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나는 박윤선 박사님이 개척했던 서울 동산교회에서 신학을 시작해서, 동산교회에서 신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동산교회에서 결혼하고, 동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동산교회에서 개척교회로 파송 받았다. 그런데 1968년 12월 15일 동산교회에서 목사 안수 받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지금은 장로교 합동 측 교회만해도 서울 경기 지역에 <경기노회> 하나뿐인 시대였다.

목사안수식, 머리 하얀 분이 이인재 목사

그날 경기 노회에서 목사 안수 받은 이들은 다섯 명 정도 있었지만 그 중에서 임승원 목사와 윤낙중 목사가 기억난다. 그날 설교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선봉장중의 한 분이었던 이인재 목사님이었다. 나는 그 시간 경기노회장 이인재 목사님의 설교가 하도 은혜롭고 인상적이어서 52년이 지난 지금도 그 메시지는 뚜렷하다. 그때 나는 27세의 청년으로서 개척교회를 하는 중이었고, 목회가 무엇인지 설교가 무엇인지 모르던 철부지 전도사였다. 그날 본문은 예레미야15:16의 말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에 즐거움이니다」
였다. 어쩌면 이 성경 말씀은 앞으로 목양의 현장에서 목회하는 목사에게 주는 가장 적절한 성경구절이었다. 이인재 목사님은 당시 62세였지만 머리가 하얗게 세어 은백의 머리였다. 이인재 목사님은 천천히 입을 열어 설교했다. 그의 설교 중에 핵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목사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에 누를 끼쳐서는 안되고, 그의 영광과 주권을 높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의 이름으로 목사란 칭호를 갖게 되었으므로, 주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하는 일을 할 것이요, 목사직을 가지고 자기 명예나 유익을 취한다면 목사라고 할 수 없고 이는 삯군이 될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목사가 되었으니 항상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편에 서야 할 것입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생명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사는 이 성경이 말씀한 데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 버려야 합니다. 말씀을 먹어 버린다는 것은 그 말씀을 맛있게 먹고 그것을 전할 때 마다 그 말씀과 함께 녹아져서 말씀과 화합한자로서 진실되고 힘있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명예나 지식을 전하려는 것은 말씀을 아직 먹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한 대로, 말씀을 얻어 먹었을 때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마음이 즐거운 것이 됩니다」
라고 했다.

출옥성도 뒤줄 가운데가 이인재 목사

과연 평생 진리투쟁에서 살아온 이인재 목사님의 신앙과 삶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이인재 목사님은 이기선, 한상동, 손명복, 주남선과 함께 일본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선봉에 서서,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 승리한 목사님이시다. 이인재 목사는 1906년 1월 4일 경남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 779번지에 출생했다. 밀양농잠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1월까지 면서기 공무원으로 13년간 일했다. 그러다가 목사로 소명을 받고 1938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 시기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 9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 의식이라고 성명을 내고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참으로 비통한 한국교회 역사였다. 이인재는 당시 평양 신학교 학생으로 이기선, 한상동 목사의 뒤를 따라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적극 가담한다. 그러다가 1940년 5월 13일 평양신학교 기숙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 경찰서 유치장과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어 1945년 8월 17일 해방 될 때까지 만 5년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47년 6월 7일 조수환, 황철도와 함께 고려신학교 제 1회로 졸업하고 마산 문창교회에서 이인재, 배수윤, 김희수, 김장현, 정해동, 손명복, 박성근 모두 7명이 목사 안수를 받는다. 그는 대구와 서울 등지에서 목회를 했지만, 합동 측 경기노회인 서울 성광교회를 목회하는 중 노회장이 되었고, 1968년 12월 15일 나의 목사 안수식에 설교를 하시고 안수해 주셨다.

그 후 이인재 목사는 미국으로 이민 가서 시카고, 뉴저지, 필라델피아의 합동 측 장로교회 목사로 미주 총회장으로 2000년 4월 3일 94세를 일기로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1946년 당시 이인재 전도사가 손양원 목사님의 애양원 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던 중에,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 동신이 공산당의 총에 맞아 순교했다. 그러니 부흥강사가 장례식 설교를 하게 되었다. 당시 두 아들을 잃은 손양원 목사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비통에 잠겨 있었다. 그때 이인재 전도사는 말하기를 우리가 지금까지 일재의 신사 참배를 반대하느라고 생명을 걸었는데, 공산당이 두 아들을 죽였으니 그것은 손 목사님의 가정에 위대한 순교의 제물이 아닙니까 하자, 손 목사님은 성령의 뜨거운 감화로 큰 확신과 은혜를 받고 장례 중에 하나님께 아홉 가지 감사를 고백했다. 나는 감사하게도 신사참배를 반대한 출옥 성도들의 설교 곧 한상동, 손명복, 황철도, 이인재 목사님의 설교를 모두 들을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이인재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먹으라」는 그날 설교를 회상한다. 오늘날 한국의 지도급 목사들이 평화도 좋고 민족화합도 선교도 좋지만 북한에 가서 김일성 동상 앞에 절하고 왔다는 것이 제발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기도한다. 일제 때 우상숭배를 반대하여 생명을 바쳐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순교자들과 산 순교자들은 점점 잊어지는 듯 하다. 52년 전「말씀을 먹으라」는 이인재 목사님의 설교가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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