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눅 6:1-11]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마 12:1-14; 막 2:23-28, 막 3:1-6).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었다(1절). 그 행동을 본 바리새인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정죄했다(2절). 예수께서는 다윗의 예를 들면서(3-4절),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다(5절). 

그리고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시며 안식일의 목적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고 정의하셨다(9절). 그리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다(9절). 선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과 생명의 회복과 충만이다. 안식일에 죄사함(인자가 오신 목적은 죄를 사하기 위함)과 생명 회복이 충만해야 한다.

공경태 박사, 본헤럴드 편집위원

2. [눅 6:12-19] 12제자를 사도로 세움(마 10:1-4; 4:23-25; 막 3:13-19). 예수께서 자기를(인자)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과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규정하셨다. 그리고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고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했다(12절). 그리고 날이 밝자 제자들을 불러 그 중에서 12을 택하여 사도(apostle)라 칭하셨다(13절). 사도는 “부르심을 입은 자”가 아니고, 예수께서 제자들 중에서 구분하여 세운 유일한 직분이다(extraordinary office).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평지에 서시니, 제자의 많은 무리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받으려고 사방에서 모여 있었다. 귀신들린자, 병든자들은 예수를 만져 예수의 능력으로 나으려고 노력했다(18-19절). 우리 번역(개역개정)에서는 “말씀도 듣고”로 번역해서 부정적인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데,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수께 나온 자들은 말씀에 관심이 없고 예수의 어떤 능력으로 자기 상태를 변화시키려 하고 있다(19절). 그러나 예수의 능력은 오직 말씀, 믿음에 있다. 혈루증 여인이 군중 속에서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옷깃을 만져 치료받은 역사와 전혀 다른 유형이다(눅 8:43-48. 막 5:25-34).

3. [눅 6:20-26] 제자들을 세우고 복과 화를 정립. 예수께서 12제자를 사도로 세우셨다(13절). 그리고 평지에서 제자들을 향해서 복과 화를 가르치셨다(20-26절).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가 복이 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욕을 얻은 것이 복되다(21절, 마태복음 8복과 비교). 인자로 말미암아(on account of the Son of Man!) 악하다 평가되며 버림을 받는 것은 복이다(22절). 그 날에는 기뻐하고 뛰놀아도 된다. 그것은 상이 크기 때문이며 선지자들은 그렇게 했다(23절). 그러나 인자를 외면하면서 배부른 자 -> 주릴 것이며, 웃는 자는 애통할 것이며,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24-26절). 거짓선지자들이 그렇게 했다(26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제시하셨다. 핵심은 인자, 예수로 말미암아 혹은 예수를 외면하고 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이름이 전파되기만 하면 어찌되었든지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외쳤다. 그리스도인은 선지자와 사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받아 “인자로 말미암아” 산다.

4. [눅 6:27-38]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께서 말씀을 듣는 무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며,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명령하셨다(27절).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다(28절). 사랑할 자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도 하는 사랑 방법이다. 주의 자녀는 사랑할 자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 주의 자녀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아버지의 자비를 입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내 놓으시며 원수인 우리를 구원하셨다.

비판하지 말라(37-38절). 비판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취할 자세이다. 그러나 비판할 직분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있다. 직분을 따라 비판을 할 때 주의하여 직무를 수행함으로 모두에게 유익을 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비판하는 직무를 가진 지체를 존중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5. [눅 6:39-49] 들보를 빼고 행하라. 마태복음에는 5~7장에 걸쳐 길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누가복음은 더 축약적으로 기록했다(20-49절). 산상수훈에서 주님이 강조하신 것은 율법을 회복하고 완성시키는 구도이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고(27, 35절),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도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상을 얻지 못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비판하지 않아야 한다.

예수께서 복과 화를 규정하시고(눅 6:20-26) 원수를 사랑과 비판금지를 가르치셨다(눅 6:27-38). 그리고 비유로 종합하셨다. 참고로 우리 설교에서 비유를 말하고 설명하는 방식인데, 예수께서는 먼저 설명하시고 비유를 말씀하셨다. 첫째, 예수께서 사용하신 비유는 맹인이 인도하는 것(거짓 교사의 가르침)이다(39절). 그리고 제자가 선생보다 높지 못함을 제시하시면서, 온전한 제자는 선생과 같이 됨을 제시하셨다(40절).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거짓교사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이다. 찬탈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다고 증명하는 것이다. 루터는 면죄부를 판매하는 행위를 그리스도보다 더 높은 능력을 행사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둘째 사용하신 비유는 눈 속에 있는 들보(the log)이다. ‘들보’가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는 어휘인데, 문자적 번역은 ‘통나무’이다. 눈 안에 들보가 있는 자가 타인의 눈에 티가 있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럼에도 티를 빼라고 주장하는 행위를 한다. 들보를 뺀 뒤에 형제에게 티를 뺄 수 있을 것이다(43절). 우리는 앞에서 비판하는 직무가 있다고 제시했었다. 비판하는 직분자의 눈에 들보가 있을 때에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다(43절). 좋은 열매 맺는 나쁜 나무가 없다(참고 마 7:16). 마태는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힌다고 제시했다. 누가는 좋은 열매를 맺히는 나무는 좋은 나무라는 것이다. 원리적으로는 마태의 제시가 옳지만, 실재적으로는 누가의 제시로 가야한다. 그래서 야고보의 제시인 “행위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이 종합적인 표현이다(약 2:17). 죽은 믿음은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믿음이 없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것은 못된 나무이다. 선과 악의 열매는 입에 있는데,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표현된다(45절). 사람이 혀를 제어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성취해야 할 과제이다(약 3:1-12).

예수께서는 듣는 자들에게 합당한 행위를 요청하셨다(46절, 참고 계 1:3).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 믿음에 기초한 행위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삶이다(46-49절). 집을 지을 때 기초는 깊게 파야하는데, 집의 크고 넓고 높이에 비례하여 깊게 파야 한다. 주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준행하는 것이 복이 있다. 그러나 그 반석 위에 집을 짓지 않으면 무너져 파괴될 것이다(49절). 반석은 오직 예수이고, 베드로(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탁류가 있을 때에 집이 없다면 무너짐이 없을 것인데, 기초없는 집이 있다면 무너짐이 더 심각할 것이다(49절).

6. 전능하신 하나님, 인자이신 주 예수를 믿습니다. 죄를 사하시고 복된 안식과 생명을 주시니 고맙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사도를 세우시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거기에 진리의 보화를 주셨으니 잘 유지하겠습니다.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듣고 그대로 준행하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에 분별을 더하사 보다 거룩하고 합당하게 순종하며 준행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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