우거하는 ‘거류민’(גֵּר, 게르), 즉 나그네를 포함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집트에서 난민 생활을 하였던 민족이기 때문이다. 대인관계에서 ‘나’를 중심에 두려는 이기주의와 나이․지위․경험에서 오는 ‘우월주의’가 결합된 사람을 꼰대라고 한다면 율법교사는 당대의 전형적인 꼰대가 아닐 수 없다.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도 꼰대에 해당한다. 2030 세대는 친근하면서도 다소 측은한 이미지가 담겨 있는 성인남성을 ‘아재’라 일컫는데, 꼰대는 꽉 막혀 말이 통하지 않고 독불장군 같은 이들을 통칭한다.

예수님은 사람이 누구를 도와야 할 정보를 주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지 않으신다. 율법교사를 비롯한 비유에 등장한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데 실패한 까닭은 율법에 대한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사랑의 결핍이다. 영생, 즉 ‘오는 세대의 삶’인 신적 생명은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자신만 잘 살겠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공동체이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또한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도 아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을 받는 쪽인 것처럼 이와 같이 이웃을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승희 목사  titeiosle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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