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38) 관용(toleration)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관용은 악티움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 옥타비아누스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원로원이 만장일치로 부여한 호칭인 ‘존엄한 자’를 뜻하는 아우구스투스가 됐다. 원래는 공화정 때의 최고 권력자에게 주어지던 호칭이다. 정식 명칭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이다. 그는 권력과 권위를 독점해 사실상 황제가 됐다. 특히 세 개의 건물에 심혈을 기울였다. 평화의 제단, 아우구스투스 영묘, 판테온이 그것이다. 판테온은 ‘만신전(萬神殿)’이다. ‘모든 신을 모시는 신전’이란 뜻이다. 종교를 인정한다는 것은 사실상 누군가의 모든 정신세계와 생활양식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황제는 판테온을 통해 관용이 로마제국의 국시(國是)임을 밝힌 것이다. 수많은 신을 섬긴 것은 Hittite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강인욱 경희대(고고학) 교수는 “히타이트는 관용과 동화정책으로 제국을 완성했다. 다른 지역의 문화를 흡수하는 다민족 국가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했다.

The Pantheon, ancient building of ancient Rome

관용을 뜻하는 toleration은 ‘인내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tolerare에서 유래했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 관용이라는 말은 어떤 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그대로 용납하는 것을 뜻한다. “관용을 보이지 못하는 건 자신의 대의명분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일찍이 설파했다. 자식을 키워 본 사람은 안다. 꾸지람과 용납함 사이의 결정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조선후기 문신이었던 성대중이 ‘질언(質言)’에서 말했다. “엄격(嚴格)하나 잔인하지 않고, 너그러워도 느슨하지 않는다(嚴而不殘, 寬而不弛).” 엄격함과 잔인함은 구분이 필요하다. 너그러운 것과 물러터진 것은 다르다. 반복적인 훈육은 마음을 쪼그라들게 해 비뚤어진 행동을 낳기도 한다. 지나친 관용은 버릇없는 아이를 만들어 다른 방향으로 사회적 부적응자를 만든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규범을 잘 지키도록 엄격하면서도 너그러움 속에서 평안함을 느낄 수 있게 키워야 하지만, 말이 쉽지 균형을 찾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용납하심에 해당하는 ‘ἀνοχή’(아노케)는 ‘진노를 미룸’이라는 뜻이다. 여기와 3:26에서만 쓰인다. 원래의 헬라어는 ‘자제’(self-restraint)의 개념을 지니고 있다. 이 단어는 고전 헬라어에서 잠시 쉬는 것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다.

 

1. 하나님의 용납하심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 간과하심에 해당하는 ‘파레시스’는 어떤 뜻인가. 문자적인 의미는 ‘묵인하다, 무시하다’이다. 그러나 전에 지은 죄를 용서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오직 오래 참으시는 그 관용으로써 그와 같이 행하셨다는 뜻이다. 결국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묵과하실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무겁게 짓누르는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가 모두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게 쏟아졌다. 진무경(陳無競)이 제시한 용물(容物), 곧 타인을 포용하는 방법은 이렇다. “남의 참됨을 취하려면 융통성 없는 점은 봐준다. 질박함을 취할 때는 그 어리석음은 너그럽게 넘긴다.

신약성경에 아노케가 하나님에 대하여만 사용되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아노케와 ‘길이 참음’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없다. 아노케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관용의 시대를 나타내어, 로마서에서 이스라엘에 대해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까지 기간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면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시편 145편 기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긍휼과 용서를 베푸시는 분으로 찬양하도록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특혜를 베푸신다는 가정은 구약 시대에 이미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언약 안에서 성실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방패마개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선지자들이 풍부하게 지적하고 있다.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탕자의 귀향’에서 작은 아들은 머리카락도 빠지고 옷도 신발도 다 해졌다. 아들의 등에 얹은 아버지의 두 손이 특별하다. 왼손은 억센 남자의 손, 오른손은 여린 여자의 손이다. 아마도 렘브란트는 돌아온 탕자를 따뜻하게 감싸 안고 모든 것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했던 듯하다. 그래서 왼손은 자신의 모든 시련을 해결해 주실 강한 능력의 손으로, 오른손은 그의 모든 죄를 용납하시는 사랑의 손으로 그린 것이다. 철 지난 농담이다. ‘이 시대의 4저(져)남 이야기’다. 요즘 젊은 여자들 눈에 키 작은 남자는 ‘루저’, 못생겼으면 ‘후져’, 돈 없으면 ‘꺼져’. 그리고 이 셋 모두에 해당하면 ‘뒤져’라고 한다. 탕자의 키는 알 수 없지만 집에 돌아올 때 그의 모습은 후졌을 것이고 아버지의 관용에 못마땅한 형의 태도는 한 마디로 꺼져다.

Rembrandt Harmensz. van Rijn -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탕자의 형이 아버지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아버지의 용납하심을 이해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는가. 일종의 세대갈등이 발발한 이유가 무엇인가. 아버지의 관용은 그야말로 풍성하다.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열 정도다. 이것이 아버지의 용납하심의 실제를 보여준다. 실제 탕자의 행동은 옳다고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것을 참고 용납하실 뿐만 아니라 대환영 행사까지 행한다. 이처럼 관용은 그러한 견해를 갖고 있거나 관습을 실행하는 사람들을 참고 용납해주는 것을 가리킨다. 관용이란 맏이처럼 자신만의 권리만을 주장하거나 율법의 문자에 얽매여 그것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공평과 공정의 마음가짐으로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고려해 줄 수 아는 사려 깊은 의지를 의미한다.

골로새서 3:13은 ‘서로 용납하며’로 시작한다. ‘서로’라는 말 속에 신약적 용법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즉, 용납하는 마음속에 자기중심적 요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용납의 상호 관련적 특징을 찾아낼 수 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의 저자 Jack Weatherford는 칭기스 칸 성공의 비결 중 하나로 종교에 대한 포용을 꼽는다. 제국의 판도가 드넓으니 지역 내에 다양한 종교, 또 그 종교 내 복잡한 파벌들 간의 투쟁은 도저히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설득도 하고 탄압도 하고 종교지도자간 논리 배틀까지 벌여봤던 칭기스 칸은 마침내 완벽한 종교의 자유를 선언해버린다. 제국의 핵심은 개방성과 관용이다.

Jack Welch 전 GE 회장은 사내 폭발 사고를 회상하며 “사람이 실수를 했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격려와 관용이며 잃어버린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이다”고 했다. 큰아들로서 마땅히 생각할 이상의 생각을 한다. 판단을 한다. 1950년대 반항의 아이콘 제임스 딘이 주연한 ‘이유 없는 반항’에서 그가 부모를 향해 쏟아낸 절규다. “당신들이 나를 갈기갈기 찢고 있어요.” 오늘날 586세대가 ‘공리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반면 2030 세대는 ‘개인적 가치’를 더 우선시한다. 분명한 것은 아버지는 동생을 판단하는 형까지 용납한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용납하심의 풍성함

인간이 어떤 사건의 원인을 찾아가는 사고 과정에서 강력하고 근본적 심리현상의 하나가 절감원리(discounting principle)다. 실제 원인을 확실히 모르거나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판단에 불확실성이 존재할 때, 하나의 원인만을 생각할 때보다는 그럴싸한 원인이 하나 추가될 때마다 처음 그 원인의 중요성이 약하게 인식되는 현상이다. 맏이는 동생이 처한 모든 상황도 알지 못한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거나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즉 그 전후 상황을 고려하지 못하고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도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행동만으로 동생의 내적 동기가 그런 거고, 원래의 성품이나 본성이라고 판단해 버리는 것이다. 맏이는 동생이 비일관적이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비난과 함께 그런 아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아버지를 비난한다.

히브리어뿐만 아니라 헬라어도 대체로 뜻이 같은 그런 용어들을 중첩시켜서 어떤 주장을 밝히는 특징이 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라는 세 마디 모두 풍성함에 걸린다. 하나님의 긍휼을 묘사한다. ‘논어’에서 공자는 제자 자장이 지도자의 덕목으로서 인(仁)에 대해 묻자 ‘공손함(恭), 너그러움(寬), 믿음(信), 민첩함(敏), 은혜(惠), 이 다섯 가지를 잘 실행하면 인(仁)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망은(忘恩)을 견디신,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는 관용과 오래 참으시는 분이다. 용장(勇將)은 지장(智將)을 이길 수 없고, 지장은 덕장(德將)을 이길 수 없다고 한다. 덕장은 관용의 사람이다. 덕장이라고 호·불호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너그러움이 호·불호 위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하신다. 이로써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을 증명하신다. 하나님의 용납하심은 풍성하다. 용납하심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죄인이 받아서 마땅한 심판을 오래 참고 내리시지 않으시는 것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 진시황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을 모두 쫓아내라는 내용의 ‘축객령(逐客令)’을 내리자 이사는 그를 제지하는 ‘간축객서(諫逐客書)’를 올린다. 그 안에 이런 말이 등장한다. “태산은 다른 곳의 흙을 물리치지 않아 그 거대함을 이루고, 강과 바다는 작은 물줄기를 마다하지 않아 그 깊음을 이룬다(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커다란 물을 이루는 요체는 ‘불택세류(不擇細流)’, 즉 조그만 물줄기라도 마다하지 않음에 있다는 메시지다. 이를테면 ‘포용’과 ‘관용’이다.

톨레랑스(tolerance) ‘관용’

프랑스어 톨레랑스(tolerance)는 주로 ‘관용’이라 번역된다. 나와 다른 생각과 행동을 용인하는 것, 틀렸다 하지 않고 다를 뿐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자신이 볼 때 분명히 틀린 짓인데 “그냥 다른 거야” 하면서 넘기려면 참아야 한다. 톨레랑스는 참는 것이다. 어원인 라틴어 tolerantia도 인내라는 뜻을 가졌다. 바울은 타인을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 용납하심,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는 것임을 독자들이 알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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