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44) 인도(引導)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진리와 거룩함으로 인도하시는 성령

탈북자들이 한국에 와서 놀라는 것 중 하나가 내비게이션 음성 안내다. 그 많은 길을 어찌 알고 구석구석 안내해주는지 신기하고, 감시당하는 것 같아 무섭기도 하단다. 성령이 인도한다는 것이 마치 내비게이션처럼 하늘나라 위성에서 잘못된 길이면 우회도로를 알려주고 디테일하게 안내하는가? 성령도 신자들의 내비게이션이 되어 운전자의 실수든 고의든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어김없이 정확한 위치를 계산, 우회로를 알려주는 그런 역할을 하는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을 성령이 성도들의 내비게이션으로 생각하기 싶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독특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도록 촉구하는 힘을 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혹은 적어도 그것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을 포함하고 있다. 성령에 의해 날마다 죄 된 육신의 음모와 계획을 죽이는 것은 곧 그 성령에 의해 인도받고 지도받고 재촉당하고 통제받는 것이다.

인생길을 걸을 때 간절한 게 있다. 바로 ‘인도’다. 누구나 인생의 첫걸음을 내디딜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셔서 광야를 지나게 하셨다고 자주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블레셋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홍해로 인도하셨다. 출애굽기 15:13에 나오는 ‘인도하다’에 해당하는 ‘נחה’(나하)는 ‘이끌다, 인도하다, 안내하다’의 뜻이 있다. 국어사전은 안내를 ‘어떤 내용을 소개하여 알려줌’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안내는 ‘案內’라고 쓰며 각 글자는 ‘책상 안’, ‘안(inside) 내’라고 훈독한다. 글자대로 풀이를 하자면 ‘책상 안(inside)’이라는 뜻이다. 다른 본문들이 다른 다양한 방법으로 인도하심의 주제를 발전시켜 나가지만 모든 인도하심의 근거로 하나님의 임재를 말하는 기본적인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시 23:3).

갈라디아서 3:24에서 율법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목표가 일단 성취되면 율법은 인간을 진리와 거룩함으로 인도하는 영에게 그 역할을 넘겨주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5:18에서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에 의해 결정되는 삶의 근본적인 지향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선사시대 유럽인은 부족 단위로 양을 방목해서 먹고 산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는 지도가 없어 옮기려면 지리에 밝은 길잡이가 필요했다. 그래서 원래 '여행하다'를 뜻하던 고대 영어 ‘lithan’에서 나온 ‘leader’가 ‘길잡이’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결정적인 것은 성령에 대한 의존이다. 이는 포괄적이다. 이스라엘의 한계를 넘어서는 제한적인 의미를 갖는 주장이다. 성령의 부으심의 한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13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에 사용된 ‘인도하다’에 해당하는 ‘ὁδηγέω’(호데게오) 역시 ‘이끌다, 안내하다, 가르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LXX에서 42회 발견된다. 대개 하나님과 관련하여(출 13:17; 15:13), 시편에서 개인 생활 중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고백과 관련하여(시 23:3; 25:9), 그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에서(시 5:9; 31:4), 그리고 비유적인 의미인 가르침과 안내, 지도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호데게오가 마태복음 15:14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는 말씀에서 문자적인 의미로, 사도행전 8:31 ‘지도해 주는 사람’에서는 비유적인 의미로 ‘가르치다’로 사용되었다. 요한복음 16:13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에서는 이 단어가 ‘인도하는’이라는 의미를 요한복음 14:20절처럼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는 의미로 생각 할 수 있다.

 

1. 성령의 인도

랍비들 사이에서는 인도하는 천사라는 개념이 보편적인 사상이었다. 랍비문헌에서는 의로운 자의 영혼을 사후에 인도하는 또는 데려가는 천사들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에 해당하는 ‘ἄγονται’(아곤타이)는 ‘ἄγω’(아고)의 수동태다. 영이 그리스도인의 순종에 주요 행위자임을 암시한다. 또한 신자들의 순종을 설명하는 것이 신자들 안에서 행하시는 영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아마 성령의 지시 또는 지도를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5:18에서처럼 삶 전체의 방향이 성령에 의해 결정되도록 한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주도적인 힘에 의해 제한을 받고, 압도적인 의무감에 순복한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은 성령의 작용에 의해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만이 그리스도께 속한 것과 마찬가지로(8:9),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다.

성령의 지배를 거부하고 육신대로 죽을 것이다. 성령의 인도, 즉 성령대로 사느냐 아니면 육신대로 사느냐는 생사의 문제다. 선택의 자유는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생사를 가른다. 죄는 처음에는 인간을 점잖게 부추기다다 그 다음에는 속임수를 써서 폭군으로서 군림하기 시작하는데 반해 성령은 강압보다는 설득에 의존한다. 사실상 바울은 바로 이 점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성령의 인도함에는 두려움이 삶을 지배했던 옛 멍에를 온전히 개선한 새 멍에가 수반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고 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결정할 때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적인 영향(the domiating influence) 아래 있다는 말이다(갈 5:18).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의사결정에서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신자들의 가치관, 생활양식, 행동들을 결정하신다는 것이다. 동사가 수동형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순종에서 1차적인 힘이 하나님의 영이심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영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이 영에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반면, 영을 가지지 않는 자들은 영의 인도를, 즉 지배를 받지 않는다. 바울이 이 ‘인도함을 받는’이라는 말 속에 ‘황홀경적(ecstatic)’이거나 ‘은사적(charismatic)’일 같지는 않다.

 

2.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우리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다양한 방법들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계시된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가르침과 본을 통하여,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경건한 사람들을 통하여, 그리고 영적인 조언자와 지도자들의 교훈을 통하여 인도하신다. 헬라 사상이 인생의 길에 관하여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간 속에서 보았다. 반면 구약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순종 아니면 불순종만을 전해줄 따름이다.

Paul Tournier의 책 ‘모험으로 사는 인생’의 부제는 ‘인생은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이다.’ 그는 신앙과 삶을 ‘모험’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바라본다. 성령이 우리 인생을 인도하신다는 것은 가이드로서 일일이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지배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성령이 우리 인생의 내비게이션처럼 지도한다는 말씀인가? 내비게이션이라는 이름의 그녀는 화를 내지 않는다. 수십 번 엉뚱한 길에 접어들어도 바가지를 긁기는커녕 매번 우회로를 일러주곤 한다. 하지만 사람이 만든 내비게이션은 불완전하다. 내비게이션만 들여다본다고 운전을 안전하게 할 수는 없다. 모니터를 바라보면서도 주위 여건과 다른 차량을 살피며 순간순간의 상황에 대처하며 운전해야 한다. 융통성도 약하다. 더 빠르고 좋은 길이 있는데도 입력된 길이 아니라며 돌아가는 길을 고집하기도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왜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종말론적 생명을 경험하는가에 대해 보충 설명이 된다. 영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운전자가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면서 일상적인 판단에 대해 인도함을 받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의 통제를 받는 것(controlled), 결정을 받는 것(determined), 지배를 받는 것(governed)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것은 억제되지 않는 환상의 보증이 아니다. 바울이 자신의 독자들에게 제일 먼저 상기시켰던 것처럼 말이다(고전 12-14; 살전 5:19-22).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사는 하나님의 자녀는 믿음으로 ‘살리라’고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는 이유를 추가로 제공한다. 성령은 인생의 내비게이션처럼 일일이 지시하고 경고하고 재탐색하라고 추근대지 않는다. 학문(學問)의 한자적 의미는 답을 배우는 게 아니라, 질문을 배우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인생의 답을 찾기보다 하늘의 명을 받들고 믿음으로 순종을 배운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올라갈 때다. ‘이 길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식을 죽여 제물로 드릴지라도 약속을 이루기 위해 다시 살려 하산할 것을 믿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자굴에 던져 질지라도 기도를 쉴 수 없고, 눈치를 보며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자굴로 가는 길을 가는 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마찬가지다.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불무불에 던져지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불구덩이에서 보호하지 않더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상 앞에 절 할 수 없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불구덩이에 던져 지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이다(단 3:16-18).

성령의 삶을 로마서 8:4에서는 ‘영을 따르는 자’라는 묘사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갈라디아서 5:18처럼 ‘성령에 의해 결정되는 삶의 근본적인 지향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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