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스펄전, 기독자유당을 창설하다-

1976년에 나는 화란 유학에서 돌아와 총신대학교 조교수로 다시 임명되었다. 내가 가르치는 과목은 칼빈주의와 개혁주의 설교학이었다. 나는 무슨 학문을 하던지 역사적 고리를 연결시켜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래서 한국교회 100년역사에 한국인의 영혼에 가장귀한 메시지를 한 설교자가 누구인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목사님은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단짝 친구이자, 신성학교 교목을 거쳐 평양 창동교회를 목회하던 김화식 목사의 설교가 한국 교회사에 가장 위대한 대 설교임을 깨달았다. 역사가들을 그를 가리켜서 한국의 스펄전(C.H.Spurgeon)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물론 나는 그의 육성 설교를 들은 바는 없지만, 김화식 목사의 유작 설교 집과 1930-40년대 기독교 잡지 信仰生活에 기고한 그의 설교를 읽고 있노라면 과연 한국교회 역사가운데, 가장 탁월한 설교자임을 깨닫게 되었다. 

김화식 목사의 「신앙의 승리」란 설교집 추천서에, 1962년 통합 측 총회장이던 이기혁(李基赫)목사는 말하기를 「김화식 목사님은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 중에 가장 뛰어난 존재라고 추천한다. 그는 유명하신 길선주 목사님의 둘도 없는 우의를 맺고 계시던 김성찬 목사의 영식이다. 그의 형제들이 모두 천재적이지만 한국교회 역사에서 김화식목사님 보다 앞 선이는 없다고 평하고 싶다. 나뿐 아니라 일반의 평도 그러하다. 그의 설교는 영감이 심오하고 논리적이며 박학다식하면서 영감을 불어넣는 설교」라고 했다. 그의 설교를 읽어보면 독자로 하여금 잔잔한 시냇가와 푸른 초장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의 설교는 정확한 발음으로 처음에는 가장 세미한 음성으로 논리적으로 전개하다가 클라이막스에 이르면 천둥과 번개가 치는 듯한 웅장한 음성으로, 청중의 심령을 녹여 내는 천부적 설교자라고 한다. 김화식목사의 설교 스타일을 배운 분은 배은희목사와 한경직목사라고 한다. 

김화식목사는 성경의 박사이자, 동서고금의 사상을 꿰뚫은 예지가 번득이는 설교자였다. 그가 그러한 한국의 스펄전이라고 불리 울 만큼 대설교가가 된 것은 아무래도 평양신학교 2회 졸업생인 그의 선친 김찬성목사와 그의 아우 김성여목사, 친구 주기철목사, 김유택목사 등의 위대한 동역자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별히 그의 설교와 삶은 애국애족과 나라사랑의 일편단심이었다. 김화식 목사는 1919년 3.1운동에 아버지와 함께 참가해서 일경에 체포된 후 2년 6개월 동안에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감옥은 감화식의 영혼까지 가둘 수 없었다. 그는 감옥에서 오히려 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예수께로 인도했다. 그 감옥에서 김화식 목사의 전도를 받은 분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분은, 후일 장로교회 총회장이 된 안동교회 이원영 목사이다. 김화식 목사는 평양 숭실학교를 거쳐 1927년 평양신학을 22회로 졸업하고 안주 동부교회, 용천 양시교회, 장리욱 박사의 초청으로 신성학교 교목, 평양 창동교회, 산정현교회 등에 목회하면서 고난 받는 민족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소망의 메시지를 주었다. 그의 설교는 율법주의적 설교가 아니라, 해박한 성경 해설과 지성적이고 비유적이고, 대중에게 가장 매력적인 은총의 설교자였다. 더구나 그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도입부문에 들어가면 동서고금, 현대와 과거를 넘나드는 예화를 들어서 청중들이 자연스레 설교에 빨려 들어오도록 한다. 흔히 주기철 목사님의 <일사각오>는 군사를 지휘하는 전투사령관다운 설교라면, 김화식 목사님의 설교는 푸른 초장에 풀내음 나고 시냇물 소리가 들리는 목장에서 양을 치는 목자다운 설교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 미국의 원폭투하로 일본이 항복하자, 한국은 드디어 해방을 맞는다. 한반도는 자유의 천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싸워서 얻은 해방이 아니었기에 3•8선이 그어지고, 북한은 소련이 가짜 김일성인 김성주를 앞세워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었다. 공산당은 주일에 선거투표를 하도록 하고, 교회당을 투표장소로 만들었다. 가짜 김일성이는 이 나라를 공산혁명의 기지로 착착 진행했다. 그 때 김화식 목사는 이 땅에 공산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원리와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기독교신앙을 중심한 자유국가 건설이 시급했다. 그는 1945년 11월에 정당을 만들고 <기독자유당>을 세우려고 준비했다. 그 즈음에 감리교는 <기독 민주당>을, 그리고 신의주의 한경직 목사는 <기독사회당>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이 땅이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의 사상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데는 공감했다. 그러다가 김화식은 1947년 9월에 U.N에 한국문제 상정을 앞두고 남쪽의 이승만 박사와 내통하면서 김관주, 황봉찬, 우경천 등과 더불어 <기독자유당>을 세워 고한규 장로를 당수로 세우고 창당대회를 하루 앞 두었다. 그러나 기독자유당은 1947년 11월 18일 공산당이 심어놓은 첩자의 신고로, 하루 전 날 내무서원이 들이닥쳐 40여명이 체포됐다. 김화식 목사 일행은 그 후 공산당에 의해 13년의 언도를 받고 탄광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총살형으로 장렬히 순교했다. 

오른쪽이 정성구 박사

위대한 한국의 스펄전, 진정한 애국자, 자유민주주의 수호자, 한국 기독교 정치의 원조 김화식 목사는 그렇게 갔다. 그의 아들은 그 유명한 우리 가곡의 거장 작곡가 김동진 선생이다. 김동진 선생은 내가 그의 선친 <김화식 목사의 생애와 삶과 설교>란 글을 내 책 <한국교회 설교사>에 기록한 것이 너무너무 고마워서 어느 날 친히 나를 찾아와서, “정박사님! 한국에 아무도 선친에 대한 것을 말하지 않는데, 정박사님이 선친에 대한 글을 써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평생 작곡만하고 살았으니 시를 한 수 써주시면 작곡을 꼭 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했다. 당시 그도 이미 나이 늙어 베토벤처럼 귀가 들리지 않았지만 내가 쓴 <요나처럼 순종 않고>란 노래 말을 손수 작곡해 주었다. 아마 김동진 선생이 내게 써 주신 곡이 그의 마지막 곡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스펄전, 우리 민족에게 자유와 민주, 평화를 말씀으로 깨우치려던 대설교가, 철저한 반공주의자, 이 땅에 기독교 정당의 원조! 김화식 목사가 그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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