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고
위대한 국부 리승만을 눈물로 추모하며그대는 아는가!
  • 김종근 목사
  • 승인 2019.12.01 09:19
  • 댓글 0
  • 조회수 708

위대한 국부 리승만을       

                    눈물로 추모하며.

 

지금부터 약 55여년 전인
1965년 7월 19일 
오전 0시 35분.

하와이의 한 노인 요양원에서
나이 아흔의 한국인 환자가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는 누구인가.
한세기 아니 20세기 강대 열국을 종횡으로 
이이제이하며 마침내 '대한민국호를 출범시킨 조국의 아버지 리승만'이다.

국부 리승만은 서거하시기 한 달 전부터 피를 토했다.
그가 숨을거두기 하루전인 7월 18일엔 너무 많은 피를 토하셨다.

그의 생애 마지막 임종을 지켜본이는, 평생동안 곁에서 돕고 수발하던 부인과,
대(代)라도 잇겠다며 들인 양자와,
교민 한 사람밖에 없었다.

마지막 호흡을 크게 한 번 들이 쉬더니, 
이내 하나님의 부르심에 눈을 감았다.
파란만장한 길을 함께 걸어오며, 어떤 어려움에도 우는 법이 없었던 프란치스코 여사가 끝내 오열을 했다.

세계대전 후 일제가, 이 강토에서 물러간 자리에, 이북엔, 소련공산당이 또아리를 틀고, 이남엔, 미군정에 의해서,
조국 광복의 기쁨도 가시기 전에,
마치 풍전등화처럼, 세계 세계 열강에 휩싸여, 하마터면 산화 되어버릴 백척간두 위기에서, 조국 '대한민국호'를 쏘아올린, 국부 리승만의 장례는, 이역만리 하와이 섬에서 이렇게 초라하게 치러졌다.

작가 이동욱씨는 
국부 리승만의 영결식의 한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다.
"한 미국인 친구가 울부짖었다.
내가 너를 알아! 
내가 너를 알아!
네가 얼마나 조국대한민국을 사랑하였는지를 알아!
그것 때문에 네가 
얼마나 수많은 고통을 격었는지!
잃어버린 조국,  빼았긴 국토을 되찾으려는 그 일념때문에, 네가 그토록 온갖 조소와 비난을 받으며,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 온 것을, 내가 알아."

그 미국인은 장의사였다.
그는 1920년, 미국에서 일하다 죽은 
중국인 노동자들의 유해를
중국으로 보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이라는 중년의
조선인이 찾아와, 중국인 유해를 안치할
그 관(棺)에 숨어, 상하이로 가겠다고 했다.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데, 일본이 자신을
현상수배 중이라고 했다.

그가 바로 조선인 이승만이다. 
이 이승만이 실제 관에 들어가, 
상하이 입국 밀항에 성공하였다.

"너의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얼마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또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아왔는지 나는 안다"는  피를 토하는듯한 절규!
이 절규는, 그냥 넉두리로 하는 푸념이 아니라, 가슴 깊은곳에서 나온, 통한의 절규였었다. 

2019년7월15일 아침, 
나는 서울 국립 현충원, 
이승만 초대 대통령 묘소를 찾았다.  
그의 서거 50주기 나흘을 앞둔 날이었다.

나 역시 이 대통령에 대해, 학교에서 정가에서, 부정적 얘기만 듣고 자랐다.
그의 생애 전체를 보고,
머리를 숙이게 된 것은,
내나이 중년, 쉰이 넘어서였다.

이 날 아침, 이 위대한 국부 리승만 묘 앞에서 나는, "만약 우리 건국 대통령이, 
미국과 국제정치의 변동을 미리 내다 보는 혜안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자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가 생전에 대한민국 건국필요성을, 
백범 김구선생님에게 갈파하면서, 
"백범은 영어를 모르기때문에 국제정치에 어두워"라고 
조크를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그였기에, 오로지 그만이 할수있는 '건국'이었기에, '대한민국의 탄생'이라는 
이 위대한 건국의 물음 앞에, 나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흐느껴 울고말았다.

그 없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그 없이, 우리가 자유민주 진영에 서고,
그 없이,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그 없이, 한·미 동맹의 대전략이 가능 했겠느냐?. 
이 물음에 그 뉘라서 "그렇지 않다"고 
반론할 수 있을까!.

추모비에 적힌 지주(地主) 철폐, 
교육 진흥, 제도 신설 등등
지금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모든 
근본 바탕이 그의 혜안에서 나왔다.

원자력발전조차 그에 의해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무지몽매한 나라에 태어났으나
그렇게 살기를 거부했다.
열아홉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외국인들의 눈을 통해 나라 밖 신세계를 처음으로 접하면서.
썩은 조정을 언론으로 개혁하려다 
사형선고까지 받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감옥에서 낮에는 심문을 당하고, 밤에는 이 나라 젊은이들의 
귀를 열어주기 위해 영어 사전을 만들었다.

젊은 리승만은 "우리가 독립하는 길은, 
미국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고 믿었기에,
1905년, 나이 서른에, 
조지워싱턴 대학에 입학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을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1년, 
미국에서 'JAPAN INSIDE OUT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을 펴냈다.
그 책에서 그는
"일본이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책이 나온 지 넉 달 뒤 
일본이 추측이 아닌 실제로 
진주만을 폭격했다.
미국 조야의 정치인들은, 
크게 놀란눈으로 한국인 리 승만을 
새롭게 보았다.

이 대통령은 1954년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을 이렇게 썼다.
"일본인은 옛 버릇대로 밖으로는 웃고,
내심으로는  악의를 품어서, 
교활한 외교로 세계를 속이는, 
그러면서도 조금도 후회하거나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뿐더러...
미국인들은 지금도 이를 알지 못하고, 
일인들의 아첨을 좋아하는 뇌물에 속아, 일본의 재 무장과 재 확장에 전력을 다 하고있는 데도...
심지어는 우리에게 일본과 
친선을 권고하고 있으니…."

이 대통령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우리는 미국이 어찌 하든지 간에,
우리 백성이 다 죽어 없어질 지 언정,
노예만은 되지 않겠다는 각오로, 합심하여 
국토를 지키면,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라 머릿말을 맺었다.

뱁새가 봉황의 높은뜻을 어찌 알리요 마는,
관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반일(反日)로 살아온 그를, 친일(親日)이라고 하고,

평생 용미(用美)한 그를 
친미(親美)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매도하는 것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는
"어지러운 구한말 모두 중·일·러만 쳐다 보고 있을 때,
청년 이승만은 수평선 너머의 미국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를 19세기 한국의 콜럼버스라고 부른다.
우리 수천년 역사에, 오늘의 이 번영은, 오로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 박사의 공로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민은, 이 위대한 지도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했다.

거인이 이룬 공(功)은 
외면하고 왜곡하며,
과(過)만 파헤치는 
일들이 지금도 계속되고있다.

건국 대통령의 50주기를 
쓸쓸히 보내며,
그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자해(自害)와 업(業)을 생각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리에서 미 하와이로 물러난 후, 한 겨울에 난방할 땔감도 없었다.
하와이에선  교포가 내 준 30평짜리 
낡은 집에서 궁핍하게 살았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친정에서 옷가지를  보내줄 때, 포장한 종이 박스를 옷장으로 썼다.

교포들이 조금씩 
보내준 돈으로 연명하며,
고국행 여비를 모은다고 5달러 이발비를 아꼈다.
늙은 부부는 손바닥만 한 식탁에 마주 앉아,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이 대통령이 우리 음식을 그리워하자
부인이 서툰 우리말로 
노래를 만들어 불러줬다고 한다.
이 대통령도 따라 불렀던 
그 노래를  이동욱 작가가 전한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개 김칫국/
날마다 날마다 콩나물 콩나물국/
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개 두부국/
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개 된장국.'

아무도 없이 적막한 그의 묘 앞에 서서
이 노래를 생각하니 목이 메인다.

작년이었던가?
춘천의 동료목사 두분과 동해안에 갔다가 
리승만 기념관을 들렀다.
그분의 유품 몇점을 보았는데도, 어릴때 뵈었던 그분의 모습이 아련히 떠올랐다.
눈으로 새겨보고 손으로 더듬어 보며 노대통령을 회상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렀었다.
후사도 없이 자신의 생애와 대한민국의 미래를 오로지 하나님께 의탁했을 그에게 무슨 사심이 있었으랴!

고려대, 총신대학원 졸업, 광운대 정보복지대학원 졸업, 서울 용산소망교회 경남 하동교회 부산 영도교회 시무. 현재, 행복이 가득한 교회(예장합동) 행복이 가득한 집(요양원) 시무

 

김종근 목사  webmaster@bonhd.net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종근 목사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