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36) 정의(righteousness)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이 땅에 정의가 도래하고 악과 사악을 타파하여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억누르지 못하게 하고...” 함무라비 법전의 유명한 문구다. 아카드어로 정의는 ‘미샤룸(misharum)’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규격’이다. 자신이 정한 원칙이 ‘정의’다. 함무라비 법전은 기원전 18세기 바빌론이라는 도시에 인간다운 삶을 위한 ‘정의’를 제정해 새겨 놨지만, 그것은 왕족과 귀족만을 위한 노리개였다. 바빌론의 소작농, 외국인,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노예들의 삶에 함무라비 법전은 정의의 상징이 아니라 불의와 착취의 수단이었다.

법원의 상징물인 ‘정의의 여신상’은 저울과 칼을 쥐고 있다. 두 눈은 안대로 가리고 있다. 저울은 공평, 칼은 정의, 안대는 공정을 상징한다. 불의에 굴하지 않고 어느 쪽도 편들지 않으면서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의미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은 DIKE다. 디케는 정의 혹은 정도라는 의미다. 로마시대에는 Justitia로 대체됐다. 고대 그리스에선 강력한 법 집행을 위해 칼만 든 형상이 주류였다. 로마 시대에는 ‘법 앞에 평등하다’는 형평성이 추가돼 한 손에 칼, 다른 한 손엔 저울을 들기 시작했다. 15세기 이후 유스티치아 여신은 눈을 가리기 시작했다. 한결같이 이 여신은 스스로 눈을 감고 한 손에는 저울을, 또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저울을 들고 있는 것은 죄의 무게를 달기 위함이고 칼을 들고 있는 것은 죄지은 사람을 벌주기 위함이다. 정의를 뜻하는 영어 justice는 여기서 유래했다. 전자는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고, 후자는 여기에 형평을 지킨다는 의미로 저울이 더해졌다.

플라톤은 정의란 세속적 관심사가 아니라 궁극적 관심사라고 봤다. 정의 개념이 보편적으로 적용된 것은 고대 로마시대다. 키케로는 “정의는 타고나는 것”이라며 정의는 인간 사이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같은 정의 개념은 신 앞에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그리스도교 사상의 전파와 함께 확산됐다. Greco-Roman 전통에서 유래한 그 개념은 어떤 이상적이거나 절대적인 윤리적 규범으로서의 정의에 관한 것이다. 이는 특별한 주장이나 의무들과는 반대되어 측정되어질 수 없다.

영어 단어 righteousness는 어떤 추상적인 성질을 지칭하지만 LXX에서는 ‘의를 세우기(establishing right)’라는 동적인 의미를 포함한다. 시편과 이사야에서 하나님의 의가 그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개입을 가리킨다. 고대의 정의는 ‘상호성(reciprocity)’이다. 준만큼 받는다는 원리다. 보복으로서의 정의 혹은 상호성 개념은 중근동지역을 중심으로 고대 사회에 널리 퍼졌으며 이후로도 강한 생명력을 발휘하는 개념이다. 상호성을 배격한 것은 그리스 철학이다.

 

1. 하나님의 의

로마서의 중심 모티브가 ‘하나님의 의’다. 하나님의 의는 ‘의를 세우시는’, 즉 구원하고 신원하시는 하나님의 활동과 그 활동으로 의롭게 되는 사람들의 신분을 다같이 포함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는 관계적인 의미를 갖는다.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 안에 나타난다. 하나님이 ‘이 예수를...화목제물로 세우셨을’ 때, 그 분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기 위해 그리고 그 분이 스스로 의로우시며,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시기’ 위해(3:26 이하) 그렇게 하신 것이다. 로마서 전체에 걸쳐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과 행동을 변호하려 애쓴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두에서, 구원에서든(3:25) 심판에서든(2:5) 그 분의 의로우심이 일관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여기서 전개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의에 관한 개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설명하는 방식을 취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원래는 경전(經典)이나 역사서의 옳은 뜻풀이를 뜻했다. 그러나 현재 사회에서 인식하는 정의는 올바른 일이 실현된 상태를 뜻한다. 그래서 공자는 ‘논어’ ‘위정(爲政)’편에서 “의(義)를 보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라고까지 의의 실천을 권했다. 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때로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 ‘의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활동은 죄인을 무죄로 풀어주시는 순전히 법정적인 활동이지, 의의 ‘주입’이라는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의롭게 하시는 활동’이 아니다.

루터는 바울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가 알고자 하는 갈급한 마음에 밤낮없이 그 구절에 매달렸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의가 복음 및 믿음과 갖는 연관성을 깨닫게 되었다. 의인은 믿음으로 의롭게 하며 하나님의 의는 바로 복음을 통해 나타난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총에 의해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롭게 됨으로써 구원을 얻으며,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인다.

율법의 행위에 초점을 전형적인 유대적 경향과 달리, 바울은 의는 하나님에 의해 수여되고 오로지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정의한다. 복음이 전파되고 사람이 믿음으로써 그 메시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다. 그 순간에 하나님은 죄인을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로 이끌어 들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주 쓰는 정의는 서로 대비되는 정(正)과 의(義)가 결합한 어휘이다. 정(正)은 정(征: 정벌하다)의 ‘원래글자’로 성을 정벌하러 가는 모습을 그려 ‘정벌하다’가 원래 뜻인데 ‘정벌’과 같은 전쟁은 정의로운 것이어야 함에서 ‘옳다’는 뜻이 나왔다. 이에 비해 의(義)는 양(羊)과 아(我)로 구성됐는데 아(我)가 의장용 창(혹은 도끼)을 상징해 정의로운 양의 장식이 달린 실제로는 사용하지 못하는 의장용 ‘창’을 말한다. 그래서 정(正)이 외부의 적을 정벌하는 것이라면 의(義)는 내 속에 있는 불의를 처단하는 것이며, 혹은 공동체 내부의 불의를 바로잡는 것을 말한다.

 

2.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다

구약성경에서 ‘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가리키며 또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묘사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개입하시는 ‘마지막 때’를 특징적으로 묘사할 때, 이사야 같은 선지자들은 그 때를 하나님 자신의 ‘의’를 드러내시는 때라고 묘사한다. 이사야 46:13에 ‘나의 구원’과 ‘나의 공의’가 병행을 이룬다. 시편과 이사야 40-66장에 나오는 대구법에서 종종 그 분의 구원과 그 분의 공의가 결합되어 있다. 하나님의 의가 그의 구원하시는 행위와 동등한 역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그가 그의 백성들에게 가져오기로 약속한 구원과 동등하다. 제우스는 스스로 정의를 구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한 위협과 형벌을 동원하는 신이다. 아이스킬로스는 ‘자신에게만 정의로운 신’인 제우스를 신봉하지 않는다. 제우스에게 치명적으로 부족한 한 가지는 ‘공감’이다. 제우스는 정신적으로 로마인들과 유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분리된 외로운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즉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을 벌하시기 위해 스스로 지우셨던 의무, 아버지 노릇하시고자 하는 의무를 성취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또는 언약에 실실하심으로서 의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의에 해당하는 ‘δικαιοσύνη θεού’(디카이오쉬네 데우)는 바울서신에서 로마서 8회, 고린도후서 1회(5:21) 사용하고 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처음으로 인용하는 하박국 2:4은 히브리어 본문에서 벗어난다. 히브리어 본문은 ‘나의 신실함’, 즉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해 말하며 의인은 이로 인해 산다. 그러나 바울은 신실함이 아닌 믿음으로 의미를 바꾼다.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라고 읽고 하나님이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의로운 지위라고 또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두 가지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의’나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의’라는 뜻일 수 있다. ‘의’가 하나님께 속한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의미한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종말론적 구원을 특징지으리라고 말하는 것은 이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의다. 즉 하나님의 구원하고 신원하시는 개입이다.

‘정의(正義)가 중요하다’는 말은 2400여 년 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도 자주 했던 말이다. 정의에 대한 이들의 생각과 철학은 ‘국가’라는 고전에 잘 나와 있다. 구약과 바울의 글 모두에서,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은 하나님 편에서 주시는 행위와 우리 편에서 그것을 받는 사람의 지위 모두를 포괄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의 정당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바른 도덕적 성품을 가리킨다. 아시리아(Assyria)의 군주들이 말하는 정의와 다르다. 그들은 자신이 수행한 주요한 전투를 얕은 부조(浮彫)로 새겨 궁전의 벽에 파노라마처럼 걸어두었다. 아시리아 황제들은 한결 같이 자신을 ‘정의의 왕’이라고 표현했다. 그 모든 잔혹행위의 결과로 백성에게 정의와 안식, 풍요로운 삶을 주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면서 의롭게 된 사람들, 즉 의인의 신분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속성과 하나님이 주시는 의의 선물을 포함한다. 자신의 것을 회복시키시고 그 언약 내에서 자기 백성들을 부양시키는 하나님의 행위로서 하나님의 의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가 이제 나타났다. 아브라함에게 처음 주어졌던 전 세계의 복의 약속들이 이제 하나의 현실이 되고 있다. 하나님이 그의 의를 나타내실 것으로 이사야가 예언했던 새 출애굽이 도달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을 수 있으며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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