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근래에 한국사회에서 기독교 평신도 지도자로 다방면에 모범적 삶을 보인 분은 이원설 박사이다. 그는 평생 역사학자로서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대학과 사회 각 분야에서 일한 영어가 유창한 국제맨이었다. 

정성구 박사와 이원설 박사

그는 1958년에 스스로 「미래이력서」를 작성했는데, 실제 그의 삶이 꿈대로 거의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미국의 명문 Case Western Reserve 대학에서 역사학 공부를 하고 철학박사(Ph. D)을 받으시고, Ohio Nostlen대 영문학 박사 그 외에도 10여개 대학에서 명예박사를 받았다. 
그는 1961년에 귀국해서 경희 대학교 역사학 교수로 오래 동안 부총장의 일을 했다. 그 후 그는 숭실대학교 재단 이사장, 기독교 학교연맹 이사장을 역임 했으며, 그는 한 때 34세의 나이로 문교부 고등교육국장의 일을 하기도 했다. 특별히 그때 그는 총신대를 정식으로 문교부인가 대학으로 만들어 주었다. 후일 그는 대전 한남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그 후에는 세계대학 총장 협의회 사무총장, 하가이 연구회(Haggai Institute)한국 지부장을 일하면서 5대양 6대주에 유창한 영어로 한국교회를 알리고 하나님의 나라 건설과 기독교 세계관을 알리는데 동분서주했다. 그는 특히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설교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25년간 Korea Herald의 칼럼 리스트였고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초극」등 여러 영문저서를 남겼다. 

그는 인조 때 무신이었던 이괄 장군의 후손으로서 덩치가 크고 우람하면서도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늘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후배와 제자들을 끔찍이 사랑하시는 어른이었다. 그의 강연과 연설을 들어 보면, 그 배후에는 항상 성경적 세계관과 복음이 들어 있다. 그것이 역사학자로서 그의 역사관 이기도 했다. 본인의 이력서에서나 저서에는 한 번도 밝힌바 없지만, 그는 본래 총신에서 신학을 공부했었다. 그는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과 칼빈주의 세계관을 터득했다. 그는 총신 4회(통합48회)에서 함께 공부했다. 비록 그는 총신에서 졸업장을 못 받았지만 그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원설 박사가 총신에서 공부했던 동창으로는 한 때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가장 큰 지도력를 발휘했던 증경 총회장이었고, 대전 중앙교회 담임 이영수 목사, 그리고 순교자 채정민 목사의 아들이요 <평화신문><기독공보><크리스챤 신문> <기독신문>등의 주필로 평생 기독교 언론에 종사하던 채기은 목사, 기독교 교육의 큰 족적을 남긴 김득룡 박사, 증경 총회장 안중섭 목사 등이 있다. 그래서 그는 평생 역사학자와 장로로서 살았지만, 그의 기초는 늘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었다.

이원설 박사가 경희대학교 교수시절에 총신대에서도 강의를 했다. 그 때 그는 우리에게 역사학이 아니고 사회학을 강의하러 왔었다. 1963년 내가 총신대 2학년 시절이었다. 그의 사회학 강의는 결국 토인비의 역사관과 기독교 세계관 입장에서 가르쳤는데, 그의 중후한 몸집 만큼이나 무게 있는 강의를 했다. 1963년 이 박사님은 사회학 강의 도중에 우리에게 학기 중 레포트를 내라고 했다. 그때 나의 사회학에 대한 레포트 제목은 <자살문제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었다. 얼마 후 크리스챤 신문의 편집국장 채기은 목사는 이원설 박사에게 크리스챤 신문 8면 증편 기념으로, 서울대학교 심리학 교수 장병림 교수, 대구 동산 기독병원 원목, 그리고 이원설 박사에게 당시 사회현상의 이슈로 되어 있는 자살 문제를 신문에 실을 논문을 써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런데 이원설 박사는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내가 가르치는 총신의 제자 학생 중에 나보다 더 우수한 논문을 쓴 사람이 있으니, 그 원고를 개재하라”고 추천을 하였다. 그래서 내 논문이 졸지에 서울대 장병림 교수 논문과 나란히 크리스챤 신문에 실리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신문에 글을 쓰게 된 최초의 작품이었고 그 때 내 나이 22세였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나는 일생 동안 부끄럽지만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에 수도 없이 글을 썼다.

내가 변변치 못한 글이지만 60여년 가까이 글을 쓴 것은 1963년 나의 스승 이원설 박사님의 추천 때문이었음을 잊지 않고 있다. 그의 학자로서 겸손과 제자를 키워주고 싶은 그의 마음을 늘 감사한다. 1976년 내가 화란 유학에서 돌아와서 총신대 조교수로 다시 복직된 후, 나는 이원설 박사와 함께 <하가이 인슈튜트(Haggai Institute)>에 회원이 되어 함께 일했다. 회원 중에는 각계 각층이 학자들이 함께 모여 기독교 세계관으로 발표하고 논의하는 것이 큰 추억이었다. 1980년대 초 내가 총신대 총장으로 있을 때, 이원설 박사는 국제 하가이 컨퍼런스에 나를 초청해 주었다. 미국 조지아주, 에틀란타 시내에 있는 마리오테(Mariotte)호텔 볼 룸에서 국제 대회가 열렸다. 그때 이원설 박사는 나를 또다시 하가이 박사에게 추천하면서, 한국을 대표해서 5분 동안의 스피치를 하도록 했다. 그 당시 나의 어눌한 영어 실력으로 세계인이 모인 자리에서 스피치를 하도록 나를 추천해주고 띄워주신 이원설 박사의 제자 사랑과 그의 도량을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스피치를 마치고 내려오자, 하가이 박사는 나를 향해서 “당신은 우리 미국사람보다 영어 발음이 더 정확합니다”라고 칭찬해 주었다. 역시 그도 관용과 포용의 세계적 대지도자였다. 

내가 1990년대에 총신대 총장대행을 할 때도 꽃을 보내시고 친히 총장실을 방문하고 축복해 주었다. 이원설 박사가 한 말 가운데 아직도 잊어지지 않은 명언 하나가 있다.
 “바쁜 목사는 나쁜 목사”라는 말이다. 목회자들에게 주는 따끔한 한마디였다.
나의 스승, 국제맨, 한국의 모범적 기독교 평신도 지도자, 역사학자이자, 기독교 세계관으로 역사와 세상을 바꾸고 교육하려던 이원설 박사를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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