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관점’으로 읽는 성경 이야기 ⑪

 

임승훈 목사 - 월간목회편집부장 역임, 한국성결신문 창간작업 및 편집부장역임, 서울신학대학교총동문회 출판팀장, 위대한맘 인천한부모센터 대표, 설교학 신학박사(Th,D), 더감사교회 담임

-출애굽기 1,2장을 중심으로

요셉이 애굽(이집트)의 총리가 되고 바로의 위임에 의해 위기에 빠진 나라를 넉넉히 구하고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통치하던 시절(대략 BC.19C 경)이 있었다. 하지만 왕조가 바뀌고 요셉은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야곱의 가족과 가솔(家率) 70여명이 애급으로 이주하여 한참 번성해 나가던 시절이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등장했다는 말이다(출 1:8 이하). 그가 이스라엘 민족을 보니 여간 짜임새 있게 자신들끼리 뭉치고 연합하여 세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을 보는 관점이 출애굽기에 잘 나타난다.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다’(출 1:9)는 것. 이는 억지다. 엄청난 과장법이 뒤섞인 삐딱한 시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탄압하기 위한 날조된 관점이다. 어찌 저들이 이집트 본토 백성들보다 많다는 말인가. 또한 강하면 얼마나 강할 것인가. 치안 경찰과 국경 수비대는 물론이고 국가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교육 문화 외교 등 모두가 애급인의 정부요 애급인의 나라가 아닌가. 더군다나 ‘그들이(이스라엘 민족)...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반기를 들고 탈출할 것’(출 1:10)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히브리인들에 대한 모함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해서 그때부터는 이스라엘 자손을 감독하는 감독관이 생겼고, 국고성 비돔(Pithom)과 라암셋(Rameses)을 건축하는 강제노동에 동원돼 시달리게 되었다. 국책사업을 돈 안들이고 이스라엘 인들을 동원했으니 ‘흙 이기기’, ‘벽돌 굽기’와 ‘농토 개간’ 등 시키는 일마다 모두 엄하였다. 이른바 히브리인을 압살하는 정책인 것이다. 더욱이 히브리 산파를 매수하여 남자 아기들이 태어나거든 죽이도록 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나일강에 던지라는 법령까지 만들었으니 탄압이 극에 달하였다.

이러한 엄중하고 가혹한 시절에 레위인 가족 중에서 한 아기(Moses, 男)가 태어났다. 석 달을 숨겨 키웠지만 더는 숨길 수가 없게 되자 갈대로 엮은 바구니 배(역청과 송진을 발라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갈대 상자)를 마련하여 나일 강 갈대숲 인근에 띄우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시간이다. 어미가 젖을 먹이며 기르던 갓난아기 아닌가. 어미는 물론, 아비와 어린 딸까지, 버려지는 모세의 바구니 배가 어찌 되는지를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메시지성경(Message)의 표현을 빌려보자.

「아이의 누이가 조금 떨어져 잘 보이는 곳에 서서,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왔다. 시녀들은 강가를 거닐고 있었다. 바로의 딸이 갈대 사이에 떠 있는 바구니 배를 보고, 시녀를 보내 가져오게 했다. 그녀가 바구니를 열어 보니, 아이가 있었다. 아이가 울고 있었다! 그녀가 이이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말했다. “이 아이는 분명히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구나.”」(출 2:4-6)

당시엔, 히브리인들의 아이를 나일 강에 띄워 보내야 하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비윤리적인 악법이 존재했다. 히브리인들을 탄압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법일 터. 소수민족의 비애다. 나라 없는 민족의 참상이다. 비이성적인 나라, 비인격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반인륜적인 시절의 애굽 정부가 존재했던 모양이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비이성적이라면 그야말로 무슨 법령인들 만들지 못할까? 성경 다니엘서에서도 왕을 숭배하지 않는 사람들을 체포해 사자 굴에 던진다는 비윤리적 법령이 존재했었다.

레위족의 한 부인, 한 애기 엄마는 엎드려 기도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젖먹이 아기, 핏덩어리 같은 내 품의 아기를 어찌, 강물에 빠뜨린단 말인가? 법을 피할 방법은 없고, 법을 지키자니 반인륜이요, 거역하자니 목숨이 하나이니 이를 어찌한 단 말인가? 정말로 피해갈 수 있는 길이 없단 말인가? 진정 아이를 살려낼 묘책은 무엇일까? 이 아기 엄마는 엎드려 간절히 기도했다. 그 부모는 부디 길을 열어달라며 몇 날 며칠을 그렇게 매달렸는지 모른다. 여호와 하나님께 말이다.

‘하나님, 지혜가 기억나게 하옵소서. 하나님, 나의 주님이시여. 수십 년 전 요셉 시대에, 온 나라와 민족이 모두 굶주려 죽어나갈 칠년간의 흉년이 불어 닥치기 전, 요셉 선조에게 지혜를 주셨지 않습니까? 저에게도 그와 같은 지혜를 주시옵소서. 그의 아버지 야곱에게는 그의 형 에서의 칼로 해를 당하기 직전 피해갈 지혜를 주었지 않습니까? 피하거나 승리할 지혜를 저에게도 허락해 주옵소서.’

헌데 한 신생아의 나일 강 투척 사건을 살펴 보건데 놀라운 장면들이 나타난다. 아기를 나일 강에 빠뜨려 죽여 버리라는 법령은 모세의 경우 무력해지고 만다. 아무 소용이 없는 듯 말이다. 하나님의 뜻인가. 우연의 일치일까?

바로의 딸, 공주(公主)가 정기적으로 목욕을 하러 내려오는 요일(曜日)이 대략 알려 졌음직하다. 정기적으로 목욕하던 대략의 시간과 장소도 모세의 가족에게 알려 졌다고 여겨진다(?). ’실낱같은 소망이었다. 작은 구멍에 볕이 듬인가. 어쩌면 우리 아기를 살릴 수 있다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었다. ‘바로의 딸, 목욕’이라는 단어가 들려온 것은 아기 엄마에게는 하나의 불이요, 빛이었다. ‘아! 과연 살릴 수 있을까?“ ’아냐, 살필 수 있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야‘ ‘감사로 눈물이 쏟아진다.’ 이것이야 말로 천금 같은 빅뉴스(?)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는 그야 말로 아기의 부모에게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대 사건이다.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인간 세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 앞에서 감사를 잃어버려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잘 아는 대로 로마서(롬 1:21)에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아기의 엄마는 감사를 회복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였고 생각의 틈새를 벌리니 허망하거나 미련하거나 조바심이나 조급함으로 일을 그르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한 마음으로 어두움은 걷히고 지혜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아기(모세)를 살리느냐 죽이느냐의 위급한 순간에 아기를 살릴 수 있다는 음성들이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목욕’이란 말 뒤에 들려온 이야기는 이러했다.

“공주는 정도 많고 눈물도 많대!”

“그녀는 성품이 온화하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아름다운 여인이라던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모세의 부모들에게 마음이 열리어 들려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들을만한 귀가 없으면 들리지 않을 말들이다. 만약이지만, ‘빨빨 거리며 개구쟁이였던 재롱둥이에 지혜가 많던 이 가정의 맏이(미리암)가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풀어내었다.’라는 가정이다.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면 어찌 될 것인가. 아니다 보통 아이들은 집 밖에서 들은 이야기는 모든 게 신기한 것이어서 자기 엄마에게 말하지 않을 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이런 얘기를 하였다 한들 어미가 마음을 열지 않고 생각과 마음의 틈새를 벌리지 않았다면 그 말은 들리지 않을 말일 수도 있다. 하나 더 상상해보자!


“엄마! 엄마! 얼마 전이었어요, 지난주 안식일(?) 쯤으로 기억되는데, 한 아기를 나일 강에다 배 띄울(버릴) 때 공주가 건지는 장면을 보았어요!”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니까요.”

“엄마 내가 듣자 하니까요, 그 공주는 안타까운 일을 보면 돕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아름답고 고운 성품이라고 하던데요. ‘바로 왕’하고는 많이 다르대요.”

이러한 일련의 알려졌음직한 개연성 말이다. 한 레위족 인의 집이 바로의 딸이 기거하던 공주의 궁궐 곁, 움막이었다는 가정을 해보면 어떨까? 작가의 상상이지만 충분히 가능할 만한 이야기 아닌가? 이러한 상상력에 의해 미리암과 아론, 한 아기의 엄마와 아빠가 비밀리에 들은 특급 정보를 가지고 접근한 게 아닌가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이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필자의 상상으로 구성해본 시나리오다. 6절에 나오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소유자’라는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말이다.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출 2:4-6)

그때 아이의 누이(미리암)가 그녀(공주) 앞으로 나아가서 말한다. “제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 공주님을 대신해서 아이에게 젖을 먹일 유모를 데려올까요?”

바로의 딸이 대답한다. “그래, 어서 다녀오너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머니를 불러왔다.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니”(출 2:9)

바로의 공주는 처녀였으므로 아기를 건졌다 해도 젖을 물릴 처지가 아닌 것을 안 미리암이 쪼르르 달려가 유모를 데려오겠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공주의 말을 듣고는 자기 엄마를 데리고 올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런 모두가 철저하게 기도하고 감사하여 얻은 지혜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렇게 해서 미리암의 어미는 자기의 아들을 위탁받아 젖을 먹이며 수개월간 아니 1년이 넘도록(?) 키웠다는 사실이다. 이는 분명 역사적 사실이다. 위탁받았다는 사실은 자기 아이를 젖먹이면서도 바로의 궁정에서 나오는 월급(재정,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기 아이를 끌어안고 젖을 먹일 때마다 어미는 감사하여 눈물을 뚝뚝 흘렸음에 틀림없다 하겠다.

“오 주, 하나님이시여. 내게 어찌 이런 놀라운 사건과 역사를 경험하게 하시나요? 이 아이가 자라 장차 어떻게 될 런지요? 하나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모세가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 죽여 마땅한 체재 아래서 동그란 눈을 뜨고 무럭무럭 자라는 내 아들을 내 품에서 키우다니요. 이 벅찬 감격을 무어라 감사해야 할런지요.”

감사하는 데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놀라운 힘이 있다. 이때 까지만 해도 아기의 이름은 없었다. 그 어미로부터 바로의 딸이 데려간 뒤 그의 이름을 모세라 이름 지었다. 그 뜻은 물에서 건져내었다는 뜻이다.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출 2:10) 모세는 그 이름의 뜻 그대로 히브리 백성들을 출애굽 시킬 적에 다시 한 번 홍해의 바닷물로부터 건져내는 기적을 경험한다. ‘아 어찌 이리도 놀라운 역사적 사건이 다시 한 번 재연되다니.’ 이 또한 감사의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랴.

 

어느 아주머니의 일상 감사를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여보! 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봐 주니 감사합니다.

-정수기 관리사님! 정수기의 필터를 갈아 깨끗한 물을 먹게 해 주어 감사합니다.

-아파트단지에 장마당을 열러 오시는 성실한 분들, 알뜰장터를 열어 싸고 편하게 먹거리를 사먹게 해주니 감사합니다.

-내 말을 잘 들어주시고 말할 때 눈을 맞추어 주니 감사합니다.

-기사님! 버스를 안전하게 운전해 주어 감사합니다.

-아들아! 아침마다 먼저 인사해 주어 고맙고 감사해요.

-좋은 영화를 상영해 주니 감사합니다. 맛있는 팝콘과 오징어도 감사합니다.

-어제 저녁, 마음이 슬플 때 옆에 같이 있어 주어 감사합니다.

-항상 온유하게 대해 주니 감사합니다.

-결재 서류를 잘 만들어 일이 쉽게 끝날 수 있게 해주니 감사합니다.

 

평범한 감사언어가 쌓여 우리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니 놀라운 일이다. 필자는 감사생활을 하면서 놀라운 삶의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먹거리에 간식에 감과 감귤에 다양한 커피브랜드에 이르기 까지 말로 다할 수가 없다. 특히 싱글맘(위대한맘 인천센터 자조모임)을 돌보는 사역에서도 매회마다 나눌 수 있는 풍요가 내게 주어진다. 내가 재정으로 사는 게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보내오는 풍요로움이다. 이 모든 게 감사의 결과였음을 고백한다.

 

감사경구 : “감사할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풍요로워진다”(디히트리히 본회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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