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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시리즈】 요셉의 생애 속에 감사이야기‘감사관점’으로 읽는 성경 이야기 ⑩

 

임승훈 목사 - 월간목회편집부장 역임, 한국성결신문 창간작업 및 편집부장역임, 서울신학대학교총동문회 출판팀장, 위대한맘 인천한부모센터 대표, 설교학 신학박사(Th,D), 더감사교회 담임

-창세기 37장을 중심으로

의식적으로 감사를 연습하는 사람들

감사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감사하지 않음(?)이 아니라 원망과 불평, 불만이라고 한다. 요셉은 야곱이 사랑하던 아내 라헬의 첫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어쩐지 요셉의 자존감은 대단히 충만하였다. 부정적인 것도 없고 거칠 것도 없었다. 무엇이든지 아버지가 배경이 되어준다는 생각에 요셉은 언제든지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늘 긍정적이었다. 낙천적이고 순진하였다. 그런데 세상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연구한 것을 말해보자. 긍정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 특히 “의식적으로 감사 연습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성공할 확률이 월등하다고 한다. 또한 실패해도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성공할 확률이 큰 것으로 알려진다. 심리학 전문가인 로버트 에먼스박사(미국)는 ‘의식적으로 감사를 연습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목표의식과 성취욕에서 앞서나간다’고 밝혔다. 그의 실험에 의하면 참여자들에게 ‘10주 동안 달성하고 싶은 여섯 가지’를 적어보게 했다. 그들 가운데 임의로 몇 명을 선택하여 ‘일주일에 한 번식 감사일기 과제’를 내주었다. 결과는 감사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각자의 목표달성에서 20% 이상 더 진전을 보이며 더 열심히 노력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에몬스 박사는 감사하는 사람들이 소극적으로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의욕을 느껴 행동을 취한다는 사실도 발견해 냈다.

 

요셉의 꿈과 형들의 미움

요셉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요셉이 형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형들에게 죽을 고비를 겪고, 결국엔 애급(이집트)으로 팔려갔을까? 사실은 죽이기로 의논하였으니 형들의 시기가 극에 달한 형편이었다. 하지만 유다의 논리적인 설득으로 요셉은 갑자기 사라지고 만다(창 37:25-28)

메시지 성경에 나오는 유다의 제의를 살펴보자.

“형제들아, 우리가 아우를 죽이고 그 흔적을 감춘다고 해서 얻는 게 무엇이냐? 그 아이를 죽이지 말고,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넘기자. 따지고 보면, 그 아이도 우리의 형제, 우리의 혈육이다.” 유다는 형제들에게 형제의식과 혈육의 정을 들어 호소했다. 형제들은 그의 말에 동의했다. 유다의 공(功)은 크다. 유다로 인해 요셉을 죽음에서 살려낸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유다로 인해 요셉이 없어졌고, 이스라엘(야곱)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내었다.

유다는 말을 잘하는 이스라엘의 아들이다. 유다는 스스로 요셉을 살려낸 의인처럼 자처할지 모르지만 그의 논리나 그의 명석한 지혜로 말할 것 같으면 충분히 요셉을 형제들의 간계로부터 살려내고도 남았을 능력이 있다. 하지만 그는 요셉을 멀리 팔아먹자는 말을 하고 만다. 손쉬운 선택이다. 이는 묘수였다. 형제들의 시기와 죽이고 싶은 맘을 모두 채우고도 남는 상수(上數)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야곱에게는 일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지웠지만, 그것은 또 이스라엘민족의 출애굽의 기원을 이루는 사건이 되었지 않는가?

이와 같은 사건의 발단은 야곱에게서 나타난다. 요셉을 어려서부터 다른 형제들과 구별되도록 특별한 사랑을 주며 키웠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야곱)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창 37:3). 맘으로만 사랑을 주었다면 모르겠으나 ‘채색옷’이라 표현된 왕족이나 귀족풍의 옷을 지어 입혔던 것이다. 우리 성경에는 채색옷(히, 케토넷 팟심)이라 해서 칼라풀한 옷을 지어 입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번역상의 문제가 있다. 이는 오히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소매 외투’를 가리킨다. 평범한 신분의 사람들이 입을 수 없는 옷이다. 팔이나 발목 끝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 거리는 왕궁이나 성내 귀족들의 옷이다. 이 옷을 입고는 노동을 할 수가 없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노년에 얻어 그를 더 사랑한 듯하지만, 베냐민도 있었는데 그의 이야기는 성경에 없다. 자신이 사랑하던 라헬이 낳은 맏이였기에, 아니 요셉에겐 왠지 이스라엘의 마음을 당기는 무엇이 있었다고 해야 옳다. 행동이나 언사, 품위 등 모두가 그의 형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음을 보고 있다.

이스라엘의 마음이 이러하니 다른 아들들이 모를 리가 없다.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창 37:4). 시기와 질투가 점점 더 커지는 모습을 말하고 있다. 더군다나 요셉은 다른 형제들과 아주 다른 면이 있다. 꿈 이야기다. 자주 꿈 이야기를 했는데, 이는 그의 형들로부터 더욱 미움을 받는 기제로 작동했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5절). 그 내용은 더욱 가관이다. 추수 때에 곡식 단을 묶어나가는 터에 자기의 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단은 자신의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더라는 것이다(7절). 형제들임에도 절을 받는 위치는 특별한 신분, 왕이라든지 총독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볼 때 형들의 해석은 정당하다. 요셉이 절을 받는다는 꿈 이야기에서 왕이 된다는 말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형들이나 부모가 들을 때는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형들이 말하기를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8절)라고 반문하였다. 이 꿈 사건을 계기로 요셉은 형들로부터 더욱 미움과 시기를 받게 되었다.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였던 것이다.

헌데 다시 한 번 요셉이 꿈 이야기를 하는데 이번엔 아주 노골적인 시기를 받을만한 이야기였다.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9절). 형들이 생각할 땐 기가 막한 이야기다. 요셉이가 철이 없어도 정말로 너무했다. 37장의 초반에 요셉의 나이가 17세의 소년임을 밝히고 있는 것을 볼 때 그가 십대 후반이면 눈치코치를 가지고도 남을 만한 나이가 아닌가. 그런데 철이 없어도 너무나 없다. 바보천치가 아니라면 너무나 순박한 사람일지... 요셉은 꿈에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가감 없이 풀어내고 말았다. 형들에게만이 아니라 부모 앞에서도 말을 하고 있다. 형제들과 달리 귀담아 듣고 있던 아버지마저 요셉을 꾸짖는다.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창 37:10). 이 일로 인해 형들은 점점 더 시기하고 미워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은 그 말을 간직하였다고 성경은 밝힌다(11절).

이 사건을 계기로 형들은 그를 멀리하고 시기하고 미워하였다. 요셉의 형들이 10명이나 된다. 10명은 1개 분대병력의 숫자에 해당한다. 10명 정도가 모이면 집단이 된다. 사람이 군집을 형성해 말을 섞기 시작하면 점점 과감해진다. 집단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죄의식을 거의 잃어버린다. 네가 한 것도 내가 한 것도 아니기에 책임감도 옅어진다. 때문에 집단으로 죄를 짓는 것은 법에서도 중형으로 다스린다. 패싸움을 하다가 살인죄가 저질러지면 폭력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한패일 땐 형을 물린다.

이런 원리에서 일까? 아버지의 심부름을 따라 헤브론에서 세겜에까지 달려가 형들의 양치는 모습을 눈에 담아 보고하고자 했던 요셉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지나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형들이 도단으로 가자며 떠났다는 것이다. 세겜에서 도단까지는 꽤나 먼 거리다. 한나절 가지고는 모자라 꼬박 하루가 걸리기도 하는 거리다. 형들의 눈에 요셉이 멀리 보이는 게 아닌가. 요셉을 본 즉시부터 형들은 그를 처치하자고 모의하였다. 꿈꾸는 자(?)가 온다는 것이다(19절).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논하기를 ‘큰 구덩이’에 던지고 죽여 버리자.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고 보고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더욱이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자신들이 보겠다.’는 것이다(20절).

 

마른 우물 속에서 올린 감사의 기도

이렇게 해서 순식간에 요셉은 형들의 손에 붙잡혔고, 모래 구덩이에 던져졌다. 유대 땅의 큰 우물구덩이, 물이 나오는 것은 아직도 사용하는 우물들이겠지만 마른 구덩이는 우물물이 나지 않는 구덩이다. 물이 나지 않는 구덩이가 어디 한 두 개란 말인가. 요셉은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겨를도 없이 만나자마자 입은 옷은 벗겨지고 구덩이에 던져졌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창 37;23,24)

형들의 억센 손아귀에 붙잡혀 구덩이에 던져졌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벌써 구덩이에 떨어져 잠시 기절했음직한 시간은 흐르고 정신을 차리니 엉덩이 한쪽이 쑤시고 벗겨져 피가 흐른다. 요셉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되 어찌해야 좋을지 이마의 식은땀을 쓸어 올리고는, 이제야 하늘을 보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 마른 구덩이에 던져진 것을 감사합니다.

물이 가득했다면 위험할 뻔 했는데 물구덩이가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갈증을 해소할만한 작은 샘은 남아 있으니 감사합니다.

채색 옷을 벗겨 던져진 것을 감사합니다.

채색 옷이 걱정됐으나 찢겨지지 않은 것도 감사합니다.

돌계단으로 둘려진 우물이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모래톱 우물인 것을 감사합니다.

계단 구조물이 없는 것을 감사합니다.

구덩이에 던져질 때 머리를 다치지 않아 감사합니다.

엉덩이 한쪽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지만 그만하니 감사합니다.

모래구덩이였기에 많이 다치지 않아 감사합니다.

까진 엉덩이가 너무 아파 눈물이 솟구치나 이제는 참을만하니 감사합니다.

머리가 바닥에 닿았다면 위험했을 텐데 생명이 붙어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하늘이 보이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웅덩이 밖으로 나가긴 틀렸지만 누군가 구원의 손길이 올 것을 기대하며 감사합니다.

 

애급에서도 감사생활을 한 요셉

요셉이 감사를 하여 나온 결과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유다의 논리적 주장(창 37:26,27)은 설득력을 얻었다. 요셉은 인신매매도 겸하는 장사꾼 이스마엘 사람들의 손에 들이끌려 향품, 유향, 몰약과 함께 애굽에 팔려나갔다. 구매인은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이다. 그의 집에서 형통한자가 돼 가정총무가 되었고, 친위대장의 유혹을 물리친 오해로 인해 감옥에 들었으나 간수장의 제반 사무를 처리하는 자로 여호와의 돌보심을 받아 범사에 형통한 자가 되었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은 젊은 요셉에게 치명적인 사건으로 비화될 뻔했다. 끊임없이 눈짓으로 추파를 보내면서, 그 여인은 젊디젊은 요셉을 가로채려 한다. 사건이 발각될 때 자신은 이혼당하는 것으로 끝날지 모르나 요셉은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요셉의 거절 이유는 금령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배반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금해야 할 법, 그것은 당신뿐(보디발의 아내)이라는 설명이다. 성적인 범죄, 이는 하나님께 받은 모세의 금령, 십계명 가운데서도 나타난다.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대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보디발의 아내는 날마다 요셉을 유혹하여 동침을 강요했으나 요셉은 완강히 거절하였다. 정말 집안에 아무도 없지 CCTV가 설치된 것도 아닌 시대에 비밀은 어느 정도 가능했을 법하다. 하지만 요셉은 이것을 이겨내었다. 성경 속에는 표현된 바 없으나, 저녁마다 자기 방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감사는 작다. 하지만 감사는 결코 작지 않다. 작은 내(川)가 모여 시냇물을 이루고 강을 이루어가는 이치처럼 큰 힘을 발휘한다.

 

감사경구 : “불행할 때 감사하면 불행이 끝나고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이 연장된다”(스펄전목사)

 

 

 

임승훈 목사  daniellim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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