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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칼럼】바이올린 메이커(Violin Maker)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내가 운영하고 있는 <한국칼빈주의연구원>과 <칼빈박물관>은 벌써 35년이 되었다. 나는 평생 소원이 이 땅에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보존하고, 후학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나의 꿈이다. 칼빈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것은 벌써 반세기가 넘었다. 그런데 칼빈 박물관에는 국보급에 해당하는 자료도 있다. 여컨대 1553년의 칼빈의 기독교 강요 라틴어 원본을 비롯해서 칼빈의 성경주석 원본과 16세기 교부들의 원전 즉 폴리갑에서 어거스틴까지 모든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기타 종교개혁 곧 교회개혁과 관련된 자료들도 있다. 즉 마틴루터가 1517년 종교개혁을 할 때 95개조 인쇄물과 면죄부(Indulgency)도 있다.

정성구 고문

또 종교 개혁 이후에 화란과 스코틀렌드의 교회 자료도 많다. 좀 특별한 것은 1638년 2월 28일 영국과 스코틀렌드 국왕 챨스Ⅱ세가 공포하기를 「짐은 국가에도 머리이고, 교회에서도 머리」라고 칙령을 내리자, 스코틀렌드 장로교회의 언약도(Covenanter)들은 에딘버러 그레이 프레이어스 교회 앞마당에 모여 우리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을 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국왕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1200명의 대표자 200여명이 친필로 서명해서 발표했다. 그로 말미암아 1200명이 지붕 없는 감옥에 갇혀 모두 순교의 잔을 마셨다. 그 신앙고백과 서명은 칼빈 박물관에 있다. 그래서 많은 전세계 개혁주의 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칼빈 박물관을 방문했다. 그렇지만 정작 지난 35년 동안 한국교회 특히 보수주의 신학과 신앙을 부르짖는 교회에서는 참으로 무심했고 방문객도 별로 없고 아무 협력이 없었다.

칼빈주의 박물관에는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이 어떻게 한국교회에 뿌리 내렸는지에 대한 자료도 있지만, 개혁교회와 음악과의 관계에도 관심이 있었다. 예컨데 칼빈은 일찍이 스트라스 부르크에서 피난민목회를 할 때 불란서에서 온 궁정시인인 클레멩 마로(Clement Marot)를 시켜서 시편 곡을 만들었다. 그 후 베자(Theodore Beza)가 후속 시편 곡을 완성해서 시편 찬송 곡을 펴냈다. 그런 마로의 자료도 있다. 특히 그중에서 역사에 위대한 음악가들은 모두 교회를 중심에서 일어났음으로 <베토벤> <모짜라트> <하이든> <멘델스존>같은 음악의 거장들의 육필 악보도 있다.

그런데 칼빈 박물관에 있는 바이올린 중에는 바이올린의 원조인 1656년에 제작한 아마티(N. Aamti)의 바이올린도 있고, 1721년의 스트라디바리우스(A.Stradivarius)가 만든 바이올린이 있는데, 울림 판 뒤에는 Paganini라고 음각되어 있다. 혹시 바이올린 연주의 황제 Paganini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음악을 공부한 일도 없고 음악에 소양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16세기 이후에 교회의 성장과 교회음악은 늘 같이 했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어서 자료차원에서 박물관에 몇 대의 바이올린이 비치되어 있을 뿐이다.

나는 48년전에 유럽으로 유학을 할 때 하도하도 가난해서 홀트양자회의 에스코트로 취직해서 단돈 9만5천원으로 원웨이 티켓을 사서 갔다. 가기 전에 나는 광화문에 있는 <목각훈련원>에 입학해서 목각기술을 배웠다. 왜냐하면 유학 중에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 처지가 될 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하나는 배워가자는 생각이었다. 내가 목각 기술을 배운 것은 소질이 있어서가 아니고, 몸이 약해서 노동을 할 수 없고, 그래도 목각을 배워두면 혹시 알르바이트 라도 할 수 있을 듯 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목사로서 목각 자격증을 땄다. 그래서 내 짐짝 속에는 20여가지의 목각을 만들기 위한 도구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꾀 무거운 것이었지만, 혹시나 해서 비행기에 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아무도 나의 유학을 지원하는 자가 없던 때로, 그런 기술이라도 의지가 되었다.

그러나 막상 유학을 가서는 단 한번도 목각 알르바이트를 한 일이 없었고, 한인 성도들의 아이들에게 <한글학교>를 열어 약간의 도움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 아들 모세의 친구의 아버지가 내게 관심을 가졌다. 여름에 여행을 갈 때, 우리 가족이 집을 지켜 주는 대가로 넓은 정원에서 평안이 바캉스를 보낼 수 있었다. 그분은 바이올린 제작자(Violin Maker)였다. 어느 날 나는 그분에게 접근해서 바이올린 공방에 들어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기꺼이 나를 초대해 주었다. 3층의 그 바이올린 공방은 엄청 컸다. 나는 그에게 묻기를 “나는 바이올린에 관심이 많고,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기꺼이 가르칠 수 있지만, 나에게 배워서 바이올린을 혼자 만들 정도가 되기까지는 열심히 해서 꼬박 4년이 걸린다”고 했다. 나는 기가 죽었고, 나의 가벼운 말이 참으로 부끄러웠다.

유럽에는 이른 바 모든 분야에 마이스터(Maister)제도가 있는데, 이것은 이른바 일대 일의 도재식 교육 방법이 있다. 이것은 대학 4년과 맞먹는 것이다. 나는 내가 질문을 잘 못한 것을 깨닫고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일년에 바이올린을 몇 대나 만듭니까?”라고 했더니, 그분은 내게 말하기를 “아주 컨디션이 좋으면 일년에 하나 또는 두 대를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또 한 번 부끄럽기 그지 없었다. 나는 그가 하루에 몇 대를 만들 것으로 착각 한 것이다. 내친김에 나는 또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생활을 합니까?”했더니 “생계는 바이올린 수리로 먹고 삽니다. 바이올린 연주자만 예술가가 아니고, 바이올린 제작자도 예술가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얼굴이 확 달아 올랐다. 그 말을 듣고 그 날 나는 몰래 나의 모든 목각 도구 보따리를 그의 집 문에 두고 글 한 줄을 썼다. 「This is all for you」라고 썼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소명을 받았음으로 모두 존경을 받아야 하고, 자기 분야에 하나님께서 주신 천부적 마이스터였다.

정성구 고문  webmaster@bonh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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