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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칼럼】프란시스 쉐퍼와 라브리정성구 고문(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프란시스 쉐파 박사

1972년 암스테르담 뿌라야대학교 기숙사시절, 나의 룸 메이트는 우간다에서 온 케파 셈판기 목사였다. 그는 아프리카의 지성인으로서 우간다 캄팔라대학의 교수였고, 캄팔라의 큰 교회의 목사였다. 그는 우리 대학교에서 미술사(History of Arts)에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후일에 그는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을 비판하다가 체포되기 전 미국으로 망명했고,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얻어 아민정권이 무너지자, 귀국해서 교육부장관을 역임했다. 

어느 날 케파는 내게 주말에는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당시 주말에 딱히 할 일도 없다고 했더니 자기와 더불어 라브리 펠로쉽(L’abri Fellowship)에 가자고 했다. 라브리란 불어로 피난처란 뜻이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마다 20세기 칼빈주의적 미술사의 거목이었던 한스 로끄마꺼(Hans Rookmaaker) 박사가 직접 운전하면서 우리를 우트레흐트 근방에 있는 시골 엑 엔 빌(Eck en Wil)의 화란의 라브리 펠로우쉽까지 갔었다. 운전 중에 로끄마꺼 박사는 나에게 라브리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했다. 당시 나는 금시초문이었다. 또 묻기를 프란시스 쉐퍼를 아느냐고 물었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유학가기 전 시골 농촌개척교회의 목사요, 군목으로 일했고 총신대 강사와 한국외국어대학교 전임대우 교수 경험뿐인 나로서 국제 정세에 어두웠고, 당시 총신의 분위기는 세계의 사상적인 동향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상태였다. 

거장 로끄마꺼 박사는 화란 라브리의 지도자였다. 로끄마꺼 박사는 화란 자유개혁파 교회 암스테르담 중앙교회 장로로서, 미술사 교수로서, 전 세계적으로 많은 강연을 하고 다녔다. 후일 그는 내 장학 위원회 위원이기도 했다. 회원들이 오후 3시쯤 라브리 공동체에 도착하면 그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거기에는 목사, 장로, 신학자, 철학자, 예술가, 직장인, 공무원 등 다양했고 연령대는 20대에서 60대까지였다. 로끄마꺼 박사는 벽난로 옆에 앉아, 당시의 교회, 국가,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예술분야의 모든 문제에 대해 성경적인 세계관을 줄기차게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그의 강의를 모두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는 칼빈주의적 미술사학자로서 일찍이 금세기 최고의 전도자요, 사상가인 프란시스 쉐퍼 박사와 함께 라브리 운동의 창시자였다. 즉 그는 인생과 세계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유일한 대안은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칼빈주의적 세계관을 제시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 구원의 내용이요 본질인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표준이 된다는 확고한 신념이었다. 라브리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에는 캐나다 유학생, 미국유학생도 많았다. 사실 나는 이 모임을 통해서 많은 개혁주의 학생들과 사귈 수 있었다. 저녁시간에는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교제하는 일도 참 즐거운 시간이었다. 

스위스라브리 앞 필자 정성구 본지 고문

그런데 어느 날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1912-1984)박사가 온다는 전갈이 왔었고, 엑 엔 빌의 라브리 회원들은 모두 들떠 있었다. 쉐퍼 박사는 미국 장로교회(P. C. USA)가 연합교회가 되고 자유주의로 돌아서자, 보수주의적 장로교회(P.C.A)를 세우는데 선두주자였고 세속화된 유럽교회를 살리려고 스위스 알프스 계곡 중턱에 헌 농장을 빌려서 라브리 공동체를 세웠다. 드디어 쉐퍼 박사가 동네 어귀에 들어서자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면서 “쉐퍼, 쉐퍼”하고 외쳤다. 흡사 오늘날 연예인들이 지나갈 때 환호하듯 말이다. 그는 장발에다 왜소하고 작은 키에 노타이에다 다리에는 각반을 차고 걸어오고 있었다. 나도 흥분했다. 그날 쉐퍼 박사는 그 지역 교회에서 메시지를 했다. 20세기, 미국에서 유럽에 파송한 첫 선교사, 위대한 개혁주의 사상가, 철학자, 연설가, 문필가, 문화 비평가인 그는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메시지에 놀랐다. 그리고 나는 프란시스 쉐퍼에게 반했다. 설교가 끝나고 일행 모두가 라브리 펠로쉽에 돌아오자, 나는 용감하게 그에게 다가 가서 면담을 요청했다. 나는 평생 이 위대한 금세기의 복음적 사상가와 독방에서 단 둘이서 마주 앉았다. 쉐퍼 박사는 나를 부등켜 안고 함께 세속화되어 가는 세계교회, 특히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자고 했다. 나는 프란시스 쉐퍼와 껴안고 기도한 체험이 지금까지 오래오래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 체온은 아직도 느끼는 듯하다. 

그 후로 1976년에 나는 한국으로 귀국했으나, 쉐퍼 박사와의 연결고리는 이어졌다. 그는 아직도 할 일 많은 세계교회를 걱정하면서 백혈병으로 고통을 당하면서 임종 때까지 나와 서신 교환을 계속했다. 그래서 그 후 나는 쉐퍼가 강의하던 스위스 라브리, 사위가 하던 런던 라브리도 방문했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프란시스 쉐퍼 박사와 뜨겁게 함께 기도하던 추억 때문에, 나 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목사도 이 시대를 향해서 무엇인가 할 말을 해야 한다는 충동을 갖는다. 금세기의 모든 지성인들과 젊은이들에게 갈 길을 제시했던 사상가, 대 설교가, 대 전도자 프란시스 쉐퍼 박사와의 45년전의 만남을 추억하면서…

 

정성구 고문  webmaster@bonh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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