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하는 존재가 되지 말고 기여하는 존재가 되라"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대표, 변화산기도원(춘천)협력원장, 서울신학대학신학박사, (재)본월드미션이사, (사)글로벌비전이사, 저서: 주기도문연구, 충성되일꾼되어가기, 제자세우기 40일 영적순례(1,2권), 십계명, 팔복, 사도신경 등.

현대 교회 문제 중에서 목회자와 관련된 것 중에 사례비에 대한 오해들이 많다. 교회 형편에 따라 차이가 있다. 너무 많이 받아서 사회적 지탄과 성도들에게 시험을 주기도 하고, 어떤 교회는 줄 재정이 없어서 자비량으로 목회하는 안타까운 목회자도 많다.

고린도전서 9장은 바울의 사도권과 목회자의 사례에 대한 바울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사도가 아니냐!”(1절).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밝히고 있다. 예수님이 선택한 12명의 제자들처럼 나도 사도라는 것이다.

사도의 자격 기준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눈으로 본 사람이다. 그런데 바울 자신도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열매” 가 기준이다. 사도로서 열매가 있느냐? 바울은 성도들에게 말한다. “주님 안에서 내가 일해서 얻은 열매가 너희가 아니냐”라고 반문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다하더라도, 적어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나를 사도로 인정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이다. 그런데, 바울의 헌신과 섬김으로 세워진 교회가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바울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답변(변명)”(2절)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사도라는 것이다. 사도이기에 나도 대접받을 권리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중에 하나가 권위를 무시하려는 못된 습관들이 독버섯처럼 번져가고 있다. 이것은 죄악의 본성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말세의 징조 중에 하나가 바로 “권위를 업신 여기는 것”이다(유다서 8절). 로마서 13:1 에는 모든 선한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했다. 선한 권위를 없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기본 입장이다.

가정, 국가, 교회, 사회에서 권위가 무시된다면, 그 공동체는 무질서하고 결국에는 파멸의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바울은 자신도 사도로서 권리가 있음을 주장한다. ①“먹고 마시는 권리”(4절)가 있다. 고기도 먹을 수 있고, 건강을 위해서는 포도주도 마실 수 있다. ②“결혼할 권리”(5절)가 있다. 나도 베드로처럼 결혼할 수 있다.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가 있다. 업신여기지 마라! ③“사례를 받을 권리”(6절)도 있다. 바울 일행은 장막 짓는 일을 하며 필요한 물질을 충당하면서 복음 사역을 감당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어디서든지 일해서 먹고 살 수 있는 기술을 한 가지씩 가르쳤다. 이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을 비판하는 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바울을 비방했다.

그러면 바울이 자신의 권리를 왜 포기했을까?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권리를 포기했다(12절). 복음 전파의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과감히 포기했다. 그런데 바울이 포기한 것을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비방거리로 삼았다. 이는 선한 의도를 무시하고 악한 것으로 둔갑시켜버리는 사단의 술책이다.

바울은 목회자가 사례비를 받을 권리에 대해서(고전9:7-11) 합당한 설명을 하고 있다. 먼저, 사람의 예를 들어 7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누가 자비량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열매를 먹는다고 해서 그를 흠잡을 사람이 있겠는가?” “누가 양떼를 치고 그 젖을 먹지 않겠느냐?” 일했으면 당연히 그 댓가를 얻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또한 율법의 예를 들어 사례받을 권리를 설명하고 있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전9:8,9;신 25:4)고 했다. 이 말은 소도 먹을 수 있도록 해서 일을 시키라는 말이다. 이는 소를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꾼들이 넉넉히 먹고 살 수 있도록 생활비를 보장해 주라는 말씀이다.

어떤 교회 담임목사는 자신은 배가 터지도록 많이 받고, 부교역자는 기본생활비도 주지 않고 아주 인색한 분들이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절도며, 강도요, 상식 이하의 무지한자들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불법자들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를 소보다도 못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연말되면 재정 당회를 하면서 장로님들이 모여서 목회자 사례비를 올려주는 것을 아주 인색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어떻게 하면 목회자 사례비를 동결시킬 것인가를 의논한다. 교회가 형편이 어려우면 당연히 동결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니면 그런 논의를 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밥 한끼 비싼 것 먹는 것은 아까워하지 않고, 목회자에게 주는 사례비는 아까워한다면 그것은 불한당과 같다.

바울은 목회자의 사례에 대해서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제단에서 일하는 자는 제단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13절). 율법시대에 십일조와 헌물은 제사장에게 주신 음식이었다. “성전에서 일하는 자는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는다”(13절). 남자 성인이 반세겔씩 내는 성전세는 바로 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종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입장이다. 신령한 복음(영적인 것)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성도들이 육신의 것으로 섬기는 것(물질)은 당연하다. 또한, 성도들은 육신의 것으로 섬겼다고 해서 + - 제로다 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영적인 것을 육적인 것으로 물물 교환 하듯이 생각하는 것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성도는 고용주이고, 목회자는 고용인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말씀을 배우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갈6:6)고 했다.

자신은 부요한데 목회자는 가난하고, 교회는 허덕이는데 자신은 부요하다면 이는 무엇인가 잘못 되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오직 목회자와 성도는 교회의 지체로 한 몸으로 불러주신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는 생명을 다해 양떼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고, 성도는 사역자를 육신의 것으로 잘 섬기는 것은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이다.

그러나 모든 목회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울 일행은 복음의 순수한 전파를 위해서 교회 앞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쓰지 않았다.

교회를 개척하고 오랜 세월 자비량으로 목회를 했다. 목회자로서 당당하게 사례비를 요구할 권리도 있었지만, 교회 성도들이 연약했기에 자비량으로 일하면서 교회를 섬겼다. 또한 교회 사례비를 포기할뿐아니라 운영비를 대납했던 모든 것을 제로로 탕감해주었다.

교회 헌금을 사례비로 먼저 쓸 수 있었다. 그러나 포기했다. 내가 먼저 사례비를 챙기고 나면, 임대료와 은행 이자를 누가 낼것인가? 얼마 못가 교회는 마이너스 재정으로 부도가 나는 것이 불을 보듯 훤했다. 그러면 누군가는 메꿔야 한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면 교회는 문을 닫게 된다. 나와 아내는 그 사실을 알기에 자비량으로 견디며 헌신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날 교회가 사라지지 않고 존속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 방식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모든 교회도 모든 사역자도 동일한 상황은 아니다. 다만 기준점에 있어서 나와 아내는 교회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가정보다 교회가 더 소중했기에 교회를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목회자들은 자신이 받을 권리를, 때로는 복음을 위해서 내려놓고 요구하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최소한 교회와 사례비 문제로 섬김을 받기 위해 갈등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그것은 덕스럽지 못하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바울처럼 자비량으로 목회를 하는 상황으로 내 몰렸다. 자의든 타이든 자비량으로 할 수 밖에 없다면 당당하게 일하면서 주님이 주신 교회를 섬기는 것은 축복이다. 하나님의 피값으로 산 교회를 위해 나의 전부를 드려 섬긴다는 것은 놀라운 기쁨이며 축복이다.

교회는 한 가정만이라도 온전한 헌신을 하면 견딜 수 있다. 목회자 가정이 한 마음으로 온전하게 교회를 섬겨야 한다.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이 한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섬길 때, 하나님이 그 가정에 부어주시는 기쁨은 충만할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유산인가? 성도 한 가정이 자신의 전부를 드려 교회를 섬겨보라! 그것처럼 아름다운 유산이 어디 있는가? "기생"하는 존재가 되지 말고 "기여"하는 존재가 되라.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