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전문가칼럼
【종그니칼럼】 '그 날' 과 '새 날'

【종그니칼럼】 '그 날' 과 '새 날'

사람들은 왜 너 나없이 사랑 받기를 바랄까? 모태에서 부터 사랑속에서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은 아닐까? '말씀'속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라'하셨고, 어느 노래 가사도 사람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노래하고 있지요. 아니 어찌 보면 사람뿐만이 아니고,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태생적으로, 사랑안에 살고 싶은게 본성이지 싶다.

행복 또한 마찬가지다. '행복한 모습'은 시각 장애자에게도 보이고, 시기와 질투로 가득찬 이의 눈에도 보이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눈에도 보인다.

우리 요양원에 임종을 앞둔 이가, 한달이 멀다하게 있어, 그 죽음의 마지막을 종종 보게 되지만, 죽음을 앞두고 죽음을 준비하는 이는, 아주 드물다. 길거리 장사를 해도 하루장사를 마친 후엔, 그날의 결산을 할 줄은 알면서, 인생을 마감해야 할 순간에도, 결산을 할 줄 모르는 이들!

문득 사도행전 6~7장에 나오는 스데반집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비오듯 쏟아지는 돌팔매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있음에도, 그의 얼굴이 공포에 질린 모습이 아니라, '천사의 얼굴' 이었다 고 성경은 증언한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는 그런 절박한 상황속에서도, 자기를 향하여 날라오는 돌덩이를 본것이 아니라, 천국 문을 여시고 두팔을 벌리시고, '이제 나에게로 오라' 부르시는 주님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인생의 겨울을 앞둔 추수의 날,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 때, 인생은 가장 아름답게 물든다. 옛 선인은 "소문 만복래(笑門 萬福來)'란 말처럼, 웃는 얼굴엔 재앙도 비껴 간다. 옛날 한니발과 나폴레옹은, 몽블랑의 알프스를 넘어 적의 허를 찔렀듯이, 운명에 체념하지 말고, 운명을 뛰어 넘자!

받는 기쁨은 짧고, 주는 기쁨은 길다. 왤까? 이를 알고 싶으면 실천해 보라! 내가 쓸 것을 남에게 양보 할 때, 물론 내가 쓸게 작아진다. 그러나 이 것은 산술적 계산이다. 삶의 질의 행복지수는 산술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주는 기쁨의 희열'을 아는  사람만이 누리는 축복이다.

많은 이들이, 내가 삶에 여유가 있다고 생각 한다. 난 그 말에 동의 한다. 내가 살아가는 기쁨 중에 가장 큰 기쁨은, 내게 찾아온 인생의 벗들을 만나는 기쁨이다. 난 아무리 힘든 때에도 친구를 만나면, 그 순간, 모든 힘든 일들이 다 녹아 버린다.

어떤 이는 가난을 물리치고자 가난과 싸우고, 어떤 이는 돈을 붙들고자 돈과 싸운다. 가난과 싸워 이기는 사람은 많으나, 돈과 싸워 이기는 사람은 드물다. 왜냐하면 돈은 잡히지 않는 세월과 같아서, 이 호주머니에서 저 호주머니로, 돌고 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세월과 돈은 붇잡는 것이 아니고 유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응원과 격려는 넘어지지 않고 달리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달리는 사람에게 내미는 손이다.

책 속에는, 내가 살아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선험(先驗)의 세계가 담겨 있기에, 배움의 보고(寶庫)다. 조선때의 이황(퇴계)은 "고인이 나 못보고 나도 고인 못보되, 고인이 남긴 유고를 통하여, 그와 만난다"고 하였다.

옛글에

"적서이유자손(積書移遺子孫) 미필자손능진독(未必子孫能盡讀), 적금이유 자손(積金移遺子孫) 미필자손능진수(未必子孫能盡守)."
"만권서적을 자손에게 물려준다 한들, 그 자손이 능히 다 읽지 못할 것이요, 억만금을 자손에게 물려 준다 한들 그 자손이 능히 지키지 못할 것인즉"
그러므로, 

"불여적음덕어 명명지중, 이위자손지계야(不勵積蔭德於冥冥之中, 以爲子孫之戒也)" 남의 눈에 보이지 않게 덕을 많이 쌓는 것이, 자손을 위한 가장 지혜로운 방책이다."하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읽지도 않을 자손에게 만권서적을 물려 주는 것은, 개 돼지에게 진주목걸이를 달아주는 것과 같고, 수많은 재물을 모아서, 받을 그릇이 못되는 자손에게, 물려 주려는 것 또한, 밑 없는 독에 물을 붓고 있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라는 것이다.

신앙의 바탕은 '깨달음'이다. 때문에 깨달음이 없고, 잃어버린 나를 찾지못하는 신앙은, 바른 신앙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도의 길이를 재지 않으시고, 기도의 깊이를 보신다.

요셉을 보라! 그의삶이 얼마나 진중했는가! 그는 환경이나 처지를 돌아 보지 않았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 하였다.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삶과, 천금같은 시간을 낭비하는 삶은, 삶을 아는 자의 삶이 아니다.
진실을 잊은 친구에게 삶의 귀감이 되라! 요셉은 자기를 버린 열 형들에게 삶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기에 자기 희생이나 사랑이 없는 삶은, 모두 다 시간을 낭비하는 삶이다.

이전부터 지녔던 세속의 마음을 비울 때, 비로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 찾게 된다. 말씀이 나에게 살아있는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이 자신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자신의 허물과 잘못된 습관이 비로소 보일 때,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믿음이 아니겠는가!  

굽은 길을 바로 잡아가는 것은, 되어가는 사람이고, 세파에 물든 심령을 탁류에 더럽힌채 두는 이는, 자신을 다스릴 줄 모르는 사람이다. 왜 예수를 닮지 못하는가? 발에 신고 있는 옛 것, 즉 나와 한 살이된 옛 습관을 잘라 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인생을 눈에 들어 오는 것으로 살고 자 하는 이가 있고, 눈에 들어 오는 것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살고 자 하는 이가 있다. 그것은 황금의 빛이,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애욕의 불꽃이, 마음에 검은 그을음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으로 사는 사람이라야, 몸과 맘이 하나로 될 것이다. 삶의 진수를 잃으면, 삶의 맛도 잃는다. 

욥기서 23장10절에서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되어 나오리라."

새해 새 날개를 펴자! 그래서 가장 황홀한 빛갈로 물들이자!

김종근 목사

【종그니칼럼】정반합(正反合)과 상생(相生)

우리 말에 '오만(五萬)말을 다한다' 또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난다'는 말이 있다. 즉 '온갖 잡 생각이 다 난다'는 뜻이다. 또는 자기변명을 잡다하게 늘어 놓을 때, '오만말을 다 씨부리고 있다'고 도 한다.

그런데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에 5만가지 정도의 망상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유명한 타임즈 잡지사가 1990년대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간은 하루에 4만8천여가지를 생각하는데 21세기가 되면 5만가지 이상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5만 가지 생각 중, 4만 9천 가지 이상의 부정적인 망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 이러한 통계는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불평하는 마음, 만족하는 마음보다는 불만족한 마음, 존경하는 마음보다는 시기 질투 하는 마음, 신뢰하는 마음보다는 의심하는 마음, 기쁜 마음보다는 섭섭하거나 야속한 마음, 남을 칭찬하는 마음보다는 헐뜯는  마음, 원망, 심술, 짜증, 불평, 불안, 초조, 아상, 자존, 자탄, 망념 망상등이 앞서있는 때문일 것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맡고, 입으로 내뱉는 말 모든 것에 사사건건 시시비비를 따지고, 간섭하는 일에, 마음의 에너지를 다 소모해 버리니 이것이 바로 '마음의 과소비가'가 아닐까? 

특히 오늘 이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는 소위 선택받은 이들의 모습이 아닐까?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끝도 한도 없이 빗어내고 있는 오늘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인성이나 감성은 간곳이 없고 일등제일주의, 권력과 돈의 만능주의가 싹쓸이를 하고 있는 작금이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 이젠 먼 옛이야기가 된지 오래다.

자유 자본주의의 반작용으로 서구처럼 실질적 평등을 주창하는 사회주의가 태동되었다면, 이 두 주의가 커피와 설탕처럼 상호 보완관계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이념으로 찢껴진 오늘 날, 이 두 이념이 서구처럼 보완관계가 되지 못하고, 견원관계 라는데 있다. '너죽고 나죽자' 또는 '너죽고 나살자' 이다. 이것은 남북관계만이 아니고, 동서지역간, 세대간, 노사간, 여야간의 모든관계가, 망라적으로 긴장관계에 놓여있다. 왜 이렇게 우리의 사회상이 상대방과의 상호보완이나 협력관계가 아니고 적대관계내지 흑백논리가 만연한 투쟁관계가 되어버렸는가?

'우리'라는 공동체개념은 사라지고 치열한 경쟁관계가 빚어낸 나만의 이기주의 내지 개인주의, 즉 '나홀로의 관계'가 사회 깊숙히 자리잡은지 오래다. 청와대와 검찰이 그러하고, 국회의 여(與)와 야(野)가 그러하고, 노사간의 관계(勞使間 關係)와, 세대간의 관계, 아니 종횡으로의 모든 관계가 그러하다.

가정도 예전엔 '스몰공동체'라했는데, 이젠 이마저 사라져 가고 '나홀로'의 독신세대'가 우리 중심에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상생은 사라지고, 정치를 비롯하여 우리사회의 전 분야에서, 사생결단의 파열음만 어지럽게 난무하고있다. 초아(超我)도 없고, 상생(相生)도 없다, 오로지 전부(全부)가 아니면 전무(全無)만 있는 흑백논리뿐이다.

옛날 조선 중기 숙종때, 재야에서 입문한 허목(許穆)과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이야기가 있다. 당시 요즘의 여야처럼 사색당파가 우심할 때에 허목과 송시열은 요즘으로치면 여(與)와 야(野)의 관계로, 서로 으르렁거리는 긴장관계였다.
그때 서인의 수장이었던 송시열이 중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있게되자, 송시열은 남인의 수장이던 윤선도가 죽고, 그 뒤를 이은 허목(당대의名醫)에게, 장남을 보내어 자기병의 처방을 부탁했다. 그러자 허목은 그 처방에 비상 칠푼을 넣어 처방을 지어 주었다. 이를 지켜본 송시열의 장남은 허목이 자기 부친을 죽이려한다고 예단하고, 아버지 송시열앞에서 허목이 극약인 비상을 넣었다고 노발대발 하자, 송시열은 '바로 그 처방이 내 병에 맞는 처방이니 그대로 약을 달여 올리라고 분부한다.

송시열이 허목의 이 처방약으로 회복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국사를 논할땐 치열했지만, 모든 국사를 푸는 결론이 서로 다를수 있음이, 상생의 관계임을 서로 잘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송시열의 병은 창자에 노폐물이 가득차 있어서 비상이 칠푼에서 1푼만 낮아도 안되고, 1푼만 높아도 창자에 극약이 닿으므로, 허목의 이 처방이야말로 얼마나 절묘한 처방인가! 이것이 상생(相生)의 정치(政治)다. 네(野)가 있어야 내(與)가있다는 상생의 정치(相生之政治)인 것이다.

선거법도 그러하고, 공수처법도 그러하다. 얼마든지 이마를 맞대면, 정말 멋진 합의안을 낼 수 있고, 또 그래야 '살아있는 법 을 탄생시킬 수 있음에도, 법의 찬반논쟁의 2분법내지 흑백논리에 매몰되어 버리면, 그래서 법의 진정성이나 타당성이 결여되어 버리면, 국회는 식물국회가 되거나 통법부가 되어 그 존재가치가 설 곳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법은 '합의의 산물'이어야, 살아 있는 법이 되는 것이다. 국회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옥동자의 법을 낳아야, 마땅히 있어야 할 국회로 자리매김 될 수 있음에도, 의회의 운영이, 상생의 국정, 상생의 합치를 이루어내지 못하면, 두고 두고 나라의 혼란만 야기하는 악순환의 단초만 만드는 꼴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은 법의 선후와 완급을 정해서, 적재적소에 꼭 있어야할 법을 제정해야 함에도, 항상 당리당략에 사로잡히게 되면 국회가 있어야 할 명분과 실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국회가 시대를 선도하지는 못할지언정, 시대를 거슬려 역린을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소중하면 남도 소중하고, 나의 권리가 소중하면 남의 권리도 소중하다.

지난 2007년 5월 12일, 경북 상주시 사벌면 상주박물관옆 야산에, 암소장례식이 상주시장과 상주시민 200여명이 참석한가운데, 의로운소(암소) 누렁이 장례식이 거행되었었다. 사벌면 묵상리에 사는 임봉선씨가 암소 누렁이를 길렀는데, 이 내외는 밭으로 일하러 나가면, 아랫 집에 홀로 사는 김보배할머니가 와서, 이 누렁이 소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고 한다. 김보배할머니가 1993년 5월 13일 노환(당시 85세)으로 돌아가시자, 할머니집에서 약3Km정도 되는 야산에 묻혔다.

그런데 할머니 장례를 치른 다음날 소(누렁이)가 없어졌단다. 온종일 찾다가 혹시나 하고 이웃 할머니가  묻힌 무덤엘 같더니, 아니 누렁이가 할머니 산소 앞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더란다. 그후 이 소를 죽을 때까지 주인이 길렀는데,
2007년에 5월 11일, 누렁이가 죽을 때가 되자, 아랫집 김보배할머니 사진을 보여주니, 사진을 혀로 두어번 핥고는 이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요즘 이 누룽이만도 소통이 안되고 상생도 모르는 위정자들이 대한민국호의 여야의 키를 잡고 있다. 이를 어찌해야 소통하는 인간들이 될까?

난 1965년 은사님이 서울로 올라오라해서 유학을 왔는데, 은사님은 삭월세 단칸방에 사셨다. 그 방 한칸에 은사님의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 그리고 나, 다섯명이 자야했다. 이처럼 방 좁은 것은 동거할수 있지만, 속 좁은 인간들과는  쌈박질만 있다. 작금의 정치행태가 그러하다. 2019년 끝날에 이 글을 부친다.

김종근 목사

 

김종근 목사  webmaster@bonhd.net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종근 목사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