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37) 판단(judgement)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다른 사람이 자신을 평가할 때 외부로 드러난 자신의 공개적인 행동 그 자체보다 자신의 생각이나 의도를 더 많이 고려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는 그들의 공개적인 행동이 곧 그들의 내면을 상징한다고 보고, 바로 그 행동에 의해 그들을 평가한다. 그 사람의 언행이 바로 그 사람의 생각과 믿음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이 하는 행동과 타인이 하는 행동에 대한 잣대가 다른 거다. 바로 ‘관찰자·행위자 편향(actor-observer bias)’이다. 내가 행위자일 때와 관찰자일 때가 일관적이지 않은 인간의 이기적인 편향이다. 자신이 한 행동의 이유는 주로 외부 환경에서 찾고, 다른 사람 행동은 내면에서 이유를 찾는다는 것이다. 내가 횡단보도에서 빨간불에 건널 땐 "다니는 차도 없고 남에게 위험하지도 않아서"라고 한다. 그러나 남이 하면 "준법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식이다. 자신이 행동할 때는 관대하지만, 관찰할 때는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는 이론이다.

유대인들은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진리를 막은 죄책이 있기 때문에 핑계할 것이 없다. 이방인들처럼(1:20) 유대인들도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것이 없으므로’, 결국에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전후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흔히 ‘뭔가 그 사람 본인에게 문제가 있겠지’라고 생각한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행위자-관찰자 편향’(actor-observer bias)과 관련된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주로 상황 탓을 하는 반면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 사람 탓을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모방하도록 요구된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심판자이시듯, 사람들도 바르게 판단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항상 ‘궁극적으로 판단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신 1:17)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1. 판단(判斷)

판단하다고 할 때, 관심사는 어떤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 아니고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이다(창 16:5). 이사야 2:4에서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는 이러한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 다스리는 일과 심판하는 일은 분리되지 않는다(삼상 8:20; 삼하 15:4). 판단이라는 주제가 로마서 2:1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3절에서 반복되고 있다. 그리하여 ‘너’로 암시되는 유대인의 모순성과 자기기만이 강조된다. 유대인이 결국 이방인들을 정죄했던 바로 그 일들을 행하는 것에 처했기 때문에 유대인은 모순되는 것이다.

바울은 2:1-3에서 일곱 번씩이나 판단에 해당하는 ‘κριμα’(크리마)를 사용하고 있다. 기본적인 의미는 ‘구별 또는 분리하다’, ‘거르다, 가려내다’이다. 헬라 문헌에서 인간의 가치 판단과 연관된 독자적인 의미 영역을 획득했다. 크리마는 ‘판단’ 또는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여, 비호의적인 의미에서 ‘사법적인 평결’ 그리고 ‘정죄’이다. 동사 ‘κρίνω’(크리노)는 평가의 측면이 중요시됨으로써, 그 결과 ‘심판을 선언하다’, ‘결정하다’, ‘결심하다’를 의미한다. 신약적인 의미는 대개 공적인 의미든, 개인적인 의미에서든 자기가 주체로서 하나님 또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판단하는 것이다. 사람이 판단을 하더라도, 그들의 판단은 하나님에 의해 판단을 받는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죄를 받을 그때 우리에게 상고할 상고법정이 없다.

심리학자들은 내로남불 현상에 대해 잘잘못을 떠나 지극히 인간적 본능이 발현된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문제가 생겼을 때 자아 붕괴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방어한다는 것이다. 요즘 ‘내로남불’이란 말이 신문의 기사·논평 할 것 없이 널리 인용되고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뜻으로 쓰인다. 사자성어가 아니다. 그냥 시쳇말의 줄임에 불과하다. 굳이 사자성어가 필요하다면 ‘아시여비(我是汝非)’란 말도 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틀리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덕무가 속담을 모아 놓은 ‘열상방언’ 등 옛 문헌에서 ‘정저흑 부저갹(鼎底黑 釜底噱)’이란 말이 나온다. “솥 밑 그을음이 가마 밑 보고 껄껄댄다”는 말로 자기 잘못은 모르고 남을 책망하는 데 밝다는 의미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로 판단하는 직무를 위임받고 있다(고전 5:12; 6:2). 인간관계는 심지어는 원수에게까지도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그 사랑에 의해 규정되어야 마땅하며, 하나님의 완전한 의로움의 기준에 의해 측량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러한 의로움을 간직한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런 인간의 이상한 약점, 즉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비판적인 성향을 폭로한다. 자신에 대해서 관대한 만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데는 가혹하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흥분해서 자기 의에 가득 찬 분노를 발하지만, 자기 자신이 그와 똑같은 행동을 할 때는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바울은 누구든지 남을 판단하고 싶은 사람은 그 비난의 대상 속에 자기도 포함될 것을 각오하라고 말한다. 유대인을 포함하여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핑계치 못할 사람이 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며 어느 누구도 면제 될 수 없다(롬 1-3장).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남을 판단할 권리를 가진 자는 결코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자신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보지 못하고, 원수를 용서할 줄도, 그들을 위해 기도할 줄도 모르는 오만하고 자비스럽지 못한 자들에게 무서운 경고를 하고 있다.

 

2.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사람은 살아가면서 서로 평가하고 평가 받으며 산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판단과 평가 때문에 스스로의 삶을 제한시키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판단과 분별력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리학 용어 중에 ‘블링크(blink)’가 있다. ‘2초 안에 일어나는 순간 판단(判斷)’을 일컫는데, 직관이나 통찰의 능력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순간 판단이 틀릴 때가 있다. 편견과 차별이 눈앞을 가릴 때이다. 이것을 ‘워런 하딩의 오류’라 한다.

신약성경의 교훈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형제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 7:1). 바울은 말하기를, 신령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는다고 했다(고전 2:15).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판단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고, 바울의 의도는 영적인 사람은 그의 영적인 일들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이다. 판단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상을 바래서, 또는 겁이 나서 행했을 뿐인 우리 행동의 거짓됨을 드러내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사랑의 힘과 그 기반 위에서 참된 사랑을 하도록 요청한다.

‘아이러니(irony)’라는 말이 흔히 쓰인다. 예상됐던 것과 영 딴판인 결과가 나올 때 쓰는 표현이다. 성경의 아이러니는 무엇인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는데 가장 많이 훔쳐가는 책이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뛰어내려 살아남은 첫 기록을 세운 사람이 결국엔 오렌지 껍질에 미끄러져 사망했다. 유대인들의 아이러니는 무엇인가. 이방인의 범죄를 판단하는 유대인은 단지 그들이 이방인을 판단하기 때문에 정죄를 받는 게 아니다. 그들이 판단하는 바로 그 악들을 자신들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1:32의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와 2:1-3의 ‘판단하는 자’는 둘 다 하나님에 대한 어느 정도 지식이 있으며, 둘 다 그들의 지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점에서 유사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는 자신들이 옳지 않다고 아는 일들을 행한다. 그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한다(1:32). 후자는 그들이 옳지 않다고 아는 일들을 행하며, 그 일을 행하는 다른 사람들을 정죄한다. 이것은 위선적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태생적 특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하였지만(마 3:8-9), 그들의 민족적인 유산이 그들을 구원하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바울은 1장에서 기술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에게 주의를 돌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바울이 이방인을 기소할 때 1:18-32의 미개한 우상숭배자보다 자기가 우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위험에 처해 있는 점에서는 조금도 나을 바 없다. 이는 자기가 정죄하는 것과 같은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지를 보고 그 책을 평가하지 마라”는 영어 속담이다. 그러나 우리는 낯선 사람을 대할 때 그들의 표정, 나이, 의상, 목소리, 몸짓 등을 평가해서 그와 어떤 관계를 설정해야 할지를 결정한다. 첫인상을 통해 앞으로 계속 만나야 할 사람인지 아니면 두 번 다시 보아서는 안 될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바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가상의 캐릭터(imaginary character)이다. 실제로 이 인물은 2장 맨 열여섯 구절 전체에 걸쳐 바울의 마음 가장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의인을 자칭하는 이방인에 대한 어느 정도의 비율이 2:1-11에서 말하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만 바울의 주된 표적은 유대인이다. 바울은 여기서 화자나 저자가 자기 자신과 다른 관점의 대표자와의 토론을 청중들에게 듣게 함으로써 그들을 가르치고 있는 대중적인 문학 양식인 Diatribe를 사용하고 있다. Diatribe의 특징은 개인 상대와 대화하는 것이다. 이는 책임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과 효과적으로 맞서는 것이다.

왜 판단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핑계치 못하는가. 남을 판단하는 바로 그 행위로, 사람은 남과 같은 일을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유대인은 자신들이 하는 것은 옳은 거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똑같은 행위를 이방인이 할 때는 결코 같은 잣대가 적용되지 않는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비도덕적이고, 옳지 않은 행동이다. 절대 허용할 수가 없다. 인간은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이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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