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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마을로 이사 오신 하나님 1, 2 』

『 우리 마을로 이사 오신 하나님 2 』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 한 때는 기원전 1290년경입니다. 지금부터 약 3천 3백 년 전입니다. 모세가 애굽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출발하게 된 출애굽은 순조롭게 진행 된 일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바와 같이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정된 일입니다. 애굽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 하자는 모세의 제안을 처음부터 거부하였습니다. 애굽에서의 그들의 삶이 고역의 삶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살고 있던 애굽의 고산 땅은 매우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노예나 다름없는 애굽에서의 삶을 생각하면 당연히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가나안 땅은 고센에 비하면 농업이나 목축에도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따라서 모세의 출애굽 제의가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출애굽에 동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애굽에서의 삶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출애굽은 애굽에 머물러 사는 것보다 몇 배 위험한 것이었기에 모두가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출애굽이 단순한 모세 자신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시고 제시하신 길이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하였습니다. 그 설득에 10가지의 재앙이 동원되자 애굽의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출애굽이 결행되었습니다.

출애굽이 시작되었지만 이스라엘의 앞길은 첩첩산중이었습니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출애굽 길에,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앞서 가시며 인도하시는 길에 또 한 번의 아찔한 위기의 순간이 닥쳤습니다. 바로가 변심하여 이스라엘을 추격해 온 것입니다. 진퇴양난의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앞서 인도하시며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기적적 홍해 도하 사건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구원하시고 바로에 대해서는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이 초 자연적인 사건의 어마어마한 규모와 상징성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을 보았고 찬양하였습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은 여러 차례 위기의 순간들을 맞게 되었고 그 때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인도와 보호로 시내 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사이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인도자 모세가 나타나지 않자 불안하여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금송아지)을 만들었습니다. 백성들과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 앞에서 먹고 마시며 뛰놀았습니다. 모세는 그 사건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무마하기 위해 중재하였고 그 사건을 일벌백계로 다스려 하루에 3천명을 처형하였습니다. 

그 사건이 있은 직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그 수많은 기적을 경험하고도 불안해하자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집을 짓고 그들과 함께 거주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집인 성막을 지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성막으로 이사를 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의 약속이 실제적으로 이우어진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셨지만 이스라엘의 어리고 연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성막으로 이사를 오셔서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전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이제 성막 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임마누엘의 이 상징성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지었던 성전에 그대로 적용되었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임마누엘의 최종적 성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인 임마누엘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보다 더 확실하게 보여 줄 다른 계시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이 하나님 백성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불기둥과 구름 기둥, 성막과 성전은 모두 임마누엘을 가시적으로 확증해 주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들을 돌보고 지키신다는 뜻이고, 그들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은 그들 스스로는 가야 할 길과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분별력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그들의 안전보장이라는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진중에 거하신다는 사실이 이스라엘에게 실제적으로 위로가 되는 것은 그 어떤 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은 그것이 곧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한미동맹으로 어느 정도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군사력과 경제력으로는 중국이나 러시아나 북한이나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억제하거나 막아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미동맹 하에서 미군이 대한민국에 주둔하는 것은 어떤 나라가 대한민국을 침략하는 것은 곧 미국을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공격하는 나라는 미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그 어떤 국방력보다 한미동맹이 가장 확실한 안전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실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만약의 경우 한미동맹이 파기되고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게 되었을 때 일어나게 될 일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중국, 러시아, 일본, 그리고 중국이 뒤를 봐주는 북한의 침략을 절대로 예방할 수도 막아낼 수도 없습니다.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사라지는 날 독도, 울릉도, 제주도, 동해, 서해는 물론 본토까지 처참하게 유린당할 것은 명약관하 합니다. 한미동맹이 확실하면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군의 수와 전력은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단 한 명의 미군이 주둔해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안전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한미동맹이 흔들릴 경우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군의 수와 전력이 아무리 강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맹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미군은 전쟁이 일어나도 동맹국을 위해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을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전쟁 중에도 철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맹국은 물리적이고 전략적인 지원보다 신뢰를 튼튼하게 구축하고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지금의 한국 정부의 한미동맹에 대한 태도는 국제관계나 동맹 관계에 대한 초보도 모르는 무지 때문이거나 아니면 고의적으로 동맹 관계를 깨고 적의 편을 드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한미동맹 관계에서 우리가 미국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맞지도 않습니다. 미국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대한민국과 다를 바가 없지만, 미국이 세계 제일의 초강대국이고 패권국가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국제 관계에서 이 사실을 무시하는 나라는 한 마디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철없는 나라입니다. 북한이 바로 그런 나라인데, 북한 다음은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초강대국과 잘 지내고 무엇보다 좋은 동맹 관계로 지내는 것은 그 어떤 경제력이나 정치력보다 탁월한 정책이고 정치 외교적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이 비록 일방적인 언약이기는 하지만 언약의 의무규정은 지엄합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율법이 이 언약의 의무규정입니다. 임마누엘의 언약이 영원히 파기되지는 않겠지만 그 언약의 당사자들이 의무규정을 어겼을 경우 실로 무지막지하고 처참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 언약의 의무 규정을 어기다가 70년 동안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한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참혹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구약의 역사를 읽어보면 외세에 침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지만 외세의 침략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참으로 어리석은 외교적 판단과 선택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편에 서야할지 애굽의 편에 서야할지를 몰랐기 때문에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으며 그것은 곧 국가적 운명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이나 지금의 대한민국이나 국제 외교 관계에서 어느 나라와 동맹을 맺고 가까이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고 지혜의 문제입니다. 국제 관계에서 어느 나라와 동맹을 맺을 것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문제와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문제가 어렵고 까다롭기가 비슷합니다. 이스라엘이 외교 관계에서 어느 나라와 동맹을 맺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의무규정을 성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려운 외교 관계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 원인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의무 규정을 어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빛으로 오셨다 하였습니다. 빛은 어둠을 밝히고 비추는 것입니다. 빛은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의 의무규정을 지킴에 있어서도 잘 못 이해하고 그릇된 판단을 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 빛은 영적 문제일 뿐 아니라 정치 외교 관계에서의 지혜로운 판단이나 경제적 올바른 정책이나 개인의 일상에서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하고 비춰주는 빛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보편 가치 질서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질서를 따라 선택하고 판단하도록 하시지만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제시하시는 길이 합리적이지 않고 과학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합리와 과학과 심지어 보편적 가치까지 뛰어넘는 길과 방법을 제시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럴 경우에도 우리는 절대적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인정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물론 우리의 일상이나 역사까지도 논리와 합리를 초월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경우 빛이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빛은 어둡고 혼란스러운 모든 것을 밝혀주기도 하지만 잘못되거나 병든 것을 고치고 치료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빛은 생명의 에너지이고 생명 자체입니다. 이 빛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생존을 가능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처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황상하 목사

『 우리 마을로 이사 오신 하나님 1 』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성경이라 함은 구약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구약 뿐 아니라 신약을 포함하여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입니다.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기독론이라고 합니다.

기독론,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심오한 진술은 요한복음 1장 1-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리와 신학의 역사에서 기독론에 대한 수많은 논쟁이 있어왔지만 요한복음 1장 1-14절이 가장 확실하고 심오한 결정적 진술입니다. 그 내용은 신학적 이론이나 합리적 방식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을 포함하고 있어서 자유주의자들이 이성적으로 수용하지 못할 뿐이지 기독론의 진수는 그 안에 명확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따르는 한계가 성육신을 통해 극복되었습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하였는데, 여기 “거하시매”의 헬라어 에스케노센(ἐσκήνωσεν)의 본래의 뜻은 “천막을 치다”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의 배경을 가진 용어인데,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위해 구약에서 가져와 사용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 “천막을 치다.”라는 에스케노(ἐσκήνω)라는 단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장막을 치다”또는 “성막을 치다.”라고 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요한은 이 깊고도 심오한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쉬운 문장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요한의 학문이나 문장 실력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지혜입니다. 훌륭한 선생은 어려운 내용을 쉬운 말로 설명합니다. 성령은 가장 탁월한 선생입니다. 그래서 요한으로 하여금 이 어려운 내용을 쉬운 문장으로 기록하게 하였다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본문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쉬운 문장으로 기록을 하여도 그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역시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쳤다는 뜻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장막이란 곧 거주의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마치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장막을 친 것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집을 짓고 사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친 장막이 바로 성막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막에 대한 지시는 매우 자세합니다. 출애굽기 25장에서부터 성막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들을 가지고 성막을 만드는데, 수를 놓는 사람, 장색, 목수, 석수 등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기술로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성막에 임재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오셔서 함께 사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막에 거하심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게 되었다는 것이 요한복음 1장 14절의 설명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더 쉽게 “우리 마을로 이사 오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해 보았습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초월자 하나님이 왜 굳이 이스라엘 가운데 마련한 장막에 오셔서 거하셨을까요? 그렇게 하시지 않아도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분이시고 또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보다 긴 안목으로 원시적인 구속사의 지평에서 바라보면 그렇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이지만 또 한 편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불신과 인식의 한계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데,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는 불안했습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왜곡하는 것이기에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금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게 엄격하게 금지한 계명을 어겨가면서까지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을 추구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입니다. 그 사건이 심각한 죄가 되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진멸하시려 하자 모세가 중재하여 진멸은 면하였으나 모세는 레위 족속을 불러내어 방자한 이스라엘을 죽이라고 하여 그 날에 3천명이 레위인들의 칼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이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오늘날 우리도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려고 하고 또한 보이는 하나님으로 왜곡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아예 이스라엘 진 가운데 장막을 치고, 이를테면 이사를 오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보이는 장막 가운데 오셔서 사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장막이 성막인데, 그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막 가운데 세워졌습니다. 성막이 완성되자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성막 위에 나타났고 그것에 따라 이스라엘은 머물기도 하고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성막을 바라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당신께서 그곳에 임재하시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치시고 보여주셨습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말라는 교훈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려고 하거나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거듭된 당부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었고, 심지어 모세조차도 출 33:18절에서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하였지만 하나님의 대답은“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고 하셨습니다.

신 4:15절은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고 하였고, 신 4:16-18절은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새의 형상이든지, 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하였으며, 그 뿐 아니라 하늘의 일월성신이나 그 무엇도 섬겨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그 외 모든 것은 피조물인데,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이라고 섬기게 되면 창조주를 피조물로 왜곡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은 엄격히 구별됩니다. 이것에 대한 혼동을 하나님께서는 엄격하게 금하셨습니다. 성막은, 너희가 비록 나를 보지는 못하지만 내가 너희들 중에 한 장소를 정하여 거기에서 너희와 함께 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장막 중에 거하신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성취이며 또한 약속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그들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진행하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한 곳에, 어떤 때는 며칠을 머물기도 하고, 몇 달을 머물기도 하고, 몇 년을 머물기도 합니다. 머무는 기간은 얼마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미리 계획된 스케줄에 의해 떠나고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머물고 떠나는 문제는 이스라엘이 의논할 문제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시에 따랐습니다.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면 머물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머물 때는 장막을 치는데, 아무렇게나 장막을 치는 것이 아니라 각 지파를 따라 동서남북으로 지역을 나누어 장막을 쳤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막 한 가운데 성막을 쳤다는 사실입니다. 성막을 한 가운데 두고 백성들이 사방으로 장막을 쳤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은 그들의 장막 문에서 누구나 성막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그들의 동네 중앙에 하나님의 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집을 드나들 때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 성막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그들의 마을에 계신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만질 수 없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웃이 되셨습니다. 이웃만이 아니라 지도자, 사령관, 주인, 왕, 또한 아버지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장막에 거하신다는 것은 은혜요 복이지만 또한 두려운 면이 있었습니다. 성막 안에는 아무렇게나 드나들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성별 된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조심 없이 성막에 들어갔다가는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성막 안에 지성소가 있고 지성소 안에는 범궤를 두었습니다. 법궤는 극도로 거룩하게 구별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옮길 때에도 엄격한 규정을 따라 아무나 메거나 접촉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규정을 무시하다가 참변을 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거룩하게 구별된 법궤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왜곡하거나 침범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지 그 자체에 마술적 신통력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수행할 때 법궤를 앞세우고 나가서 승리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법궤 자체의 신비한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신실하게 순종하고 법궤를 앞세울 때는 전쟁에서도 승리하고 견고한 여리고 성도 무너뜨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법궤를 메고 전쟁에 나갔다가 참패를 당하고 법궤까지 빼앗기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건이 바로 하나님 우상화에 대한 경고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법궤나 십자가나 기도를 앞세운다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삶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라 순종할 때 그러한 것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을로 이사를 오셔서 우리와 물리적으로 가깝게 지내신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너무도 감사하고 고마운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이지만 그것을 영적 갑질을 해도 된다는 것으로 오해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황상하  joseph19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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