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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철목사 연재】 숨통을 틔워라 (2)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코이노니아의 중심에 선 십자가 예수님

공자의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의 시습(時習)을 제대로 주해하면 “때때로 익힘”이 된다. 이는 복습의 의미라기보다 배운 바를 실천함에 가깝다. 실천 없는 배움은 무의미하다. 배움의 진정한 즐거움은 실천을 통한 배움의 완결에 있다. 득도에 이르는 길은 많이 알려졌지만 득도에 이른 자는 없다. 신선이 되고 천사의 비상을 아무리 익혀도 인간은 여전히 코로 숨을 쉬고 잠깐의 도약을 이룰 뿐이다. 그럼에도 존재의 승격을 위한 몸부림은 의미가 있다. 나비의 퍼덕거리는 한 동작이 지구의 반대편에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면 인간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날갯짓에는 영원에까지 미치는 효과가 있다. 추락하지 않기 위한 무수한 날갯짓만이 비상의 기적을 이룬다.

주님은 코이노니아로 오셨다. 하나님이 하늘에 머물러 계시고 인간이 땅에 머물러 있었다면 코이노니아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인간 가운데 거하시면서 코이노니아는 이루어졌다. 코이노니아는 인간을 하나님 되게 하심으로 부르심이 아니다. 인간이 되신 그 자리까지 다만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서기를 바라는 갈망이시다. 죄는 인간에게서 참 인간성을 앗아갔다. 하나님과 인간은 잃어버린 형상을 떠나서는 호리라도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인간되심은 잃어버린 형상을 되찾기 위해, 첫 아담이 상실했던 참 인간성의 한 표본으로 다가오셨음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코이노니아는 동등의 사귐에 있다. 높고 낮음이 아니라 평등한 수평선상에서 너와 내가 우리 안에 함께 아우름(togetherness)에 있다. 평등은 성육신의 중심에서 의미를 지닌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에게서 죄의 무게에 짓눌린 인간을 살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신성으로 덧입혀진 인간을 헤아린다. 교회가 잃은 중요한 자산 중에 으뜸가는 것이 바로 코이노니아다. 코이노니아에는 주고받음의 동작이 있지만 그 핵심은 무엇을 주고받아서가 아니라 함께 있음으로서 느끼는 본질적인 친밀감에 있다. 하나님 임재의 핵심은 성령 안에서 나누는 친교다. 살벌한 인간관계의 막힌 숨통을 트는 길이 친교에 있다.

 

수수한 주님과 화려한 교회

뚝배기의 아름다움은 질박함에 있고 시골 아낙네의 인심은 소박함에 있다. 교회의 원형은 화려하지 않았다. 교회의 주님이신 메시아의 출현 자체가 그러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다. 세상이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그분에게는 전혀 없으셨다.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순전함이나 거룩함이란 바로 질박함이나 소박함에 다름 아니다. 교회의 원상은 무엇에 덧댄 흔적이 전혀 없는 그런 단순함이었다. 빛이 없어도 자체의 빛으로 빛났고 힘을 축적하지 않았음에도 내재된 능력이 주위를 압도하였다. 지금의 교회는 너무 화려하다. 장엄미까지 더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부와 힘으로 치장된 교회는 이전의 날렵함을 잃어버렸다. 이제 인간이 움츠려드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직면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종교적 치장이 내뿜는 휘광의 기운 때문이다.

하나님은 불붙는 가시덤불 사이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시내산에서 보이신 영광의 현현도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수수하다 못해 거칠기까지 한 하나님의 자기현현은 나무에 달려 저주받은 자를 자처하신 주님에게서 절정을 이룬다. 움푹 팬 음부의 현관에서 피투성이가 된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이 비웃고 자기 백성들마저 외면하며 사탄은 박장대소했다. 세속적 영광을 우습게 여기는 핍절함의 의미를 알았기에 광야의 주님은 주린 배를 거머쥔 채 사탄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마른 막대기에 살구꽃이 피어나듯 주님의 부활은 마른 땅에서 솟아난 생명의 싹으로 사막에서 샘솟은 물줄기와 함께 죽음의 음산한 공기로 가득했던 세상을 뒤집어 낙원의 초입(初入) 삼으셨다.

 

예수님의 후예? 니므롯의 후예?

예수는 목자 없는 양들을 위한 목자로 오셨다. 목자 없이 유리하는 양떼들을 돌보시기 위해 험한 산을 넘고 깊은 개울을 건너셨다. 하늘보좌에서 지구를 찾아오기가 그리 쉽기만 했을까? 우주의 뒷마당에서 별들로 구슬치기를 하시던 주님이 가장 작은 별 중의 하나인 지구에 몸을 맡기시기가 수월치만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되심은 천지가 개벽할 일을 훨씬 능가하는 대사건이었다.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셨던 그분이 버려진 양떼들을 보살피기 위해 그 자신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다. 그분은 한편으로 양이시면서 다른 한편으로 목자이셨다. 양과 목자의 이중적 이미지는 하나님이요 인간이신 주님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다. 오늘 이 목자와 전혀 다른 목자들의 뒤틀린 상이 세상을 더욱 절망적이게 만든다. 그들은 삯군보다 못한 늑탈자요 양이기를 거절하는 못된 종자들이다.

주님은 양떼를 살피지 않고 자기를 돌보는 화의 목자들을 대신해 버려지고 늑탈당하는 양떼들을 위해 사셨다. 목자장이신 예수는 양떼들의 목양을 위해 삯군이 된 목자들의 횡포에 맞서 싸우시다 희생당하셨다.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죽으심으로 영원한 목자장이 되셨다. 그분이 세상 곳곳에 양의 우리를 지으시고 자신이 구속하신 양떼들을 목자들에게 맡기셨다. 오늘의 교회는 위임받은 목자권을 포기하고 권리 행사에만 여념이 없다. 젯밥만 챙기려 든다. 그때 그분 곁에는 어부, 농부, 마부처럼 필부의 삶들이 녹아들었지만 지금 교회 곁에는 “사”자로 끝나는 강자들이 포진하고 있다. 목자장이신 주님의 길을 따르는 소수의 목자들과 별다른 별종들이 교권을 틀어쥐고 있다. 힘을 숭상하는 니므롯의 후예들이 교회 안팎을 휘젓고 다닌다. 참된 능력의 원천인 성령이 자취를 감추셨다. 성령의 부재는 교회의 숨통을 막아버린다.

 

비우는 교회, 군림하는 교회

교회는 자신을 강하게 함으로서가 아니라 약해짐으로 힘을 발휘한다. 교회의 힘은 약함의 끝자락에서 얻는 절세의 유연함에 있다. 천사가 자신의 존재를 잊음으로 한없이 가벼워져 나는 것처럼 교회는 자신을 비울 때 높은 비상을 이룬다. 하나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졌을 때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다. 역설의 위대한 반전이었다. 주님의 일시적 비움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로 채워졌던 인간영혼에 채워야 할 것을 채우게 만드는 충만의 사건이었다. 단연코 자기충일의 최고 상태는 철저한 자기 비움에 있다. 겸손이 영성에 있어 최고의 덕목으로 추앙받는 이유도 그것이 비움의 최고봉이기 때문이다. 낮추고 비우고 버림 없이 다다를 영성의 고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가 세상과 통정을 나누며 군림하는 힘에 맛들이면서 고이 간직되었던 아름답고 거룩한 전통들이 잠식당했다.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나실인의 표식인 머리털이 밀리면 힘이 사라진다. 교회의 치렁대던 머리털이 통째로 싹둑 잘려나갔다. 원수들이 몰래 자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삭발하였다. 교회는 세상 왕국을 거머쥐기 위해 사탄에게 경배의 무릎을 꿇었다.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사후의 영광보다 현세의 영화가 더욱 매혹적이었다. 박해와 순교의 거친 삶보다 안정과 위력의 탄력 있는 삶에 더 끌렸다. 머리털이 밀리자 교회의 근원적인 힘은 사라지고 세상을 혜안으로 살피던 두 눈알마저 뽑혔다. 그렇게 감옥 같은 세상에서 맷돌을 돌리는 삼손의 처량한 모습이 오늘 교회의 진면목이다. 삼손은 회오의 피눈물을 흘렸지만 오늘의 교회는 유령 같은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다. 교회가 삼손이 보였던 마지막 동작에 이르지 못하면 부끄러운 결말에 이르게 될 것이다.

 

교회여, 탐욕의 군살을 제거하라

곰곰이 생각해 보라! 중세교회는 은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세상의 권력과 영화까지 송두리째 차지하지 않았던가! 그 파국적인 결과는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교훈하는 바다. 안타깝게 제정러시아의 정교 역시 가톨릭의 전철을 피하지 못했다. 결과는 비참했다. 교회는 빅뱅에 버금가는 분열을 경험했고 수난의 질곡에서 한참을 벗어나지 못했다. 얻은 것은 순교자였지만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지난 역사의 거울을 바라보면서 구습을 좇는 어리석음을 현대교회에게서 본다. 비대해진 교회를 날렵하게 만들려면 탐욕으로 삐져나온 군살을 제거하고 우상세력의 복부비만을 제거해야 한다. 자기를 버리는 몰아(沒我)까지 이르러야 구원에 이른다. 날마다의 죽음을 선포했던 바울의 자기 도살 의지가 내면에서부터 용암처럼 분출되어야 한다. 이렇게 죄성의 죽음과 장사가 이루어지면 비로소 영혼의 숨쉬기도 편하다.

돈에서 자유로운 영성이 바르다. 돈은 권력이요 명예다. 권력과 명예가 주는 즐거움과 힘은 너무 매력적이어서 자칫 한 번 휘감기면 벗어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최선은 멀리 하는 것이요 차선은 재빨리 벗어나는 것이다. 돈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면 권력과 명예의 너울도 치울 수 있다. 맘몬에게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경배를 요구하는 신성이 숨어있다. 모든 돈의 배후에 애전(愛錢)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사람들을 조종할 끈이 있다. 그 끈을 맘몬이 틀어쥐고 그 맘몬을 사탄이 부린다. 돈은 쉬지 않는 악의 화신이요 우상의 핵심 부품이다. 우상이 있는 곳에 반드시 돈이 있고 돈이 움직이는 곳에 우상의 그림자가 생긴다.

 

교회다움의 상실은 가난이 아니라 부유함 때문

교회는 은금이 풍부해도 본질적으로 은과 금이 없어야 한다. 가져도 가지지 않은 듯이 살아야 한다. 은금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교회는 모든 재정권을 주님께 귀속시켜야 한다. 교회가 소유한 재정사용권을 주님께 넘긴다면 세상은 보다 풍요롭고 교회는 보다 은혜 안에서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너무 가난해서 하나님의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가진 것이 많아 하나님의 뜻에서 멀다. 교회는 천지창조처럼 무에서 생겨났다. 욕심에서 자유로워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가난은 교회의 수치가 아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주님의 임재로 충분하지 않은가?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신 주님 한 분을 소유함이 곧 만물을 얻음임을 어찌 모르는가? 입으로 고백하고 자신 있게 설파하면서 정작 자신에게 적용함에 머뭇거림은 자가당착이다.

물신의 시대는 불신의 시대다. 물질이 신으로 떠받들어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거추장스럽다. 하나님의 존재가 더욱 절실하지만 세태가 그렇다는 말이다. 아무 것도 아닌 우상들이 설쳐대는 세상에서 신성을 잃어버린 인간 영혼은 실체일 수 없는 그림자에 마음을 뺏기고 살아간다. 환영을 좇아가다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 산산조각 나는 것은 동경했던 숱한 세월들이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인간이 바라보는 사방세계는 각종 우상이 신기루처럼 어른거린다. 마음의 고삐를 죄지 않으면 오염되고 혼탁 되기는 눈 깜짝할 사이다. 허상이 망막에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마음이 이미 허탄한 곳을 향했고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한사코 뿌리쳐야 한다. 쉼 없이 잔가지를 쳐내야 한다.

 

배금주의의 끈질긴 영을 끊으라

맘몬은 끈질긴 영이다. 거미줄같이 가늘디가늘지만 한 번 걸려들면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싯딤 골짜기의 역청구덩이처럼 맘모니즘의 늪에 빠지면 버둥거릴수록 더 빠져든다. 돈은 무시할 수 없는 힘인 것이 사실이다. 힘에 눌려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쉽사리 항복의 백기를 드는 것은 영혼의 수치다. 돈은 좋은 하인이지만 나쁜 주인임을 명심하라! 다스리면 굴복하지만 겁을 집어먹으면 날름 한 입에 삼켜버린다. 좌청룡 우백호처럼 사탄에게는 좌물신 우불신이 있다. 때려 부수는 것만이 상수다. 맘몬의 비늘 하나라도 목에 가시처럼 걸리면 호흡이 자유롭지 못하다.

우상은 신앙의 가시적인 형식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이 투영된 실체다.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그저 겉껍질로서의 의식이 아니다. 우상의 본질인 거짓 영과 합일됨이다. 신사참배를 극력하게 반대하고 거절해 옥고를 치르며 순교에 이르렀던 이들은 생각이 짧거나 신학적 소견이 모자라서 허탄하게 목숨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진정한 생명과 신앙을 지키는 마지노선이었다. 그들은 옳았고 그래서 존경받아 마땅하다. 한국교회가 여태껏 부수지 못하고 애지중지하는 우상이 바로 배금주의로 도색된 맘몬이다. 바르고 거룩하게 살아간다고 호언하는 자신조차도 가끔 맘몬의 그럴듯한 제의에 솔깃해하지 않았던가!

함석헌선생의 질타를 잠시 들어보라! “사실 언제나 타락은 황금에서 온다. 광야의 교회는 금송아지 숭배로 타락이 됐다. 다른 사람도 아닌 믿고 택해 세운 아론, 미리암이 앞장을 서서 그렇게 했다는 데 더 슬픔이 있다....... 황금이 무엇인가? 이미 있는 질서, 제도, 권력의 심볼이다.” 그에게 황금은 단순히 물질에 탐닉된 욕심이 아니었다. 약자를 짓누르기 좋게 세워진 질서, 강자들이 제멋대로 굴어도 안전한 제도, 권력에 대한 집착과 권위의 무자비한 남용까지 욕심덩어리로 보았다. 기성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지탄받고 늘 교회의 변경 지대를 맴돌아야 했던 그가 몸으로 부닥쳐 깨달은 탁견이기에 고개를 함께 끄덕인다.

 

돈 독에 취한 교회여 기도로 숨통을 열라

수년 전 미국 조지아 주의 베인스브리지(Bainsbridge)에 소재한 어느 흑인교회(First African Baptist Church)는 50년 이상 출석하던 조세핀 킹(Josephine King)이 십일조를 내지 않아 교회 재정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교회 출석을 금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십일조 강국인 한국도 아니고 헌금생활이 비교적 자유로운 미국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는 사실이 도시 믿기 어려울 지경이다. ‘돈 독’으로밖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신앙생활이 헌금만은 아닌데 50년 이상 성도 간에 나누었던 ‘돈독’한 관계마저 ‘돈 독’ 오른 목회자에 의해 파국을 맞게 되었으니 맘몬이 그를 기뻐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돈 독’을 치료할 해독제는 구하기가 어렵다. 그동안 처방한 약들로 인해 내성이 생겨 웬만한 약효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돈 독’은 독 중에도 가장 센 극독이다. 교회가 극독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면 회개 불가능한 영원한 죄에 빠진다. 어떡해서든 이런 파국으로 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교회 자체의 뼈를 꺾고 깎는 자구책이 절실하다.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그 참담함을 인정한 연후에 진실한 참회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숨 막힌 상태에서 언제라도 심장 박동이 정지할 위험성을 미연에 방지함이다. 막힌 기도를 뚫어야 산다. 말씀의 절개와 기도의 삽입만이 길이다. 은과 금이 없어 교회가 힘을 쓰지 못하는 게 아니다. 세상에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의 실체가 흐릿해져 무기력해진 것이다. 언제나 능력의 원천은 하나님,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우리의 불같은 믿음이다. 그것들이 우리의 막힌 숨통을 트게 만든다.

 

 

한명철 목사  jesuspoin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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