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중국발 미세 먼지로 이 겨울을 나기 쉽지 않을 듯하다. 앞이 안 보이는 희뿌연 먼지로 황사 마스크도 소용 없단다. 요즈음 우리들 주변의 화제는 온통 환경오염에 관한 말들이다. 지금은 많이 개선 되었다고는 하나, 생명의 젖줄인 강들은 다 죽었고, 물고기도 살 수 없는 온갖 화학물질로 뒤범벅이 된 오염된 시궁창이 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악덕 기업, 부도덕한 기업을 정죄하고 규탄하고 배상을 요구하는 모양이다. 한 때는 어떤 기업의 상품을 불매운동하자고 야단이더니만 그것도 몇 날 못 가서 시들해서 기억에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뼈아픈 가난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불도저 식으로 밀어 붙여서 안되면 되게 하는 산업사회 경제 제일주의 사상을 국가 지표로 삼은 나머지 오늘의 산업 선진국의 문턱에 서게 된 것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곳곳에 댐을 만들고, 둑을 쌓아서 간척지를 만들고 소득증대를 한답시고 농약을 무차별 살포해서 모든 음식물에 농약을 발라 먹는 꼴이 되었다. 정의 복지 사회의 구호 아래 온갖 부정이 정의로움으로 둔갑되고 복지정책이 자연환경을 모두 망가뜨리고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골프장을 만들어서 푸른 사막을 만들어 환경을 파괴시키고 독극물을 수원지에 뿌리는 꼴이 되었다. 하기는 산업화 과정에서 어차피 한 번은 치러야 할 것이라고 본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런데 이런 환경 파괴 또는 환경오염은 결국 따져 보면 인간의 마음가운데 있는 죄악 때문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대개가 현상적인 문제를 가지고 제도적 잘잘못을 따진다. 예를 들면 환경청의 감독소홀이 문제라느니, 정부의 정책이 들쑥날쑥 이라느니 어떤 회사가 부당이득을 위해서 공해방지 시설을 외면했다는 말들이 고작이다. 그리고 이런 무소신의 정책과 악덕기업의 부도덕성은 따져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첫 사람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 결과로서 땅이 저주를 받았으며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냈다고 말씀하고 있다 (창3:17-18). 환경 오염과 환경파괴는 정치나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죄가 문제가 되고 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흔히 이런 문제를 말할 때 인간의 양심문제를 들고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양심이란 것도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이어야 하지, 인본주의적 시각에서 보는 양심은 진정한 양심일 수 없다. 유물주의 사상에 바탕을 깐 양심을 가지고는 환경 오염을 막을 길이 없다. 그러므로 환경오염 이전에 양심의 오염이 문제이고, 양심의 오염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죄의 결과 때문이다. 즉 인간이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환경 오염이 왔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이야 죽든 말든 나만 돈을 모으면 된다는 발상이 환경 오염을 낳고 그것은 바로 간접살인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칼빈주의자들의 시선은 이 세상의 물건이나 정치적 껍데기를 보려는 것이 아니고 만물의 현상 뒤에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려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의 양심은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앞에 서기를 소원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오늘의 문제와 오늘의 상황에 뒷짐지고 있기를 원치 않는다. 칼빈주의는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세워서 깨끗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 비로소 모든 피조물도 그의 위치를 바로 지킬 것을 믿는다. 환경오염이 인간을 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오염이 자연을 병들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의 시대도 옛날의 시대와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새로워질 때 자연도 새로워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물주의 중심의 세계관과 인본주의 세계관에서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으로 변화시키는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 본질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본다. 

환경오염은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 현대 문명이 쏟아낸 쓰레기 때문에 현대문명은 파괴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환경오염은 인간의 오염에서 나온 것임을 바로 알 때 근본적인 치료는 시작되리라고 본다. 인간의 오염은 결국 인간의 죄 때문이다.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환경오염도 사회의 오염도 정치의 오염도 해결해 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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