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지극히 작은 자인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Th. M).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성경학박사과정(D.Litt)을 졸업했다. 예장총회교육자원부 연구원과 서울장신대 교수와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그동안 성경학교와 신학교, 목회자와 교회교육 세미나와 강의등을 해오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에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평생말씀학교인 <예즈덤성경대학>을 20년째 교수하고 있으며 극동방송에서 <알기쉬운 기독교이해><크리스천 가이드> < 크리스천 습관과 인간관계> < 재미있는 성경공부> <전도가 안된다구요>등 성경과 신앙생활 프로그램 담당했으며 다양한 직장 소그룹 성경공부 사역을 하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현장 사역 경험(소형.중형.대형교회,개척과 담임목회)과 연구를 토대로 300여권의 저서가 있으며 <이야기대화식 성경연구>와 <30분성경교재 시리즈>와 다양한 실천 프로그램을 제시한 저서( “유대인 밥상머리 자녀교육법” ( 2016년 세종도서 우수도서 ). “한국인을 위한 유대인공부법” (대만번역 출간), “유대인의 파르데스공부법“ 등 다수가 있다. 현재 꿈을주는교회 담임목사. 예즈덤성경교육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베들레헴 작은 동네의 천한 구유의 예수님

성탄절이 되면 가장 많이 등장되는 사람 유형이 있다.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이 작은 동네 베들레헴과 낮고 천한 구유에 태어나신 모습 때문이다. 외적으로 보면 예수님과 우리 주변에 어려운 사람과 흡사하다. 예수님의 공생애 삶을 보면 지위와 높은 자들보다는 낮고 천하고 작은 자들과 주로 같이 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푸셨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을 작은 자와 낮은 자의 주님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과 연관하여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는 내용이다. 우리는 이 성경구절을 읽을 때 지극히 작은 자를 보통 세상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자라고 생각하며 교회가 그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곧 주님께 한 것으로 적용한다. 그동안 우리들의 사회봉사와 섬김을 보면 거의 이 성경을 근거로 삼고 있다. 물론 세상에서 무시하는 그들을 그리스도인이 먼저 다가서 돕고 섬기는 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특히 고아, 과부, 나그네 등을 내 몸처럼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지극히 작은 자는 사회·경제적 작은 자가 아니야

하지만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지극히 작은 자”의 구절은 종말론 내용으로 심판대 앞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다. 이 본문을 육신적 의미에서 작은 자를 세상의 가난하고 힘없는 자로 적용하는 것은 본문의 문맥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이렇게 적용하면 윤리적이고 도적적인 행위가 된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선한 행위를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복음은 어려운 사람과 소외된 자, 가난한 자들을 돕는 그 이상이다. 만약 작은 자를 세상적인 모습으로 이해를 하면 진정한 복음이 아니다, 자칫 복음이 가난한 자들의 것으로 치우칠 수 있다. 복음은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래서 모두의 복음이다.

성경에 언급된 지극히 작은 자는 외적인 의미에서 작은 자가 아니다.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돕는 것이 곧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 한 것이라는 등식으로 단어로 적용하면 본문의 문맥과 맞지 않는다. 이런 자들이 오른편에 속한 자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성경 전체와도 어긋난다. 그렇다면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바로 앞에 “여기 내 형제 중에”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믿음을 가진 형제에 사용되는 단어다(막 3:35). 이것은 세상 사람이 아닌 주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더 나아가 성경에 나오는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이 구절의 뜻이 더 분명하다,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기록되었다(마 11:11). 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며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면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않는다”라고 (마 10:40-42) 말씀하셨다. 또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크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막 10:43-45)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작은 자의 상징인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고전 15:9), 약한 자, 가난한 자, 종으로 소개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하늘에 계신 분이지만 가장 낮은 곳에 종으로 오셔서 가장 작은 자로 사셨고 종으로 죽으셨다(빌 2:6-8)

 

지극히 작은 자는 그리스도인과 제자

이렇게 보면 지극히 작은 자는 그리스도인과 제자를 지칭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들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진정한 제자의 정체성이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가장 큰 복음을 얻었고 더 이상 큰 것을 구할 필요가 없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나라요 상속자이며 하나님의 후사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소유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더 크게 되려고 힘쓰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작은 자의 모습을 통하여 세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목숨을 기꺼이 바친다. 복음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즐겁게 받는다. 복음 때문에 옥에 갇히기도 하고 목마르기도 하고 주리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슬퍼하지 않고 기뻐한다.

이렇게 당한 작은 자의 모습은 복음의 진보를 이루는 것이기에 그것을 즐거워하고 오히려 약함과 작은 것과 연약한 것을 부끄러워하기보다 자랑한다, 이런 지극히 작은 자인 의인들을 돌보고 물을 주고 돌아보고 먹을 것을 준 행동은 곧 복음을 위한 일이 된다. 단순히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윤리적인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이 될 때 그것이 지극히 작은 일에 동참하는 것이요 천국에서는 큰일이 된다.

 

작은 자의 삶을 살며 작은 자를 돌보는 한국교회

한국의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세상에서 남보다 더 크려고 하기보다는 지극히 작은 자로서 삶을 살아야 한다. 어려운 곳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셀 수 없는 무명의 제자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복음을 위해 묵묵히 수고하며 작은 길을 가는 제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을 무시하지 않고 존대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을 주신다. 이런 면에서 보면 한국교회를 지키는 80%에 해당되는 세상이 보기에는 비록 작고 초라한 작은 교회, 개척교회, 가정교회, 섬 교회, 농촌교회와 그곳을 섬기는 종들과 성도들의 충성은 아름다운 일이다. 혹시라도 외적인 모습을 보고 그들을 작다고 홀대하거나 무시한다면 그것은 곧 주님을 박대한 것이다.

이 성탄 계절에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가난해지고 아주 작아진 그들을 한번 돌아보자.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그들을 찾아보고 격려하고 축복하고 기도해주자. 바로 내가 해야 할 그 일을 그들이 하고 있는 동역자들이다, 아울러 나 역시 곧 지극히 작은 자의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자.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미 가장 큰 나라를 얻은 사람들이다. 세상 것과 비교 불가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의 삶이 부끄럽지 않다, 가장 낮은 구유에 오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 자화상이다. 오늘 우리는 성탄절을 통해 이것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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