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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람성경] 누가복음 8 장. 예수 가르침의 권위. 창조주와 구속주 하나님

1. [눅 8:1-3] 예수 사역의 동조자 여인들. 예수께서 성(城)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도하셨다. 12제자가 동행하면서 악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쳤다. 이 사역에 막달라 마리아,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등이 자기 소유로 헌신하며 섬겼다(3절). 복음 사역 원리는 순수한 의도와 함께 자기 소유로 헌신하는 조력자가 있어야 한다.

2. [눅 8:4-18] 예수의 비유(씨뿌림과 등경, 마 13:1-23; 막 4:1-25). 예수께서 비유(밭의 비유)로 말씀하셨다. 비유는 일부러 못 알아듣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자 하는 자들만 깨달을 수 있게 하시는 방식이었다(9-10절). 그래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셨다(8절). 즉 비유의 목적은 이해를 돕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선별하는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 비유의 목적을 적응(accommodation)으로 보는 것은 성경에서 제시하는 목적과 전혀 다른 제시이다. 그리고 비유를 그 당시 청중들이 이해했을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도 바르지 않다. “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막 4:12)고 예수께서 비유의 목적을 말씀하셨다. 마태복음에서는 감추인 것을 드러내려고 하신 것이다(마 13:34-35, 막 4:33-34).

씨를 뿌리는 비유의 내용(눅 8:4-8)은 첫째 씨를 뿌리는 자와 열매를 거두는 자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좋은 땅이란 무엇일까? 결국 씨 뿌린 자에 의해서 기경된 밭일 것이다. 씨 뿌리는 농부는 씨 뿌리기 전에 기경(起耕)한다. 씨 뿌리는 자에 의해서 길, 돌짝, 가시떨기, 좋은 땅에 씨앗이 떨어졌다. 씨 뿌리는 자는 길, 돌짝, 가시떨기에 씨를 뿌리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씨를 뿌릴 때에 좋은 땅 밖에도 씨가 뿌려진다는 것이 특이하다. 일반 농경법으로 보기 어렵다. 농부는 씨앗이 길에 떨어지면 주어서 밭으로 옮길 것이다. 예수께서 비유의 종결에서 좋은 땅은 정직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것(15절, 계 1:3)이고, “스스로 삼가라”고 말씀하셨다(18절).

누가는 씨 뿌리는 비유와 등경 비유를 결합해서 한 가르침으로 제시하는 것 같다. 좋은 땅의 결실(8, 15절)과 등경의 빛은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좋은 땅(선하고 좋은 마음)에 떨어진 씨는 결실을 맺는데, 빛을 내는 등불 기능을 가진 것이다. 빛을 내는 등불은 주인이 반드시 등경 위에 두어 모든 사람이 보게 한다는 것이다(16절). 그럼에도 주께서 마지막 스스로 삼가라고 말씀하셨다. “들을 때”에 주의를 기우리도록 했다. 사람은 먼저 입력된 정보를 효과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입력된 정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처리하는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성경의 구도이다.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가르침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가식적인 선생의 가르침은 매우 위험하다. 듣는 자가 깊이 생각하고 사리를 분별해서 수용해야 한다. 전하는 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고 듣는 자에게 책임이 있다. 독약을 준 사람의 독을 먹으면, 준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먹는 사람이 죽는다.

누가는 씨뿌리는 비유에서 ‘마음’에 관심을 두는 것 같다. 씨가 마음에 뿌려졌지만, 길 가에 뿌려진 것이 빼앗기는 것이고(12절), 바위 위에는 기쁨으로 받지만 시련을 당할 때 배반하는 마음이고(13절), 말씀을 받았으나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결실하지 못한 경우(14절)이다.

3. [눅 8:19-21] 예수의 가족(마 12:46-50; 막 3:31-35).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보러 왔을 때(19절) 많은 사람 때문에 가까이 가지 못했다(19절). 어떤 사람이 예수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온 것을 알렸을 때(20절),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자기의 가족이라고 하셨다(21절).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 자기 가족을 선언하셨다(21절). 사도 바울은 예수를 맏형으로(롬 8:29)으로 제시했고, 사도 요한은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했다(계 1:3). 그런데 20세기에 등장한 새관점 학파 중 톰 라이트는 “아브라함의 가족”을 주장했다. 예수의 후손이 될 것인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새아담으로 예수를 지칭하며, 새아담의 후손을 말할 수 있는데 각별한 분별이 필요하다. 새아담으로 예수까지 맞는데, 새아담은 새인류를 말하기 위한 것이 새아담의 후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주신 구원은 새로운 에덴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천성을 본향으로 삼고 예수와 함께 정진하는 것이다.

4. [눅 8:22-39] 광풍 통제와 거라사 광인(마 8:23-34; 막4:35-41, 5:1-20). 예수께서 광풍을 말씀으로 통제한 역사와 거라사 광인의 말씀은 한 쌍으로 세 복음서에 등장한다. 그런데 마태와 누가는 광풍 통제에 대해서 매우 간략하게 제시했다(22-25절, 마 8:23-27; 막4:35-41). 마가는 이 부분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마가는 예수의 능력에 대해서 표현하려고 하고 있고, 마태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 누가는 예수의 인내와 구속의 길을 제시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바다의 광풍을 말씀으로 꾸짖어 잔잔케 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밝힌 것이다(24절).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 1:1-4에서 말씀(Logos)께서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전제하며 진행한다.

예수와 제자들은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 땅에 가셨다. 그 지역은 이방인의 지역이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과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사역하셨다. 이편은 유대인 지역이고 건너편은 이방인 지역이었고, 경제 교류가 활발한 지역이었다. 유대인 지역과 이방인 지역의 요구는 동일했다. 거라사 광인은 군대 귀신이 들려 인생이 비참해졌고 사회에서 추방되고 고립된 상태였다. 우리 시대에는 공황장애(恐慌障碍, panic disorder)라는 것이 있어 사회화에 주요 문제를 낳는다. 공황장애가 일상화된 현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거라사 광인은 사람들과 함께 거주하지 못하고 무덤 사이에 거주했다(27절). 거라사의 군대 귀신들은 자기를 무저갱으로 들어가지 하지 말도록 간청했다(21절). 예수께서 귀신들이 무저갱이 아닌 돼지에게 들어감을 허락하셨다(32절). 예수는 광인에게 있는 군대귀신을 돼지들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했는데, 돼지들이 바다로 들어가 몰살했다. 돼지(군대귀신)가 들어간 바다는 어제 밤 예수께서 잔잔케 하신 ‘그 바다’이다. 귀신, 마귀들은 아직 무저갱이 들어가지는 않지만, 하늘 자리에서 쫓겨날 것임을 제시하고 있다(계 12:7-17).

누가는 광인이 고침 받은 자와 대화한 것을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거라사 지역 사람들은 예수를 감당할 수 없었다. 예수는 고향 나사렛이나 이방 지역 거라사 지역에서 배척되었다. 거라사에 놀라운 기적을 펼치셨는데 배척당하셨다. 예수를 스스로 수용할 사람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의 일은 거라사(데가볼리) 성 안에 전파되었다. 초대 교회가 빠르게 복음이 확장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5. [눅 8:40-56]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여인(마 9:18-26; 막 5:21-43). 광풍 통제와 거라사 광인의 말씀은 짝이라면,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여인의 치유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더 뗄 수 없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도착했을 때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치료자의 왕림으로 생각했고,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 앞에 나가서 딸의 치료를 간청했다(41-42절). 예수께서 그 집에 가는 길에서 열두해 혈루증 여인이 옷술에 손을 데어 치료함을 받았다(44절).

예수께서 말씀하지도 않았는데 혈루증 여인은 치료를 받았고 구원을 받았다(48절). 많은 사람이 예수를 밀쳤지만(45절), 구원은 한 여인만 받았다. 회당장으로 집으로 가는 길에 딸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49절). 예수께서 회당장에게 믿기만 하도록 요구했다(50절). 그것은 예수께서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도록 요구한 것이다. 야이로의 딸은 죽었는데, 예수께서 살리셨다(55절). 야이로의 딸에게 구원이 선포된 것이 없지만, 혈루증 여인에게는 구원을 선언하셨다(48절). 예수는 생사를 결정하는 창조주이시고, 죄를 사하시는 구속주이시다. 베드로는 예수를 주(창조주 하나님)와 구주(그리스도, 메시아, 구속주 하나님)로 고백했다.

누가는 마태와 마가와 달리 두 번 반복하는 경우가 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기적과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기적이다. 죄사함의 권세가 있는 것도 두 번 반복했다(눅 5장, 눅 7장).

6. 전능하신 하나님, 주의 능력과 은혜를 보여주시니 고맙습니다. 주 예수를 믿음으로 영혼의 강건함을 주옵소서. 주의 길에 험난함이 있지만 내 십자가를 지고 주의 길을 가겠습니다. 아직까지 주께 돌아오지 않은 주의 자녀를 찾아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힘과 지혜를 주옵소서. 좋은 동역과 조력을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경태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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