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39) 회개(return)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회개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

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질문’이라는 책에서 ‘회개하라’를 그리스어 원문의 정신에 충실하게 이렇게 번역한다. ‘네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네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을 바꾸어라.’ 회개의 성경적인 개념은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해서 헌신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것으로부터 철저하게 돌이키는(turning) 것과 그와 상응하여 사랑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돌아서는(turning) 것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종종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겠다는 약속에 부응하여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돌이킴’, 즉 ‘회개’란 말을 쓰고 있다(대하 7:14).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선지자 요한이나 예수님의 첫 메시지처럼 ‘회개하라’가 크게 강화되었고, 개인을 향한 구체적인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 요한과 예수님의 메시지와 Martin Luther의 95개조 반박문의 공통점이 있다. 회개가 서두에 나온다. 핵심 메시지다. 요한은 심판이 임박했음을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시므로 우리도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요구한다. 예수님의 선포에서 회개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메시지의 지표에 함축되어 있는 명령이다. 예수님의 복음선포와 기적은 최종적이고 무조건적인 결단으로 회개하라는 부름이다. 완전한 순종의 자세로 단 한 번에 오로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부르심이다. 루터가 반박문을 통해 강조한 핵심은 ‘회개’다. 1조와 2조는 회개를 강조했다.

구약성경에서는 회개하다에 해당하는 '나함'(נחם 욘 3:10)과 '슈브'(שוב 욘 3:9)가 비슷한 동의어로 번역되었다. 전자는 사람에게는 자주 쓰이지 않고 보통 하나님에 대해서 쓰였다. 땅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거나(창 6:6),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한다고 할 때 쓰인다. ‘돌아서다’라는 뜻을 지닌 후자는 은유적으로 표현되는데, 그 개념은 하나님이 과거에 이스라엘과 맺으셨던 언약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신약성경에 회개에 대한 개념의 배경은 일차적으로 ‘후회하다’를 뜻하는 전자에 있지 않고(욥 42:6; 렘 8:6; 31:19은 제외) 오히려 후자이다. 이것은 신앙적인 뜻에서 ‘돌아오다, ~로부터 돌이키다, ~로 돌아가다’를 뜻함에 있다. 고집을 꺾고 돌이키는 자, 즉 회개하는 자는 자신이 내린 재앙을 후회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

 

1.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

바울은 회개에 해당하는 명사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는 4회, 동사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는 단 1회 사용한다. 비록 바울은 말씀을 전하면서 자주 ‘회개’에 대해 가르쳤지만(행 20:21) 로마서에서는 한 번 사용한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믿음을 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 두 단어는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상당히 자주 사용된다(동사는 24회, 명사는 14회). 메타노이아는 ‘마음의 변화’ 또는 보다 일반적으로는 ‘후회’의 덜 비중 있는 의미라 할지라도, 뚜렷하지는 않지만 헬라에서 충분히 알려진 개념이다. 구약성경의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이킴(turning back)인데 신약의 회개는 ‘마음을 바꾸다(to change one’s mind)’, 또한 ‘후회하다, 자책감을 느끼다’라는 뜻은 구약의 관점을 능가하는 것이다.

Martin Luther는 원래 착실한 사제이자 수도자, 신학 교수였다. 로마서를 연구할수록 로마교의 가르침에 의문이 생겼고, 결국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당 문에 게시하게 된다. 종교개혁의 도화선이었다. 루터가 반박문을 통해 강조한 핵심은 무엇인가. ‘회개’다.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 4:17)고 말씀하신 것은 회개가 삶 전체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반박문 1조)며 “회개하라는 말씀을 사제에 의한 고해성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2조)고 강조했다.

이러한 회개는 세리의 비유(눅 18:13)에 나타나 있으며, 마태복음 21:29, 32; 27:3과 누가복음 17:4(너희가 회개하노라)에도 나타난 듯하고, 고린도후서 7:8-10에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다. 천체는 하늘이 정해 준 길을 따라 운행한다. ‘욕망’을 뜻하는 ‘desire’는 ‘천체(天體)’를 의미하는 라틴어 ‘sidus’와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뜻하는 전치사 ‘de’의 합성어다.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숭고한 길을 모르고, 엉뚱하게 주변 사람들과 경쟁한다. 돼지를 치던 탕자는 세류(世流)에 빠져 욕망의 화신이 된 자신이 죽게 되었다고 탄식한다. 그는 아들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아버지를 떠나 죄를 지은 것을 통탄하고 아버지 집을 찾아 나선다. 그런 행위가 ‘회개’다.

회개란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마다 뒤따라오는 것으로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돌이킴, 즉 회개는 사람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다. 범죄한 인간이 마지막 순간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그는 심판이 아닌 긍휼과 사랑의 손을 내미신다.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중재자의 중요성은 출애굽기 32:12-14과 아모스 7:3, 6에 강조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언약에 신실하지 못할지라도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다.

오래 사용하지 않은 컴퓨터는 하이버네이션(hibernation), 즉 겨울잠에 해당하는 최대 절전 모드에 들어간다. 반복된 삶과 인생은 우리를 ‘지적 절전 모드’에 빠지게 한다. 어떻게 하면 깊은 ‘겨울잠’에 빠진 뇌를 다시 깨울 수 있을까? 전원 스위치도, 리셋버튼도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탕자처럼 자신 믿고 있던 것들만으로는 더 이상 현실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혼란에 빠져야 한다. 고집을 깨뜨릴 기회다. 세상이 예측 불가능해지는 순간 뇌는 다시 현실 설명과 미래 예측이라는 ‘본업’에 충실해진다. 그것이 회개다. 시편 51편의 다윗의 회개에서 회개의 네 가지 측면을 탕자의 입장에서 보게 된다. 과거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이해, 아버지를 생각하는 진지한 열망, 아버지의 집에 품꾼일지라도 가야 하겠다는 열망 그리고 거지꼴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행동 등이다.

 

2. 회개하면 진노의 날에 보물을 쌓게 된다

구약과 유대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회개를 가능케 한다는 데 동의했다(신 30:6). 하지만 이 원리는 일단 주어진 그 은혜에 반응해야 하는 인간의 책임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를 요청하는 것일까. 그들이 피조물로서 또한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상대로 돌아오라, 즉 슈브하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청은 특히 바벨론 포로 생활 이전의 선지자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목적으로 삼은 것은 죄의 용서가 아니라 회개의 촉구다. 회개는 당시의 유대교에 중시되고 있었다. 바울의 가르침에는 미미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마 이것은 회개라는 말이 당시 흔히 의미하던 것보다 더 강한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선지자들은 참된 회개에 해당하는 특별한 단어를 만들어내지 않고 돌아옴(return)을 나타내는 상용어 슈브를 대신하여 사용한다. 이 단어에는 나쁜 길에 빠진 후에 되돌아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선지자들이 말하는 돌이킴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즉 하나님 뜻에 맞는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을 무조건적으로 인정하는 것(호 6:1 이하; 렘 34:15), 둘째, 모든 인간적 도움과 모든 거짓 신들을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셋째, 불경건한 모든 것으로부터 얼굴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백성들의 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그들로부터 비슷하게 돌아서며, 언약적 저주를 내리신다고 제시된다. 그러나 이 저주의 궁극적인 의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한 번 회개시키는 것이다. 아모스 4:6-11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서 내리시는 물의 재앙, 곡식의 재앙, 전염병의 재앙, 성이 무너지는 재앙을 내리신다. 하나님의 재앙은 사악하거나 보복적인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즉 회개(슈브)로 이끌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종종 ‘진노의 날’ 또는 ‘주의 날’에 대해 언급했다. 이 날은 하나님이 법정에 심판자로서 앉으셔서 그분의 공의대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이다. 유대인은 자신을 위해 영원한 상급을 쌓아 두는 대신 오히려 자신을 위해 종말론적 진노를 쌓아 두고 있었다. ‘쌓다’에 해당하는 ‘θησαυρίζω’(데사우리조)는 거의 언제나 좋은 것에 적용되는데 여기서 반어적인 것인 듯하다. 데사우리조라는 동사가 보통 의미하는 바는 ‘값진 보물’을 쌓다는 것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유대인의 선행 때문에 그들이 얻을 미래적 지복(beatitude)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동사는 반항적인 죄인이란 자신을 위해서 축복이나 생명을 쌓는 것이 아니라 진노를 쌓는다는 역설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Martin Luther가 95개조 반박문 가운데 56~68조는 천주교회의 ‘보물 이론’을 비판한다. 당시 천주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성인들이 쌓아올린 공적을 교회의 보물이라고 불렀다. 교황은 이 공적들을 가지고 성도들의 죄를 사할 권세를 가졌다. 루터는 죄사함의 권세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반박한다. 교회의 보물은 하나님이 주신 복음뿐이다.

유대인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는 것은 회개하지 아니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함으로써, 바울은 유대교의 전승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유대교 전승은 인간이 순종할 수 없는 것은 할례 받지 못한 것(신 10:16; 렘 4:4) 혹은 완악한 마음에 두었다. 초기 기독교에 정통한 Alan Kreider는 ‘회심의 변질’에서 초대교회는 3가지 B가 수반되었다고 분석한다. Belief(신념), Behavior(소속) 그리고 Belonging(행동)이다. 3B에 걸친 변화가 뚜렷했기에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다른 이들을 회개시킬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당대 교회 성장의 열쇠가 됐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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