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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의 아레오바고】 종교개혁 500주년에 대한 신학적 반성패러다임의 변화가 요청되는 현대 개신교회

 

박호용 교수┃대일고 1회, 연세대 철학과(B.A.), 장로회 신학대학원(M.Div.), 연세대 대학원 신학과(Th.M., Ph.D.) 졸업. 대전신학대학교 교수(구약학) 역임. 대전신학대학교 신대원장, 유라시아 선교회 회장 역임, 총회 파송(예장통합) 선교사[설교집]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부르다가 내가 죽을 노래》,《첫사랑의 날카로운 추억》,《예수사랑의 연가》,《감악산의 두 돌판: 요한복음서 강해설교》 [저서] 《야웨인지공식》,《폰 라드: 구원사의 신학》,《요한복음서 재발견》,《요한의 천재성: 상징코드》,《천하제일지서 요한복음》,《창세기 주석》,《출애굽기 주석》,《에스겔 주석》,《요한복음 주석》,《성경개관(한글판, 중국어판)》 와 역서 다수

패러다임의 변화가 요청되는 현대 개신교회

토마스 쿤(T. Kuhn, 1922-96)은 과학의 발전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교체(paradigm shift)’에 의해 혁명적으로 이루어지며, 이 변화를 ‘과학혁명’이라고 불렀다. 역사상 최고의 과학혁명은 천동설(지구중심설)이 지동설(태양중심설)로의 변화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지난 2천년 동안의 기독교회의 역사는 약 500년 단위로 분열과 개혁의 길을 걸어왔다. 이는 약 500년 단위마다 기존의 패러다임은 불가피하게 변화가 요청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있은 지 500년이 지났다. 그렇다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주장한 기존의 패러다임 또한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역사가 부르크하르트(J. Burchhardt, 1818-97)는 기존의 균형(정치, 종교, 문화)이 깨어질 때 위기의식이 생긴다고 했다. 이런 위기에 책임 있게 응답하는 것이 참된 위대성이라고 보았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기존의 사고의 틀이 깨어지고 새로운 사고의 틀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불가피하게 위기의식을 동반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 있는 분들은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해왔고, 2030년이 되면 한국교회는 반 토막이 난다는 불길한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런 위기상황 속에서 개신교회는 지난 2017년 역사적인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했다. 그리고 종교개혁과 관련된 여러 성지를 방문하거나 각종 기념행사를 치렀다. 이로 인해 개신교회는 이전보다 더욱 새로워지고 부흥 발전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교회는 이전보다 새로워지기는커녕 더욱 세상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고, 쇠퇴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실정이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신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 인식의 결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따라서 오늘의 한국교회는 신학적 반성과 새로운 길의 모색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도덕적 위기보다 근원적인 신학적 위기

‘사회주의 체제에서 젊은이들이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지자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가 레닌(1870-1924)은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라”고 조언했다. 루터(M.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처절하게 씨름한 학문적 노력의 결과였다. 종교개혁의 횃불을 든 루터는 그 당시의 위기를 두 가지로 말했다. 하나는 ‘도덕적 위기’이고, 또 하나는 ‘신학적 위기’이다. 중세교회는 도덕적으로 타락했기에 도덕적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신학적 위기’라고 보았다. 즉 도덕적 위기는 어느 시대에나 항상 있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신학적 위기는 더욱 근본적인 위기로서, 그 시대가 요청하는 시대정신이기에 패러다임의 교체를 요청한다. 바로 그 시대는 ‘헬레니즘(인본주의)에서 헤브라이즘(신본주의)으로’의 패러다임의 교체를 요청한 시대였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리에서 성경으로’, 즉 ‘스콜라 신학에서 십자가 신학으로’의 패러다임의 요청이 불가피했다.

지금 한국교회가 맞고 있는 위기에는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측면에서의 도덕적 위기에 직면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더욱 본질적인 위기는 신학적 위기이다. 즉 신학적 패러다임의 변화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바울에서 다시 예수로의 패러다임시프트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당시 기독교회는 도덕적 타락뿐만 아니라 인본주의적인 요소들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만연되어 있었다. 교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나 교회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믿음’ 또는 ‘은혜’와 같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재물이나 교회 직책 또는 인간적 공로와 같은 것으로 대치할 수 있다는 거짓을 자행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빗나간 중세교회적 상황에서 루터는 바울 신학의 이신칭의(이신득의) , 즉, 돈으로 면죄부를 사는 것과 같은 인간적 행위(공로) 로 구원 (‘의롭다 함을 얻는 것’과 같은 의미)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미 의로움을 이루신 그 은혜를 사람이 단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루터는 로마서 1장 16-17절(내가 복음[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의 말씀을 붙들고 제2의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었다. 루터의 제2의 종교개혁은 바울의 복음(바울서신), 즉 ‘십자가 신학’과 ‘하나님의 의(칭의)의 복음’에 기초한 개혁이었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500년이 지난 21세기 제3의 종교개혁은 또 다시 ‘아드 폰테스’, 즉 바울에서 예수로의 패러다임 시프트가 필요하다. 즉 ‘십자가 신학’에서 ‘부활의 신학’으로, ‘하나님의 의의 복음’에서 ‘하나님 나라(천국)의 복음’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를 바울신학적으로 말하면 ‘칭의(믿음)의 복음에서 성화(삶)의 복음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이를 부연설명해 보자.

 

십자가 신학을 넘어 부활의 신학으로

먼저, 십자가 신학에서 부활의 신학으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복음의 두 축(두 날개)이다. 그런데 지난 500년 동안 개신교는 십자가복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또 한 축인 부활의 복음에 대해서는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였다. 배가 양쪽이 균형을 이루어야 항해를 제대로 할 터인데, 십자가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진 나머지 개신교회라는 배는 침몰하고 말았다.

십자가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사랑(은혜)의 십자가이고, 다른 하나는 고난(희생)의 십자가이다. 개신교회(신도들)는 십자가를 강조하면서도 십자가가 갖는 두 가지 의미 중 한 가지, 즉 전자에는 Yes하지만, 후자에는 No했다. 즉 제자도로서의 십자가는 지기 싫은 것이다. 이는 비단 지금만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싫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고난과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신앙이 필요하다.

부활신앙은 죽음을 넘어서는 영생과 세상 나라를 능히 이기고 승리하는 하나님 나라를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 앞에서 다 넘어진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나서 그들은 죽음과 세상을 모두 이기고 순교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도 부활신앙 때문이다.

오늘 세상사에 초연할 수 있는 비결, 즉 세상적인 것들로 인해 넘어지고 변질되는 것을 막아주는 강력한 힘은 부활신앙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삶의 변화가 없고, 세상에 져서 세상이 이끄는 대로 살면서 변질과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부활신앙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시 부활의 복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십자가의 능력이란 부활의 능력에 기인한 것이다(고전 1:18 이하). 부활체험이 있어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제자도인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다.

요한복음은 십자가-부활-십자가 구조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요 10-11-12장; 19-20-21장). 예수의 길은 십자가와 부활의 길이고, 제자의 길은 부활에서 십자가로의 길이다. 십자가 <---예수---> (부활) <---제자---> 십자가. 그러니까 십자가와 십자가 사이의 중심에 부활이 있다. 예수님은 부활을 믿었기에 십자가를 질 수 있었고, 제자들은 부활을 체험했기에 십자가를 질 수 있었던 것이다(‘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복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필자의 저서, 「왕의 복음」 [서울: 쿰란출판사, 2018], 181-290쪽을 참조하라).

 

칭의의 복음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다음으로, 바울의 ‘하나님의 의(칭의)의 복음’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천국) 복음’으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이것이 바로 근원으로의 회귀, 즉 ‘아드 폰테스(Ad fontes!)’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천국)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우리는 천국을 ‘죽으면 가는 나라인 천당’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천국은 그런 개념이 아니다.

루터는 바울의 ‘하나님의 의’ 개념을 두고 능동개념이 아닌 수동 개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종교개혁의 신학적 토대로 삼았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 개념은 ‘가는 나라’ 즉 능동 개념이 아닌 ‘오는 나라’ 즉 수동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즉 우리가 그 나라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향해 ‘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성경에 하나님 나라에 간다는 말은 단 한 구절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하나님 왕국)는 하나님이 왕이 되어 우리(세상)를 통치하기 위해 우리에게 오는 나라이지, 어딘가에 있을 장소를 향해 우리가 가는 그런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천국)의 수동 개념이 중요한 것은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왕(주인, 최고, 기준의 의미)으로 모실 것인가 아닌가를 결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왕으로 행차하시는 그분을 왕으로 모시는 것(시 68:24), 즉 ‘왕의 교체’를 가리켜 믿음(회개, 거듭남)이라고 한다(갈 2:20).

그러니까 회개(거듭남)란 단지 회심과 같은 추상적인 마음의 변화가 아니라 내가 마음으로 왕 삼는 것을 내려놓고 예수를 왕 삼는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분이 왕으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분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분을 왕 삼지 않고 다른 그 무엇을 왕 삼는다면 그것은 믿음(회개, 거듭남)이 아니다. 니고데모 이야기(요 3:1-15)나 부자청년 이야기는 바로 이를 잘 말해준다(마 19:16-30).

그런데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현실을 보면 천국의 본래 개념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도 즐겨 천국을 말하면서도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로의 왕의 교체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천국)가 예수로의 왕의 교체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런 예수를 믿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몰라서 예수를 믿었을 뿐이다(실은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이 기복신앙, 즉 예수가 왕이 아니라 내가 왕이고 예수는 내 문제의 해결사(또는 보디가드)가 되어, 내 소원과 욕심을 만족시켜주시는 분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로의 왕의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은 속사람이 변하지 않은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 ‘무늬만 그리스도인’, 즉 유사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왕의 교체에 의한 속사람의 변화가 없이는 세상 사람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지난 500년 동안 개신교회는 칭의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성화의 중요성을 간과하였다. 즉 삶의 변화가 없는 그리스도인을 양산한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했고, 그리스도인으로 인해 세상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마음 중심에는 예수 아닌 자기만의 또 다른 왕을 꼭꼭 숨겨놓고, 입으로만 “예수 우리 왕이여”를 소리 높이 외친들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왕의 교체를 이루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삶의 변화’를 일컫는 말이다. 제3의 종교개혁이 요청하는 ‘하나님 나라(천국) 복음’으로의 패러다임 시프트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제2의 종교개혁은 칭의를 강조한 나머지 성화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했다. 제3의 종교개혁에서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천국) 개념이 왕의 교체라는 삶의 변화를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왕의 교체로서의 ‘하나님 나라(천국) 복음’에 대해서는 필자의 저서, 「왕의 교체」 [서울: 쿰란출판사, 2017], 89-117쪽을 참조하라). 복음서 중에서도 요한복음은 ‘부활의 복음’(요 11장, 20장)과 ‘하나님 나라(천국) 복음’(요 3장, 18장)을 가장 깊이 있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요한복음은 ‘제3의 종교개혁의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박호용 교수  jesuspoin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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