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물음

황금돼지가 사라지자 흰 쥐가 등장했다. 일곱째 천간인 경(庚)과 첫째 지간인 자(子)가 합쳐진 경자년(更子年) 새해를 맞이하여 독자 모두에게 축복의 마음을 건넨다. 더욱 건강하고 삶과 사역, 그리고 영혼과 가정과 생업에 두루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풍성키를 기원한다. 조국이 하나님의 보호 속에 대약진을 이루게 되기를 갈망한다. 새해의 아침이 더 밝은 것도 아닌데 괜스레 마음이 들떠지는 것은 시작이 주는 설렘 때문이다. 늘 살아온 세월이지만 새해 벽두에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숙고해본다. 이전보다는 모든 면에서 더 낫고 진전된 모습을 보이길 원하는 마음이다.

인간은 왜 사나?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사나? 이런 통속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각양각색일 것이다. 인간과 삶을 이해하는 척도가 사람마다 다른 만큼 경우의 수에 해당하는 대답 또한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정답이라 할 만한 내용도 없다. 삶의 이유나 목적은 수학공식처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명확히 읽을 수 있다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 수 있다면, 이 땅에서 내 남은 날이 얼마인지 알게 된다면 어떤 형태로든 삶은 지금과 많이 달라지리라. 더 진지하고 갈급하며 더욱 진실 되고 알차리라.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은 가진 자나 갖지 못한 자나 매한가지다. 삶은 유한하기에 더욱 그렇다. 죽음의 순간이 찾아오면 실낱같이 이어오던 호흡이 잦아들며 바람 빠진 풍선처럼 생명은 일시에 푹 꺼진다. 세상을 하직하는 많은 주검들을 목도하며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덧없음을 절감한다. 그것이 가까운 친지나 가족일 경우에 그 느낌은 더욱 강하고 질기다.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인생의 의미에 대해 묻고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을 고민하게 되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당연한 반응이다.

 

메뚜기 같은 인생들의 이전투구(泥田鬪狗)

다윗이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라 기도했을 때 그의 중심에는 어떡하든 하나님을 위한 최선의 삶을 살려는 충정이 있었으리라 보인다. 즉각적인 깨달음이 오자 다윗은 연이어 고백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시 39:5) 너무 짧고 신속히 날아감으로 있는 곳조차 알 수 없는 게 인간의 생명이다. 풀잎 사이로 뒷발을 튕겨가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메뚜기나 이슬 같은 것이 인생이다.

채근담의 한 구절이 기억난다. “돌이 부딪혀 일어나는 빛 속에서 길고 짧음을 다투어본들 얼마 되는 세월이며(石火光中 爭長競短 幾何光陰), 달팽이 뿔 위에서 승패를 겨루어본들 그 세계가 얼마나 크겠는가!”(蝸牛角上 較雌論雄 許大世界) 인생이 덧없으니 다투고 싸울 필요가 없다는 교훈이다. 문제는 그렇게 얘기하고 그렇게 이해하면서도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여전히 피터지게 싸우며 뭔가 차지하고 누리며 간직하려고 안달복달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생각 이상으로 미련하고 고집불통이다. 남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일 때 누구나 더욱 욕심 사납고 안하무인이다.

 

동반자보다 경쟁자가 득실거리는 생의 전장(戰場)

인생이 무엇이며 왜 사는 것인지에 대한 본질적 질문에 근접함 없이는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방법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다. 아무리 힘쓰고 애써 노력하지만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인생의 여러 수수께끼 같은 현안들이다. 현실의 벽은 높고 단단하다. 인생의 전장(戰場)에는 동반자보다 경쟁자들로 득시글거린다. 더 생생하게 표현하자면 우군보다 적군들로 가득하다. 화살처럼 지나가는 시간도 내 편이 아니다. 만만치 않은 삶에 지친 사람들은 자연히 보다 쉬운 길을 모색한다. 세상에는 성공노하우나 행복길라잡이 같은 인생의 영양제가 범람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인생은 풀어야 할 과업이며 피할 수 없는 싸움이며 중도에 포기할 수 없는 질주다. 해답이든 정답이든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찾고자 배움의 길을 이어간다. 배우고 익히는 학습의 대장정을 훑어간다. 심장이 멎지만 않았으면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운다. 손이 피곤하여 칼에 붙기까지 적들을 도륙한 용사 엘르아살처럼 투혼을 불사른다. 달리다 지쳐 주저앉으면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간다. 과연 삶이란 아무렇게나 살 수 없는,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되는 고귀한 의무로서 살아있는 모든 인간의 어깨에 부과되어 있다. 생존한 인간은 삶의 주체로서 자신의 길을 간다.

 

역경을 극복한 J-J-J축

삶에는 요행이나 우연과 같은 요인이 있지만 그것들은 인생을 형성시키는 결정적 요인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생성되는 무수한 환경의 입자들은 인생의 작은 모서리까지 스며들어 한 사람의 삶을 이룬다. 마치 고정된 운명이 있어 인간의 미래를 옭죄는 것 같아 보여도 실은 인간의 본성은 얄궂은 운명보다 강하다. 운명에 무릎 꿇는 이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운명을 비웃으며 오히려 운명의 방향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선회시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운명은 고난도의 장애물이지만 오뚝이나 시시포스의 집념으로 단련된 허들러(hurdler)는 질주를 계속한다.

요셉이나 욥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전형적 예에 속한다. J-J-J 축을 이룬 이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역경과 고난과 십자가를 극복해 형통과 전화위복과 부활의 신기원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우리 주변에는 소위 역경을 극복한 위대한 인간 정신의 표본들이 있다. 만신창이가 된 육체에 갇혔지만 스티븐 호킹의 정신세계는 우주를 넘나들었다. 삼중고의 시련을 딛고 고귀한 신앙 가치를 구현했던 헬런 켈러, 언어장애와 자폐증을 극복하고 명상적인 작품으로 독자들을 감동시킨 헤르만 헤세, 슈퍼맨의 신화를 실화처럼 살다 16년 전에 타계한 크리스토버 리브 등이다.

 

최종의 선에 이르는 인생 굴곡

고달픈 삶을 반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나 자신의 일생이 평탄하게 펼쳐지기를 바란다. 행복한 인생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는가? 그들의 지난 삶에도 굴곡은 있었다. 사실 삶은 어떤 면에서 공평하다. 겉보기에 완벽한 삶을 보낸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속을 들여다보면 녹록치 않은 환경에 처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아무리 불행한 사람에게도 행복 한자락 정도는 펼쳐졌다. 행복과 불행, 기쁜 일과 슬픈 일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 마냥 인생 도처에 깔려 있다. 달과 지구의 인력 때문에 생기는 밀물과 썰물처럼 인생의 낮과 밤은 서로 등을 맞대고 있다.

바울은 인생뿐이 아니라 신앙에서도 이런 일이 불가항력적임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믿는 자에게는 바라는 행복과 원치 않는 불행의 모든 요소들이 들쭉날쭉하면서 결과적으로는 궁극적 선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맞이할 결국은 선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중요한 사실은 열매로 거둔 선이 매양 선으로만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정에는 많은 악도 존재한다. 악이 득세하고 불행이 가득한 것 같던 상황이 당시로는 감당키 어렵고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런 것들이 있어서 최종적인 선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 선 존재로서의 자각

인생의 가치는 행, 불행에 의해 측정되지 않는다. 성공과 만족은 삶을 보다 편안하고 풍요롭게 할 수 있지만 살아갈 이유로는 한참 부족하다. 인간다운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척도는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느냐의 여부가 더 결정적이다. 자기실현보다 으뜸 되는 것은 존재 천명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창조된 피조성을 인정함 없이는 삶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기 어렵다. 나만이 살 수 있는 인생을 내게 부여한 분을 인식함 없이 목적 있는 인생을 살기란 불가능하다. 인생의 사명은 ‘하나님 앞에 선 존재’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비로소 제 모습을 보인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삶의 주체로서 인간이 지닌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전체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우주와 비견될 만한 유일한 가치를 함유한 개인은 만유의 중심을 이룬다. 화려하게 포장된 모든 외피를 벗겨내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그림자로서 가만히 살펴보라! 일상의 삶을 부지런히 매일같이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은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사람 값어치를 하며 사는 삶속에 지워지지 않는 삶의 의미가 있다. 완성을 지향하며 무언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극광의 오로라 같은 신비로움이 있다.

 

오늘을 긍정하는 생존의 은혜

비범하게 태어났다 해서 비범하게 살다 비범하게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듯 평범하게 태어났다 해서 평범하게 살다 평범하게 삶을 마감하는 것은 아니다. 소위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에 비유된 인간의 다양한 삶이 존재함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한 차별이 현실적임도 부인할 수 없지만 사람의 아들딸로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인간은 존귀하고 불멸의 가치를 지닌다. 도로변에서 휴지 줍는 노인에게서 인간을 보지 못하고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철제 계단을 오르내리는 건설노무자에게서 인간을 보지 못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그들이 없으면 세상은 불완전하다.

모진 환경에 지쳐버린 마음이지만 오늘도 삶을 긍정하는 힘은 숨 쉬며 호흡하는 생존의 은혜 까닭이다. 병들어도, 실패해도, 어렵고 외로워도 좌절과 죽음을 거부하는 의지는 살아있음이 그만큼 귀하기 때문이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나 숱한 경험이 축적되었지만 여전히 삶은 풀기 어려운 난제와 같다. 권면과 위로라는 말로 힘겨워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지만 본인 역시 인생의 고달픔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의 심정이랄까? 아픈 만큼 성숙해서일까? 여전히 자신의 문제로 고민하면서도 힘들어하는 이웃을 외면할 수 없음은 연민보다 강한 어떤 감정이리라.

 

소박한 갈망과 소소한 즐거움

한번밖에 살 수 없는 생인 줄 알면서도 후회스런 일을 거듭하는 것은 고질적인 미련함 때문은 아닌지 저어된다. 올해는 뭔가 새로워지길 원한다. 그래서 몇 가지 소박한 갈망을 목록으로 남긴다. 혁신의 채찍질을 가해서라도 매일의 삶을 깔끔하게 정돈하며 가꾸어가고 싶다. 때때로 화에 묶여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히는 악습에서 벗어나고프다. 맛난 음식보다 좋은 음식을 즐기며 적당한 운동으로 몸을 다스리고 싶다. 이유 없이 나누며 간혹 먼 길 떠나는 여유도 누리고 싶다. 여전히 배우기 즐겨하는 사람들과 보람된 시간을 공유하며 우정의 모포에 포근히 감싸이고 싶다.

기도하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며 성경을 더더욱 깊이 묵상하고 싶다. 신실한 종들을 발굴하는 기쁨을 키우며 다듬어 획득된 영적/지적 자산을 전하고 싶다. 사방을 두루 살피며 객을 접대하던 아브라함의 안구를 이식받기 원하며, 팔순 고령에도 영적 푸르름을 잃지 않았던 갈렙과 다니엘의 영혼을 답습하고프다. 천국 사모의 열정을 배가시키며 주님 사랑의 마음을 더욱 충만케 하고프다. 기도의 골방나들이가 잦아지기 바라고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지나 엔게디에서 에네글라임까지 소성시키는 강물로 내 영혼이 범람되기 원한다.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며 살아가고 싶다.

 

하루 단위로 충일하게 사는 삶

이 작은 소원들에 큰 의지를 담아 사랑하는 이들을 더욱 포근히 감싸며 보람 있는 일을 더불어 만들어가련다. 준비된 원고에 첨삭의 공을 들여 죽은 활자에 생명을 불어넣으련다. 아내와 덜 다투고 늦사랑의 푸근함을 나누련다. 시린 삶을 녹이고 아픈 삶을 싸매고 지친 삶을 쉬련다. 오랫동안 찾지 못했던 기도원 순례의 길도 트고 전신에 파편처럼 박힌 은혜의 찬양들을 부르련다. 야트막한 산길도 더듬고 해변 백사장에 이내 지워질 것이지만 추억어린 발자국을 부지런히 심으며 둘레길이라 할 수 없는 트레일 코스를 밟아보련다. 해야 할 일에 의미를 부여하며 삶을 일구리라.

앞으로 살아야 할 시간은 이미 보낸 삶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옛날이 그리워지는 만큼 미래가 기대되는 것은 이 순간의 삶을 결코 허투루 보내지 않겠다는 다짐 덕분이다. 사실 우리가 실질적으로 누리는 것은 현재의 삶이다. 가장 지혜롭고 안전한 삶은 하루 단위로 충일하게 사는 것이다. 어떤 후회나 안타까움을 남기지 않으려면 수면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진실과 성실함으로 임하는 것이다. 사랑하기에도 너무 짧은 시간이니 미워할 시간이 있을까? 행복을 조각하기에도 부족한데 불행의 씨앗을 뿌릴 이유가 있을까? 아니라면 현재를 붙들라!(Carpe diem)

 

삶의 주체는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순리

살아있는 매순간을 기꺼워하며 천금을 주고서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 육체는 고귀한 영혼을 담은 그릇이기에 더없이 소중하다. 작은 것에 충성치 않으면 큰 것에도 충성할 수 없듯 육체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영혼을 소중히 여기기 어렵다. 영혼과 육체가 상충하는 영적 경험에서 무엇을 먼저 위할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생명의 기운을 돋우는 일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 오늘을 어제로 보냈듯 내일도 오늘처럼 맞이할 것이라 당연히 여기지 말고 가슴 떨리는 기대와 감격 속에 미래의 현관에 들어서도록 하라! 오늘만이 내 날이다.

가는 세월 붙들지 못하고 오는 백발 막을 수 없다면 나를 중심으로 오가는 만물의 운행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유유자적함이 지혜롭다. 믿는 자에게는 뒤집어버리고 싶은 운명이란 존재치 않는다. 만사는 때를 따라 흐른다. 결국 가장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무한히 많은 집합들이 어지러이 흩어져도 교집합이 있듯, 울고 웃으며 사랑하고 미워하며 잃고 얻는 등 인간의 모든 경험은 신묘막측한 과정을 통해 전능자의 섭리를 이룬다. 역천자(逆天者)가 망하고 순천자(順天者)가 흥함은 만고의 진리다. 삶의 주체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인정함이 순리다.

하나님은 무한히 넉넉하시고 그의 자비와 긍휼은 끝 간 데를 모를 정도로 무궁하다. 하나님과 다투지 않음이 최고의 순종이라면 내 삶을 허락하신 그분을 기뻐하며 다른 그 누가 아닌 바로 나다운 나를 지으신 그분의 선한 의지를 찬양함은 피조물 된 우리의 영광이요 책무다. 자기 백성을 버려두지 않으시는 왕이신 하나님, 자신의 자녀를 끝까지 살피시는 아버지 하나님, 종의 형통을 누구보다 기뻐하시는 주 되신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이끄신다. 에녹처럼 동행이 어렵다면 그림자처럼 따를 일이다. 2020년을 허락하셔서 경이로운 삶을 일궈가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한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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