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은혜를 기다려라!(벧전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1:13).

 

말세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정신줄을 놓아서는 안된다. 마음을 견고하게 하고 정신을 가다듬고 말씀에 기초하여 살아야 한다. 정신줄을 놓고 세상의 가치가 전부인줄 알고 살다보면, 원수마귀 사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이 말씀을 다른 성경에서는 “은혜를 끝까지 기다려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다시 마지막으로 오실 때, 너희들에게 주실 은혜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은혜를 끝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 은혜가 무엇인가? 바로 영혼의 구원 완성이다.

우리가 지금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완성된 구원은 아니다. 주님이 마지막 때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켜주신다. 하나님의 은혜를 끝까지 사모하며 기다려야 한다.

신앙생활은 주님의 은혜를 날마다 사모하며 기다리는 소망의 시간이다. 주님이 나에게 주실 구원의 은혜를 사모하며 끝까지 바라보는 것은 축복이다. 구원의 방주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끝까지 주님의 은혜를 기다리며 사모해야 한다.

바울의 제자 중에 중도에 은혜의 길을 포기한 제자도 있다.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는 “양심을 버렸고 믿음에서 파산”(딤전1:19,20)한 인물이다. 파산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경제적인 용어로 파산했다는 말은 “개인이나 기업이 재산을 모두 날려버리고 망한 상태”를 파산이라고 한다. 비슷한 용어로는 ‘부도’, ‘망함’이다.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는 양심을 버렸기에 믿음에 파산한 제자였다.

경제적 파산을 할 수 도 있다. 경제적 파산은 물질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믿음에 파산을 하면 영혼이 지옥에 간다. 믿음의 파산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이다. 바울이 이들을 사탄에게 내주었다고 한다. 이들은 신성을 모독하기 때문이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한다. 믿음에 관하여 파산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사도 바울의 제자 중,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다(딤후4:10). 바울의 제자 중에 구리세공업자 알렉산더는 바울을 떠났고 많은 해를 끼쳤을 뿐만아니라 바울을 대적했다(딤후4:14-16).

과거에 교회를 다니며 믿음 생활을 잘하다가, 은혜의 길을 포기한 분들이 많아지고 있다. 가나안 성도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어떤 통계를 보면 약 250만명 정도 된다고 한다.

가나안 성도들에게 왜 신앙생활을 포기했는가? 물으면 대개 비슷한 말을 한다. 예수님이 싫은 것이 아니라 교회가 싫다는 것이다. 교회의 수직적 의사 결정이 비민주적이다. 목회자와 중직자로부터 상처를 받았다. 헌금이 부담스럽다. 편하게 신앙생활하고 싶다. 거리가 멀다. 환경이 현대적이지 않다. 목사님의 설교가 귀에 들리지 않는다. 나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수준이 안맞는다. 등 핑계가 참으로 많다.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희생과 헌신과 수고를 했는지를 말해보라고 하면, 대답하기가 궁색한 분들이 많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비판을 시작하면 어찌 그리 누에고치에서 실 나오듯이 쏟아내는지 그들의 언어에 감탄할 뿐이다.

어항이 없이는 물고가 어항안에서 살 수 가 없다. 조금 지나면 죽는다. 어항이 있어야 어항 안에 물을 넣고 물고기가 살 수 있다. 교회는 어항과 같다. 때로는 어항으로 인해서 답답할 수 도 있다. 왜냐하면 건물 교회가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규칙이 없으면 어떤 조직도 쉽게 병들고 질서가 무너지게 된다.

신앙생활이란 곧 교회생활이다. 교회생활이란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규칙을 지키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규칙을 무시한다는 것은 교회론을 무시하는 것이다. 교회론을 무시하고서는 바른 신앙을 지켜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교회를 사랑한다면, 그 성도는 분명히 신앙도, 믿음도 삶도 질서가 있다. 교회의 규칙을 잘 지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오류동성결교회 목사님과 장로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아주 젊은 분이 장로라고 한다. 47살에 장로가 되었다. 이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직업을 물어보았더니, 삼성에 다니다가 조기 퇴직하고, 마트를 운영하다가 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외국계 보험회사에 들어가서 지금은 세계적인 보험 리더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 가지고는 중대형교회에서 40대가 장로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장로로 피택이 되면 사무총회에서 2/3 득표를 해야 한다. 당당하게 성도들로부터 지지를 받아 시무장로가 되었다. 이것은 성도들로부터 신앙과 삶을 인정받았다는 증거이다.

초등학교 3학년에 오류동교회에 다녔고, 오류동교회에서 함께 자란 자매와 결혼했다. 한 교회에서 평생 신앙생활을 한 것이다.

그런데 다른 분들과는 차별화된 열정적인 신앙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선출된 것이다. 바로 가훈이다. 장로님의 가훈이 “교회부흥”이다. 오직 교회부흥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보니 늘 은혜가 충만하고, 성도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젊은 나이에 중대형교회에서 장로님이 되신 것이다.

신앙생활은 성공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를 떠나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신앙생활은 곧 교회생활이다. 교회생활은 규칙을 질서를 잘 지키는 것이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대표, 춘천변화산기도원협력원장,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재)본월드미션이사 등. 저서: 주기도문연구 등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을 한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시92:12-15).

의인은 번성하며 성장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기 때문이다. 의인이 번성하는 길은 여호와의 집에 단단히 심겨 졌기 때문이다. 적당히 심기면 환란과 핍박과 시험앞에서 넘어진다. 적당히 심기면 마귀의 먹이감이 된다. 적당히 심기면 말라죽어버린다. 무엇보다 적당히 심겨지면 결실하지 못한다. 여호와의 집에 든든하게 심겨야 잘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 의인은 반드시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한다. 그러면 늙어도 결실하며 존경받는다.

교회무용론은 잘못된 신학이다. 교회는 존귀한 공동체이다. 교회를 소중하게 여기라. 그러면 신앙이 성장한다. 늘 은혜가운데 뿌리를 내리게 된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면 안 된다. 이것도 은혜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시작했으면 어떤 상황앞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마라.

구약에 보면 롯의 아내가 나온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땅이 죄악으로 물들어서 유황불로 심판을 결정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심판의 땅에서 롯의 가족을 구원하셨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산속으로 뛰어 들어가라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됐는가?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집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물질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자기가 살던 성적으로 완전히 타락한 도시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뒤 돌아보는 순간 롯의 아내는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다.

반대로 사도바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일평생 은혜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들이 따라야할 모범적인 모델이다. 사도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후 그는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오직 주님만 사랑하며 십자가를 자랑하며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다. 바울사도는 다메섹의 경험을 늘 간증했고, 마음에 간직했다(고전15:3-11).

사도바울은 인생의 경주가 끝나가는 시간에 이렇게 고백을 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부르는 시각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알았다.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기를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라고 한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는 고백이 축복이다.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라.

교회에 왜 다닙니까?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가장 중요한 본질은 바로 천국가기 위해서이다. 영혼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이땅에서 건강하게 사는 것은 부수적인 은혜이다. 우리가 이땅에서 성공하는 것도 부수적인 은혜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평안하게 사는 것도 부수적인 은혜이다. 가장 본질적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받아 천국백성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으면, 나머지 다 부수적으로 주시는 선물이다.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 그분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영혼이 구원받는다. 이것이 가장 큰 은혜이며 선물이다.

전도란 무엇인가? 당신이 교회 와서, 예수님 만나면 잘되고, 복을 받습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수적인 선물이다. 본질적은 복은 당신의 영혼이 구원받아 지옥가지 않고 천국간다는 사실이다. 전도란 죄와 허물로 멸망받을 인생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는 것이다.

전도와 선교를 놓치면, 교회의 존재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전도와 선교를 꽉 붙들어야 한다.

구원이 완성되는 날까지 마음을 견고하게 같고, 은혜를 놓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땅에서 복음전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일차적인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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