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예배당 정문에 게시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종교개혁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칼빈파입니다. 종교개혁교회는 크게 루터파와 칼빈파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칼빈파이지만 루터가 반박문을 게시한 그 날을 함께 기념합니다. 루터와 칼빈의 사상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루터를 잘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다. 루터가 1517년 게시한 95개조 반박문은 “죽은자의 사면을 위한 면죄부” 시행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루터는 이신칭의, 사도 바울이 가르친 복음으로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힘써 외치고 있습니다. 루터가 외치지 않았다면 구원의 복음은 여전히 교황주의(천주교)에 막혀서 거짓된 교회 가르침에 머물고 있었을 것입니다. 진리의 빛은 결코 어둠이 감출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은 교회가 진리의 빛을 감출 수 있는 강력한 기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실례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교회가 주의 은혜를 감추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주의 빛을 잘 비출 수 있도록 개혁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어둠으로 빛을 감추는 것을 개혁해야 합니다. 교회는 개혁을 쉬지 않아야 합니다. 개혁된 교회(Ecclesia reformata)는 쉼없이 개혁을 진행해야 합니다(semper reformanda).

한국교회는 사회와 함께 수구 이데올로기와 진보 이데올로기가 팽배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 진영논리는 가장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사고로 상대방을 판단하며 정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기독교는 매주일 설교를 듣습니다. 복음을 듣는 그리스도인의 사고가 단순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개혁된 교회의 성도는 명료한 신앙을 추구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빛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루터(Martin Luther)는 이신칭의를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으로 세웠습니다. 루터는 이신칭의로 교회가 만들어지고 존속되기 때문에, 이 조항을 가르치지 않으면 참된 신학(vera theologia)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이신칭의 교리를 거부하는 부류를 교황주의자들, 수도사들, 재세례파 사람들로 구분하며, 그들이 이신칭의 교리를 박해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루터는 재세례파와 교황주의자들의 공통점을 하나님의 일이 인간의 존엄한 행위에 의존한다고 평가한 것입니다(김용주: 2017, 108).

존 칼빈은 이신칭의 체계를 기독교의 “주요 경첩(the main hinge)”이라고 했습니다. 루터, 멜랑톤, 칼빈의 관계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관계입니다. 김용주는 멜랑톤(Cryptho-Calvinist)과 칼빈의 관계를 묶었습니다. 칼빈은 루터의 칭의론은 최고의 교리로 보았습니다. 김용주는 칼빈의 예정 교리도 칭의 교리를 빛나게 하는 교리라고 제시했습니다(김용주: 2017, 178). 이신칭의 교리는 루터와 칼빈의 교리, 종교개혁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루터의 칭의 이해는 김용주 박사의 글로 이해한다면 좀 더 좋은 이해가 될 것입니다(김용주, 『칭의, 루터에게 묻다』 (서울: 좋은씨앗, 2017)).

우리는 16세기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을 개혁된 교회(Ecclesia reformata)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더 엄밀한 개혁(semper reformanda)을 하기 위해서 정진하고 있습니다. 그 진행을 위해서 루터와 칼빈을 명료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고, 우리시대에 종교개혁의 가치를 떠난 것과 더 개혁해야 할 사안들을 밝혀야 합니다. 500년 동안 두 사람 혹은 한 사람도 정확하게 이해한 학자는 없습니다. semper reformanda는 자명한 원리이지만, 그 원리를 시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신학 정보가 취합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영역에서 힘써 개혁을 진행하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개혁파는 신자의 내면의 죄를 개혁하는 성화와 사회에서 창조 질서를 구현하는 문화 사역을 진행합니다. 모두 복음으로 해야 하지만 전자는 특별계시에 근거한 것이고, 후자는 일반계시에 근거한 것입니다.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이 활성화되자 교황주의는 예수회의 주도로 트렌트 회의 (Concilium Tridentinum, 1545-1563)를 개최하였습니다. 트렌트 회의 개최 후 1년 뒤 1546년에 루터가 소천되었고, 종료 후 1년 뒤인 1564년에 칼빈이 소천되었습니다. 우리는 트렌트 회의가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인지 종교개혁(semper reformanda)인지를 규정해야 합니다.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는 서방교회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 문장을 거부하는 신학자는 한 명도 없다. 천주교(교황주의)도 개혁교회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반드시 개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semper reformanda).

최덕성 박사는 김세윤, 새관점학파 등을 칼빈이 비판한 트렌트 회의의 칭의교령과 유사하다고 주장했습니다(최덕성, “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칼빈의 해독문(解毒文) :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과 관련하여”, 『역사신학 논총』 30권, 2017년). 요지는 “구원의 확실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개혁파는 하나님께서 시작한 구원을 누구도 폐기시킬 수 없음을 믿기 때문에, 구원의 확실성을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이신칭의와 구원의 확실성”은 한 짝입니다. 칼빈은 이중예정(duplex praedestinatio)까지 발전시켰습니다. 칼빈이 칭의 교리를 경첩(hinge)라고 제시하였는데, 칭의 교리는 원죄에서 종말까지 모든 교리의 중심에서 연결하는 힌지(hinge)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칭의 교리가 무너지면 루터와 칼빈의 제시처럼 신학은 붕괴될 것입니다. 루터와 칼빈이 확립한 성경 말씀에 근거한 이신칭의 교리를 지켜야 죄사함과 영생의 진리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개혁파 성도는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죄사함과 영생의 진리를 지키며, 창조 질서로 풍성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이루어갈 수 있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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