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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칼럼】 죄가 없으시면서 죽으신 예수님은 아름다워라【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42) 무죄(innocence)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무죄한 예수와 빌라도의 판결

좋아하는 것과 타당한 것은 구별된다. “그 사람이 한 달에 한 번도 안 씻지만 나는 그가 좋아.” 개인의 취향이다. “나는 한 달에 한 번도 안 씻지만 청결한 사람이야.” 자기합리화다. 자신이 믿는 것과 실제 현상 간에 괴리가 발생하면 이를 일치시키기 위해 자기합리화를 시도한다. 불결한 사람을 좋아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불결한 사람을 청결하다고 공적으로 주장하면, 많은 이들이 분노할 것이다. 못생긴 사람을 좋아할 수는 있다. 못생긴 사람을 미남이라고 주장하면 돌봐줘야 한다. 죄 있는 사람을 좋아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짓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일 죄가 없는 사람을 죽이자고 달려드는 것은 정신건강을 체크해야 한다. 타당하지 않다. 답정너다.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판결을 듣고서도 죽이고자 달려드는 유대인들은 답정너와 다르지 않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라는 식이다. 일방통행식 행위나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비꼴 때 쓰는 말이다.

예루살렘 사람들과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죄할 아무런 적절한 근거를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고 시위를 한다. 유대사회같이 도덕 기준이 너무 높은 사회는 위선자를 양산한다. 정치가 정책 대결이 아니다. 선악의 대결이다. 상대편은 죄인이고 위선자다. 자신들의 입으로 예수님은 죄가 없다, 즉 무죄하다하면서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사실 무죄는 죄책으로부터 자유하고 흠이 없고 깨끗하고 의롭다는 것을 말한다. 무죄함을 추구함은 성경의 중요한 주제다. 무죄함은 본래 인류의 상태였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상태를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영혼의 갈구를 다루고 있다. 죄가 없고, 흠이 없고, 순결하고 거룩하고 무죄한 것은 인간의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부르짖음이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설명하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고 외친다(히 7:26).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재판하는 동안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들은 여전히 빌라도에게 그를 십자가에 목 박아 달라고 외쳤다. ‘사람을 죽이는 다섯 가지 방법’에서 영국의 시인 에드윈 브록(Edwin Brock)은 학살에 중독된 인류를 질타한다.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이는 성가신 방법들은 많다./ 언덕 위로 나무판자를 나르도록 한 후/ 그를 거기에 못 박을 수 있다.” 첫 연에서 시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다룬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살해하면서 인류는 잔인함으로 치닫는 길을 연다.

『Christ in front of Pilate』, Munkacsy(1884-1900)

 

1. 예수님에게 죽일 죄를 찾지 못하다

오고 가는 세상에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신 자가 누가 있는가. 하늘보다 높이 되신 예수님 외에 누가 있으랴. 로마 법정에서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하기 전에 700년 전에 이사야가 이 사실을 보도하였다. 예수님의 관심은 자신이 죄가 없으며, 자신을 고발하는 자들이 죄를 찾지 못한다는 것에 두지 않고,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으며 이방인의 손에 결국 죽게 되는 것에 올인하였다. 예수님은 이런 겪을 때에 자신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부당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과 같이 취급당하는 야훼의 종의 역할을 완수하는 자로 자신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사 53:12; 눅 22:37).

예루살렘 사람들과 관리들은 예수님에게 죽일 죄를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고 떼를 썼다. 이 부분을 인터넷 기사라고 가정해보자. 기사는 ‘예수님에게는 죽일 죄를 찾을 수 없다’이다. 이 기사 밑에 댓글이 줄을 선다. 사람들의 관심은 기사일까. 댓글일까. 예루살렘의 최대 기사였던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가 아니라 베스트 댓글에 먼저 눈길을 준다. 죄가 있느냐 없느냐는 fact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이 기사를 대하는 사람들의 댓글이 인기를 끈다. 죄가 없으면 무죄인데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고 국민청원을 올리고 결국 사형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예루살렘 사람들과 관리들은 예수님에게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했다.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빌라도에게 처형을 요구했다.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의 인지부조화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기피하는가 하면 자신의 믿음에 부합하는 정보에 애써 기대려 한다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에 예수님은 아무런 대응이나 자기변호를 하지 않으신다. 재판에서는 취향을 넘어선 공적(公的)인 판단이 필요하다. 김소연 시인은 언젠가, “저는 언젠가 수정하더라도 항상 견해를 가지려고 노력합니다.”라고 한 적이 있다. 취향을 넘어선 자기합리화가 일정 정도 타당성을 얻어, 마침내 상대를 설득하고자 할 때 비로소 견해라는 것이 확립되기 시작한다. 즉, 견해를 갖는다는 것은, 곧 어느 정도 상대에게 비판적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견해가 분명한 분이다. 얼마든지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 있다. 무고를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에 대해 일체 변호를 내려놓으신다. ‘죽일 죄가 없는 자를 죽이자’는 것은 유대인의 주장과 생각이다. 예수님은 그 생각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대한 생각’을 하신다. 이것을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한다. ‘탈맥락화(Dekontextualisierung)’다. ‘탈맥락화’는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철학에서는 ‘자기 성찰’이라 하고, 미술에서는 ‘추상(Abstraktion)’이라고 한다. 메타인지란 쉽게 풀면 ‘자기 생각을 보는 눈’을 의미한다. 재판관이 무죄라고 말해도 방청석에서 핏대를 올리며 유죄를 외치며 죽이라고 여론몰이를 한다. 빌라도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니며 죽이자고 덤비는 대중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시고 인류의 역사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에게 있다. 이것을 예수님은 생각하신 것이다. 이제 끝이구나 하고 그들의 외침에 주눅 들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에 대한 생각, 즉 메타인지를 한다. 그 순간 예수님은 이사야 53:7절 말씀을 되새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곤욕을 당하고 괴로움에도 입을 열지 않으시고 불의한 재판을 받으셨다.

『The Sacrificial Lamb』, Josefa de Ayala(1630-1684),

예수님은 죽음을 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고 자신의 죽음을 인류를 위한 화목제물로 이해했다(막 10:45). 부당한 재판이고 자신은 희생물이라고 항변하지 않으셨다. 옛 언약에서서 드렸던 희생 제물을 대신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막 14:24). 반면 갈릴리나 예루살렘 혹은 그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과 같은 반대자들의 눈에 예수님은 죄가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참람자요(마 9:3; 막 2:7; 눅 5:21), 거짓증언을 하고(요 8:13), 백성들에게 세금을 내지 않도록 선동한다고(눅 23:2) 비난하였다.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예루살렘 주민들과 관리들은 합법성의 잣대가 아닌 물신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물신성이란 특히 돈이나 권력의 지배 아래 본연의 인간성을 상실하고 그들을 우상 숭배하는 것이다. 여기에 눈이 먼 그들에게 죄 없으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고, 죄가 없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2.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다

바울의 설교는 예수님이 말한 말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에 관한 것이다. 그의 말이나 행동에 흠이 없다거나 실수가 없다 또는 찾을 수 없다가 아니라 그 분 자체가 ‘죄가 없으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분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전한다. ‘선포하시는 분이 선포된 분이 되었다’는 말은 본질적으로 사실이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국회에서 기자 간담회를 자청해 자신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 대해 해명했다. 사실 관계가 틀리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답변이 상당수였다. 야당은 “거짓과 회피만 가득한 회견이었다”며 ‘the fact-check’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예수님은 기자 간담회를 자청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무고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5에 있는 것과 같은 4개항으로 된 그리스도인의 고백을 소개한다. 그 첫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십자가를 나무에 해당하는 ‘ξυλον’(크쉴론)라고 표현한 것은 십자가와 신명기 21:23과 관련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택한 혁명의 도구는 이념이나 사상이나 군중집회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이다. 사람을 통제, 억압, 조종, 박해하는 권력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권세를 사용하심으로 예수님은 구원을 완성하셨다. 예수님은 권력의 악순환을 멈추는 힘은 더 강력한 권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으심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권세를 사용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새롭고 살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우리 심장은 당파적(黨派的)이고 귀는 편파적(偏頗的)이다. 여기에 더해 신념을 증폭하는 반향실 안에 있다고도 한다.

그들은 집단이성인가? 집단광기인가?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만수르 올슨(Mancur Olson)은 ‘집단행동의 논리’에서 이해집단의 파워가 사회 전체의 이익을 해친다고 갈파했다. 중대한 사안이나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면 우리는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아 해결하려고 한다. 소수의 뛰어난 개인이나 전문가의 능력보다 다양성과 독립성을 지닌 집단의 지성이 훨씬 더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에 의지하는 것이다. 집단지성과 집단광기는 한 긋 차이다. 편견 끼면 집단지성은 집단광기로 변한다. 유대인들은 죄가 없는 사람을 죄 있는 자로 의사결정의 과정에서 결정을 내리고 집단 밖의 상이한 의견을 배척하는 집단사고에 빠진다. 군중의 감정이 일정한 선을 넘어서면 강력한 야수로 돌변해 법치를 붕괴시킨다. Henry D. Thoreau는 “대중은 결코 최고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 오히려 최저 기준으로 자신을 끌어내릴 뿐”이라 했고, Friedrich W. Nietzsche는 “집단에서는(…) 광기가 곧 법”이라 했다. 하지만 꿀벌은 집단 지성의 거대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승희 목사  titeiosle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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