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고문(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사람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인생의 갈림길이 결정된다. 또 무슨 책을 읽었는가에 따라서 세계관과 인생관이 달라지게 된다. 말하자면 누가 학문과 인생의 멘토(mentor)인가에 따라서 인격이 형성되고, 신앙의 내용도, 일생의 걸음도 결정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병약하고 가난하고, 배경도 없는 연약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귀한 분들을 만나서 흉내 내어 결단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그분들을 따라 가다가 큰 은혜와 복을 받았다. 

1961년 내가 총신에 입학하기로 결정하자, 모 교회인 포항 대흥교회 서복조 집사님이 나를 보자고 했다. 서복조 집사님은 당시 무학여고를 졸업하고, 남편은 포항여고 교장이었다. 그분은 고려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하여 성경진리에 밝았고 한국교회의 현실을 꿰뚫으면서 성경을 잘 가르치던 분이었다. 서집사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 보더니 
「정선생! 신학 공부하러 서울로 간다면서… 서울에 가면 반드시 박윤선 박사를 만나세요! 정선생이 박윤선 박사의 신학과 신앙을 그대로 받으면 앞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크게 일할 것이고, 정선생의 일생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서복조 집사의 말이 비수처럼 내 가슴에 꽂혔다. 나는 서울로 올라와 1961년에 개척된 서울 동산교회에 박윤선 목사님의 문하생이 되어 전도사로, 조교로, 주석 교정자로, 심부름꾼으로 26년을 박윤선 박사와 함께 했다. 그리고 어줍잖게 박윤선 박사의 흉내를 내다가 오늘에 이르렀다. 

내가 박윤선 박사의 주석을 교정하다가 발견한 것은, 그의 주석 책에 참고 문헌의 절반이 화란 칼빈주의 학자들의 책이었다. 거기에는 카이퍼, 바빙크, 리델보스, 벨카워, 헤르만 도예베르트의 사상이 들어있었다. 그 때 나는 생각하기를, 박윤선 박사의 뒤를 따르려면 우선 화란어를 배워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박목사님 댁을 찾아갔다. 「목사님! 화란어를 공부하고 싶은데 자습서가 있으면 빌려주세요」박목사님은 두 말 없이 영어로 된 자습서를 빌려주었다. 그 책을 노트에 옮겨 쓰다가 나는 <화란어 문법의 연구>란 책을 출판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나는 뜻하지 않게 1970년 한국 외국어대학교 화란어과 창설교수가 되었다. 그 후 나는 일찍이 박윤선 목사님이 공부했던 화란 프라야대학교(Vrije Universiteit)에 유학가게 되었다. 참으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영어도, 화란어도 시원치 않던 내가 배짱으로 덜컥 유학의 길에 올랐던 것이다. 아내와 두 아이들은 남의 집 문간방에 남겨 두고, 비행기 표가 없어서, 홀트 양자회의 에스코터로 취직해서 돌아올 수 없는 9만5천원짜리 비행기표를 얻어 유학을 갔다. 내 호주머니에는 단 돈 100불이 전부였다. 유학을 갔으나 말도, 글도 잘 모르고 고국에 둔 아내와 아이들 걱정, 갑자기 서양에 온 문화적 충격 때문에 무척 방황하고 있었다. 

그 때 나는 기왕에 화란에 온 김에 당대 최고의 칼빈주의의 창시자인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 1894-1977)박사를 꼭 만나서 칼빈주의 사상을 직접 배우고 싶었다. 나는 전화번호부에 들어가서 그의 주소와 전화를 알아내고 공중전화로 면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개혁주의 사상의 태두인 헤르만 도예베르트 박사와 마주 앉았다. 나는 알고 싶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박사님! 박사님이 주장하는 칼빈주의 신학과 철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라고 당돌하게 물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82세였다. 노 석학은 천정까지 사방으로 책으로 가득 찬 서재의 한 가운데 계속 집필 중이었다. 그리고 그는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홀로 지내고 있었다. 

헤르만 도예베르트 박사는 천천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신학자도 아니고, 나는 본래 법철학자입니다. 나의 칼빈주의 사상의 근거는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란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가 되어 신학과 신앙,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법률, 예술의 칼빈주의적 세계관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제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대 칼빈주의 신학자요, 정치가요, 언론이었고, 대 목회자, 대 설교가였던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Souveiniteit in eigen kring) 사상」을 발전시킨 것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그제야 개혁주의 신학의 바탕을 깨닫게 되었고, 칼빈주의 사상의 근거는 칼빈(John Calvin)과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그토록 힘주어 강조했던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기초이며, 우리의 사상과 삶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1972년 그 해 겨울, 나는 데카르트 이후의 최고의 사상가였던 거장 헤르만 도예베르트와의 만남을 통해서 나는 만유의 주,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 인생과 우주에 대한 깨달음이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이란 확신으로 지금까지 가르치며 외치며 살아오고 있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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