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곡과 마곡 전쟁과 아마겟돈 전쟁

에스겔서의 곡과 마곡을 일단 제외하고 계시록 20장에 언급된 곡과 마곡의 전쟁 그리고 16장의 아마겟돈 전쟁은 두개의 다른 전쟁이다. 에스겔서의 경우에는 곡과 마곡의 전쟁이 정해진 소수의 국가 간에 일어나지만 계시록의 두 전쟁 곧 곡과 마곡 전쟁 그리고 아마겟돈 전쟁은 온 세계가 관련되어 있다. 에스겔서에 묘사된 곡과 마곡의 전쟁은 이스라엘을 침략한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엎드러지나 계시록의 곡과 마곡은 사방 백성 곧 세계적 규모로서 하늘의 불로 소멸되고 아마겟돈에 모인 천하 임금들의 군대들도 므깃도(Megiddo) 밑, 에스드랄론 평야에 싸우러 집결하지만 전쟁 가운데 나타나시는 주님에 의해 모조리 궤멸된다. 에스겔서의 곡과 마곡 전쟁도 큰 전쟁이지만 계시록의 두 전쟁 규모를 앞지르지는 못한다. 아마겟돈 전쟁에 대해서는 계시록 16장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를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여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대접의 재앙

여섯째 나팔을 불자 인류의 삼분지 일을 해할 네 천사가 유브라데에 결박되었던 상태로부터 풀려났다. 이만만의 마병대와 그 탄 자들이 세 가지 재앙(불, 연기, 유황)으로 인류의 1/3이나 죽였다. 그래도 생존자들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았다(9:13-21). 16장에 들어와 여섯째 대접이 유브라데 강에 부어지자 동방의 왕들을 위한 길이 예비된다. 악의 삼총사(용, 짐승,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더러운 영이 나와 천하의 임금들을 꼬드기고 아마겟돈 전쟁을 위해 모이게 한다(12-17). 사 11:15-16절에서는 유브라데 강이 말라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이 동방으로부터 돌아오게끔 한다는 예언이 실려 있다. 홍해 사건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하기 전에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요단 강물이 메말랐던 사건이 있었다(수 3:13-17; 4:23). 엘리야는 요단 강물을 갈라지게 하면서 건넜고 엘리사 역시 그 뒤를 따랐다(왕하 2:8). 유브라데 강의 마름은 이중에서도 홍해 사건에 가장 근접하다.

여섯째 대접은 이전의 대접들처럼 재앙이 드러나지 않고 다만 다가올 전쟁을 위한 준비 상황만 언급되었다. 여섯째 대접이 쏟아진 곳은 큰 강 유브라데였다. 유브라데는 창 2:14절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가 본 절의 언급으로 끝난다. 공교롭게도 여섯째 나팔을 불었을 때도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되었던 네 천사가 풀려남으로 인류 전체의 삼분의 일이 멸절당하는 재앙이 일어났다(9:14). 여섯째 대접이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아졌음은 큰 재앙의 전조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큰 강 유브라데”를 문자적으로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하느냐? 이다.

 

큰 강 유브라데 사건은 문자적이고 실체적 사건

여섯째 대접 재앙이 교회를 공격하는 불의한 세상 권력의 전진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는 상징적 해석(Lee)도 있으나 성경에서 강 이름이 지리적으로 정확하게 표기됨은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Walvoord)는 해석이 옳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넜듯이 전쟁을 위한 왕들과 그들의 군대가 지나가도록 강이 말랐다 함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만일 19:19-21절의 전쟁이 상징이 아니라 문자적으로 실제 전쟁이라면 이곳의 말라버린 강 역시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옳다. 홍해의 바닥이 마른 것이 상징이 아니라면 유브라데의 강바닥이 마른 것도 상징이 아니다.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계 16:12-16)

 

바벨론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

여섯째 대접 재앙은 여섯째 나팔 재앙과 내용상 유사하다(9:13-21). 두 곳에 모두 유브라데 강이 언급되었다. 여섯째 나팔 재앙 때는 이만만의 마병대가 나오는데 여섯째 대접에는 말라버린 유브라데 강에 동방의 왕들을 위한 길이 예비된다. 여섯째 나팔 재앙에는 마병대의 입에서 나온 불과 연기와 유황의 “세 재앙”이 있었는데 여섯째 대접의 재앙에는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들이 각각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다. 여섯째 대접에서는 바벨론에 대한 심판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룬다. 예언자들은 자주 유브라데 강의 메마름에 대하여 예언했다(사 11:15; 44:27; 렘 50:38; 51:36; 그리고 슥 10:11 참조).

특히 고레스가 태어나기 150년 전에 행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고레스가 실제로 유브라데의 마름을 이룰 자로 언급하셨다. 과연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 된지 70년 되었을 때 페르샤의 고레스 대왕은 난공불락의 바벨론 성을 함락코자 유브라데 강의 물길을 옆으로 돌려 낮아진 강물 수위를 이용해 성안으로 침투하는 작전을 성공시켰다.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사 44:27-28)

 

북방의 왕들과 대비되는 동방의 왕들

역사가 헤로도투스와 크세노폰의 기록에도 고레스대왕이 예상 밖의 도강작전으로 바벨론을 침공하여 구약 예언자들의 유브라데에 관한 예언이 실제적으로 성취되었음을 증거하였다. 바벨론 중앙을 통하여 곧게 흐르는 강물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고레스는 방어진이 너무 강해 정복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부대의 일부를 남기고 주력군을 강으로 데려갔다. 훌륭한 기술자의 재주로 일시적이나마 강의 물줄기를 호수 쪽으로 흐르게 만들었다. 강의 수심이 얕아지자 그 길을 마른 땅처럼 건너간 고레스의 군대는 바벨론의 견고한 방어진을 무너뜨려버리고 바벨론에 입성하여 함락시켰다. 마른 유브라데를 건너 모이는 동방의 왕들에 대한 해석도 쉽지 않다. 혹자는 동방의 왕들을 2억의 군사 동원이 가능한 중국군 중심의 동맹국 지도자라 해석하지만 억측이다. 이와 반대로 동방박사들이나 이사야가 자주 언급한 ‘동방에서 오는 자’와 연관하여 긍정적인 인물로 해석하는 입장도 있다. 만약 고레스가 동방의 왕들을 대표한 구원자라면 동방의 왕들은 19장에 언급된 천군을 이끌고 강림하실 백마 타신 그분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쉬운 적용은 아니다.

역사적 바벨론 제국에게 있어 “동방의 왕들”은 고레스와 그를 따르던 제후들이었다. 그렇다면 계시록에 그려진 바벨론에게 있어 “동방의 왕들”은 누구인가? 중동 지역에서 동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유럽도 배제되고 미국도 배제된다면 소련 연방도 해체된 지금에 와서 유일한 동방의 강국은 누가 있을 것인가? 이만만의 대군을 유일하게 확보할 수 있는 중국과 그의 동맹국들을 이름인가? 곡과 마곡은 전통적으로 북방의 왕들로 불리는데(겔 38-39장) 그들은 과연 북방의 왕들인가? 북방 왕 곡과 마곡의 군대는 단지 북방의 군대만이 아니라 “땅의 사방 백성”으로 이루어진 국제 규모의 혼성군이다(20:8). 그렇다면 “동방의 왕들”도 동방에 속한 통치자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에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고자 “온 천하 임금을 불러 모으는”(16:14) 국제 규모의 혼성군과는 다르다. 그것이 영적 군대이든 실질적 군대이든 고레스가 구원의 도구로 사용되었듯 “동방의 왕들”은 “온 천하 임금들”과는 달리 긍정적 세력이다.

 

심판 받을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뱈위드(Beckwith)는 네로 부활 신화와 연관하여 “동방의 왕들”을 네로와 파르티아인들의 로마침입으로 해석했다. 다시 살아나서 적그리스도의 역할을 맡은 네로와 동방의 왕인 파르티아인들에 의해 로마가 멸망하리라고 요한이 생각했을 것이라는 견해인데 뱈위드 자신도 이에 대해선 회의적 입장을 취했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네로가 죽고 20년이 흐른 후에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세 명의 가짜 네로가 환생을 주장하여 혹세무민하였다. 그 중의 한 명이 테렌티우스 막시무스(Terentius Maximus)인데 추종자를 거느리고 유브라데로 나아갔다. 파르티아의 왕은 그를 영접하여 로마 침입에 이용하려 했고 다시 보좌에 앉히려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동방의 왕들”은 네로와 파르티아인들이 아니다.

어쨌든 요한은 바벨론 패망의 역사적인 사건을 이용함으로 장차 땅에 임할 바벨론 세력의 붕괴를 그리고 있다. 물론 이 바벨론은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바벨론이 아니다. 유브라데 강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는 고대의 바벨론 제국을 찾으면 어렵지 않게 이라크, 시리아, 터키와 같은 현대 국가들의 이름이 이내 떠오른다. 유브라데가 상징하는 것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다(17:15). 바벨론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벨론은 “음녀요 음녀는 많은 물 위에 앉은 자요17:1)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다(17:18). 바벨론이 문자 그대로의 바벨론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의 모든 정치 체제요 경제 질서며 종교 현상이요 철학 사상이다. 하나님이 일체 배제된 하나님의 말씀이 거부된 인간 중심의 삶이다. 바벨론은 모든 나라를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하던 자다(14:8). 바벨론 붕괴는 이미 선언되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가시적이고 완벽한 바벨론의 멸망은 18장의 후반부에 가서 이루어지겠지만 서서히 파멸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바벨론의 아가미를 꿰어 멸망의 길로 이끌어 가신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영에 사로잡힌 거짓 선지자들

13-16절은 상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함께 소개되고 그들의 시도를 알려준다. 주님의 재림과 경성을 위한 경고의 말씀이 축복의 약속과 함께 주어진다. 사탄 자신과 정치적인 권력의 옷으로 가장한 정치 세력으로서의 적그리스도 그리고 거짓 종교의 탈을 쓴 거짓 선지자가 하나님의 대적자로서 그 모습을 분명히 한다. “거짓 선지자”의 사술과 허위와 기만은 이미 13:11-17절에서 알려졌다. 그의 존재 목적은 오직 하나다. 적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 역시 존재 목적은 하나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사탄을 영화롭게 함에 있다. 거짓 선지자들은 거짓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거짓을 서슴없이 행한다. 마음도 생각도 말도 행위도 거짓으로 가득차고 거짓으로 충만하다. 진실은 티끌만한 그림자도 끼어들지 못한다. 성경 안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걸어온 길이 명백하게 그려졌다(마 7:15; 24:11, 24; 막 13:22; 눅 6:26; 행 13:6; 벧후 2:1; 요일 4:1).

그들은 세속의 영으로서 교회 안에 들어와 어둠의 씨앗을 퍼뜨린다. 빛의 생명들이 자라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은혜의 역사를 봉쇄한다. 외부에서는 흉포한 공격성으로 내부에서는 회유책으로 교회의 생동력을 마비시키고 신자들의 영혼을 무력하게 만든다. 사탄도 적그리스도도 거짓 선지자도 모두가 인격을 지닌 영이다. “세 더러운 영”이다. 셋이지만 결국은 거짓된 한 영이다. 귀신은 사탄이 부리는 영이다. 그들은 수가 많고 잠시도 활동을 쉬지 않는다. 개구리는 본질적으로 더럽기에 더러운 영이라 불린다. 그들의 형상은 개구리 같은 모습에서 같다. “개구리”는 옛날 애굽에 내린 두 번째 재앙(출 8:2-11; 시 105:30)을 상기시킨다. 개구리는 초기의 재앙으로서 애굽인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지 않았지만 성경은 그들이 해로운 존재라고 밝힌다(시 78:45).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에 현혹된 세상

개구리는 해롭지 않으면서도 해로운 존재다. 해롭지 않은 것은 그들의 변장술과 기만의 결과로서 외형상 그렇게 보일 뿐이다. 해로운 것은 그들이 실제로 인간성을 파괴하고 영혼을 무력하게 만들고 영적인 무감각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독을 지닌 개구리들은 먹잇감에게 독을 뱉어 마비시켜 마비 상태가 풀리기 전에 잡아먹는다. 애굽의 술사들은 자기들의 술법으로 개구리 재앙을 재연시켰다. 하나님이 개구리 재앙을 통해 개구리가 지닌 속임의 상징을 보여주신 것이다. 술법사들의 속임은 애굽인들에게 재앙의 연속에 불과했다. 결국 개구리는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고 그로 인해 남도 멸망시키고 자신도 멸망당하는 영이다.

이 개구리는 사탄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존재할 수 있도록 기반을 이루고 그들이 활동하는 주 무대로서의 바벨론이다. 바벨론은 해롭지 않은 듯 보이면서 거주자들을 해하는 세속적인 체제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은 해롭지 않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면서 해로운 독성으로 그들을 죽게 만든다. 개구리의 ‘개골개골’하는 울음소리는 보통 까마귀의 ‘깍깍’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한 소리로 간주된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비관하는 소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들은 바벨론의 으뜸가는 거주자다. 거짓과 이적으로 세상을 현혹하여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사악한 통치 그룹이다. 바벨론에는 온갖 귀신들과 더러운 영들이 모여 있다(18:2). 영이 하는 일은 영적인 일이다. 성도를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지침 없이 꾀한다.

 

곡과 마곡을 현 정세와 맞물려 해석하는 위험성

에스겔서의 곡과 마곡은 여전히 신중한 해석을 요하는 내용으로서 종말을 사는 우리에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세계경영에 눈을 돌리도록 만든다. 곡과 마곡의 전쟁을 해석함에 있어 상징적이고 영적 의미에 무게를 둘 수 있지만 역시 성경 해석의 우선이 되는 문자적 해석이란 관점에서 예언적 실현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는 흐름도 예상 밖으로 강하다. 비록 문자적 실현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해도 예언이란 점에서 용의주도한 해석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곡과 마곡의 전쟁에 관한 자료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이 예언의 말씀 해석은 매우 신중하고 진지하게 접근되어야 한다.

특정인을 예언의 중심에 두고 세계의 현 정세와 연관하여 해석하는 추세는 심히 경계할 일이다. 역대 대통령들과는 달리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 트럼프 대통령의 파격적인 행보와 연관하여 그를 현대판 고레스라 칭하거나 하나님께서 종말 시나리오를 완결키 위해 세우신 느브갓네살 같은 하나님의 몽둥이 운운 하는 식의 해석은 아예 가지부터 제거해야 할 우스꽝스러운 시도다. 세계적인 반 유대인 정서, 증가 추세에 있는 유대인들의 고토 회복, 유대인의 정착촌 건설 열기, 제3성전, 주 이스라엘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 가능성, 유가 상승이나 하락에 따른 세계경제의 출렁임, 점증하는 러시아의 영향력과 이슬람 국가들과의 제휴처럼 이스라엘을 둘러싼 사건 중심의 의미 부여는 얼마든지 섣부른 예언 해석의 현실적 적용을 부추길 수 있다. 오늘로서 곡과 마곡의 전쟁에 대한 해석은 끝나지만 예언의 성취와 함께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현실에 적용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새삼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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