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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시선】 우리의 설교, 누구를 모델로 삼고 있는가?【이대희 목사의 바이블시선】 - (12)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Th. M).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성경학박사과정(D.Litt)을 졸업했다. 예장총회교육자원부 연구원과 서울장신대 교수와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그동안 성경학교와 신학교, 목회자와 교회교육 세미나와 강의등을 해오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에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평생말씀학교인 <예즈덤성경대학>을 20년째 교수하고 있으며 극동방송에서 <알기쉬운 기독교이해><크리스천 가이드> < 크리스천 습관과 인간관계> < 재미있는 성경공부> <전도가 안된다구요>등 성경과 신앙생활 프로그램 담당했으며 다양한 직장 소그룹 성경공부 사역을 하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현장 사역 경험(소형.중형.대형교회,개척과 담임목회)과 연구를 토대로 300여권의 저서가 있으며 <이야기대화식 성경연구>와 <30분성경교재 시리즈>와 다양한 실천 프로그램을 제시한 저서( “유대인 밥상머리 자녀교육법” ( 2016년 세종도서 우수도서 ). “한국인을 위한 유대인공부법” (대만번역 출간), “유대인의 파르데스공부법“ 등 다수가 있다. 현재 꿈을주는교회 담임목사. 예즈덤성경교육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초대 교부 명설교자 크리소스톰(chrysostom)

필자가 신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설교학을 배울 때 설교자의 모델로 소개받은 인물이 초대교부인 크리소스톰(chrysostom, 347-407)이다. 그는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당대 뿐 아니라 지금까지 대부분의 설교자가 본받고 싶은 로망의 인물이다. 필자도 설교학 시간에 추천한 그의 설교책을 탐독하며 신학교 시절을 보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콘스타틴노플에서 크리소스톰 설교보다 더 능력 있고 재치 있는 설교를 들을수 없었다. 그가 전하는 설교는 사람을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고 사람들이 더 잘 들으려고 강단을 향해 몰려들기도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강단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설교자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설교를 듣고 싶게 하는 놀라운 흡입력을 생각하게 장면이다.

크리소스톰은 천부적인 말 재주가 있었는데 그런 그의 설교기술은 사실 거슬러 올라가면 주전 4세기에 탁월한 그리스의 소피스트였던 리바나우스( Libanius) 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리바니우스는 크리소스톰의 스승으로 그가 죽을 때 “만일 크리스천이 크리소스톰을 훔쳐가지 않았다면...” 할 정도로 그가 후계자로 지목한 사람이었다.

요한 크리소스톰 (John Chrysostom: 349~407)

그런 크리소스톰이 예수를 믿고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유창한 설교로 사람들을 몰입하게 하는 능력을 가졌다. 그가 얼마나 설교에 능했는지 회중들이 중간에 박수가 갈채가 나와 설교가 중단되기도 했다. 설교 중에는 박수를 치지 말라고 해도 청중들은 설교에 매료되어 박수가 멈추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이런 설교가가 여전히 인기가 있고 사람들은 그런 설교에 매료를 느끼며 몰려든다. 그러다 보니 설교자들도 그런 설교자의 흉내를 내고 싶어 한다.

설교의 능력은 자칫 그리스의 수사학의 위력을 닮을 수 있다. 이 부분을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도 이처럼 될 수 있다. 그들은 설교의 수사학적 재능을 발휘하였고 시와 노래와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연설의 달인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청중들을 감명시키는 것이 설교의 초점이었다. 물론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와 성령의 사용하시는 영역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속고 있는 부분을 감지 못하면 어느 날 우리도 크리소스톰의 후예인 유럽교회처럼 될 수 있다. 어쩌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그 뒤를 따라가고 있을 수 있다. 혹시 나도 그런 설교자를 로망으로 삼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나는 그런 설교를 꿈꾸며 그런 설교 효과를 기대하고 있지 않은지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누구의 설교를 모델로 삼고 있는가?

필자는 신학교에서 설교를 배울 때 대부분의 시간이 설교의 거성들을 닮아가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우리도 그들처럼 될 수 없을까? 지금도 성장하고 있는 성장한 대형 교회의 설교자를 롤 모델로 삼고 그들의 설교집을 연구하고 그것을 뒤따르는 방향으로 설교학을 공부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설교의 기술과 사람을 설득하는 방법을 체득하는데 관심이 더 있다. 성경적인 설교를 살펴보고 성경에 나오는 설교자들인 모세. 예언자. 스데반. 베드로. 바울의 설교를 살펴보고 그들을 연구하기 보다는 역사속의 명 설교자들의 그들의 설교집과 설교기술을 습득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필자 뿐 아니라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겪는 비슷한 갈등이요 고민이다,

성경에 나오는 설교자와 우리와 차이점은 무엇일까? 우리가 진정 원하는 설교자의 유형은 성경의 인물처럼 설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교회사에 나오는 인물이 설교의 모델로 삼고 있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인 클레멘트, 크리소스톰,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 청교도들의 후예인 스펄전와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드와 현대에 이른 마틴 로이드존스 등을 주로 꼽는다. 영성과 설교의 거성으로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배우고 닮고자 한다. 지금도 그런 설교의 인물과 설교집을 연구하여 그대로 따라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 설교학에서 그것을 주로 가르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찰스 스펄전 (Charles Haddon Spurgeon, 영국, 1834∼1892, 58세/ Autobiography of Charles H. Spurgeon compiled from his diary, letters and records by his wife and his private secretary (1899)

물론 한 시대를 이끄는 인물로서 우리에게 충분한 가치가 있고 그들의 삶을 배우는 것은 유익이 있다. 이들은 설교학에서 배우는 중심인물들이다. 어쩌면 이런 인물들이 설교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가진 영성과 설교의 방법들은 설교학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교과서가 되고 있다. 필자도 오랫동안 이들의 설교집을 통해서 배움을 얻었고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한 가지 그런 인물에 비해 성경의 인물은 너무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 지금의 설교학은 성경에 기초한 것 보다는 교회사의 인물에 비중을 주고 전개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설교 방법과 대부분 설교자들은 설교의 칼빈 설교 주석이나 스펄전과 로이드 존스 등의 인물의 설교집을 탐독하고 그것을 통해 설교를 배우는 경우가 많다.

 

원형 설교를 다시 배우자

지금쯤은 우리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설교를 어떻게 하는가?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설교를 배웠는가? 나의 설교자 모델은 누구인가? 하고 물으면 대부분 어떤 나에게 맞는 설교자를 모방하는 방법으로 설교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제 2의 로이드 존스와 스펄전과 같은 설교자를 꿈꾼다. 이것이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인물만큼만 되어도 대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한 것은 그전에 원자료인 성경본문을 연구하고 성경속의 설교자들을 공부했어야 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교의 설교학은 이런 부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설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인 성경텍스트에 대한 것은 없고 기술만 배우고 있다는 점이 설교학의 가장 큰 문제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 교회를 위기로 몰고 간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설교로 부흥하고 성장한 유럽교회들의 지금의 모습은 암울하다, 혹시 그것이 교회 부흥의 핵심과도 같은 설교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설교가 오히려 성경을 지루하게 만들고 중심에서 밀어 내는 역할을 하지 않았는지 생각 할 때가 되었다.

진정 설교를 배우고 싶다면 원자료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원자료 보다 2.3차 자료를 근거로 삼고 연구하는 것은 뿌리 없는 배움이기에 거기서는 응용이 어렵다. 이렇게 되면 복사 설교를 넘지 못한다. 루타와 칼빈, 스펄전과 웨슬리는 그 시대 속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도구다. 그런 이유로 당시에 헬레니즘 사고 속에 있는 그들에게 오히려 헬레니즘 설교방식이 통했다고 볼 수 있다. 유대교와 단절된 중세교회와 그 이후의 상황에서 헤브라이즘 방식은 낯설 수 있다. 어쩌면 당시는 그것이 시대적 한계에서 최선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설교 출발점이 되면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 성경의 정신을 찾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요 그것이 설교학이 나가야 할 개혁의 정신이다. 우리가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려면 그 사람을 본받기 이전에 성경이 말하는 바와 성경의 인물을 먼저 닮고자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교회사의 인물들이 설교의 거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을 배우려고 힘썼기 때문에 가능했다.

유럽과 미국의 개신교 예배의 한 모습

지금이라도 설교의 원 뿌리를 성경에서 찾는 수고를 더 늦기 전에 해야 한다. 설교의 샘터를 붙잡지 못하면 교회의 위기는 더 가속화 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그 원형 설교의 모습을 찾아가는 일이 필요하다. 능력 있는 설교를 했던 바울은 오히려 자신은 말에 능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한다(고전 11:1), 지금은 종교개혁을 넘어 교회 안에 주인행세를 하는 설교가 본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설교개혁이 시급한 때다, 더 우물쭈물하다가 개혁의 시기를 놓치면 우리도 영국교회처럼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에...

 

 

 

 

이대희 목사  smd6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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