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아흔 아홉과 하나, 그 역설

눅 15장의 비유에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목자가 있다.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섰다. 한 마리 양이 왜 양떼를 떠났는지 언제 떠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양은 다른 양떼들을 떠남으로 실상 목자의 품을 떠난 격이 되었다. 목자는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섰다. 목자가 떠난 양 한 마리를 향하면서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남겨졌다. 그들은 언제 맹수의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극한상황에 놓여졌다. 그럼에도 목자는 한 마리 양을 포기할 수 없었다. 무리에서 벗어난 한 마리 양의 생사가 최우선적인 과제로 목자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아흔 아홉이 아닌 한 마리! 그것은 목자의 선택이었다.

목자는 계산을 따르지 않고 마음을 따라 행했다. 목자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굴었던 한 마리 양과 순종하는 아흔 아홉 마리 중에서 목자가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은 당연히 후자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목회가 어려운 것은 세상의 기준을 놔두고 적용할 수 없는 비상식적 결정을 간혹 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이런 목자는 흔치 않다. 요즘 같은 세태에 이런 자세로 목회하면 백이면 백, 교회는 문 닫아야 할지 모른다. 주님의 강조는 한 영혼의 가치에 있다. 천국에 있는 아흔 아홉의 의인보다 지옥에 있던 한 영혼의 돌이킴이 극진한 기쁨인 것은 합리와 이성을 넘어선 신앙적 안목의 결과다.

한 영혼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이가 어찌 다수를 목양할 수 있을까? 잃어버린 하나는 단지 하나가 아니다. 그 하나 속에 헤아릴 수 없는 다수가 감춰져 있다. 마치 레위의 허리에 묶여 있던 무수한 후손들처럼, 주님의 허리에 묶여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아난 그의 백성들처럼 잃어버린 하나 속에는 그런 엄청난 씨앗이 숨어있기에 목자는 하나를 찾아 나섰다. 아주 작은 사과 씨 하나 속에는 수많은 사과 열매가 배태되어 있다. 살아있는 하나는 단순히 산술적 개념에서의 하나가 아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하나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씨앗은 하나의 열매보다 훨씬 크다.

교파이기주의, 교권지상주의, 물신주의, 성장주의, 신비주의, 은사주의, 기복주의, 혼합주의는 조국교회가 거친 삶을 보냈다는 반증이며 지금까지 그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만신창이라면 지나친 말일까? 정직하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윤리와 정의는 오래 전에 실종되었고 헌신과 섬김은 코마 상태에 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을 정도로 절망적이다.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는 위기의식이 없어 더욱 큰 문제다. 분쟁과 파당은 고린도교회를 훨씬 앞질렀고 다른 복음(heteron euangellion)의 횡행은 갈라디아교회보다 심각하며 사이비 종말의 기승은 데살로니가교회의 종말 신앙을 짓누른다. 세상이 교회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으니 성령의 답답한 심정을 누가 알아줄 것인가?

 

재앙일 수밖에 없는 동역

B목사가 한국 L목사의 치유세미나에 다녀온 소감을 써서 많은 목사, 장로들에게 발송한 내용을 예전에 접한 적이 있다. 열의가 대단했다.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시 뜨는 별로 L목사를 소개했다. ‘뜨는 별’이란 표현이 속물적이어서 불편했다. 전 생애를 거쳐 누구에게도 경쟁상대를 만나지 못했다는 B목사는 자신의 교만을 깨뜨린 L목사를 성령의 거목이라 추켜세웠다. 영안이 열려 갖가지 영적 현실을 보고 신유사역을 행한다는 B목사는 고수가 보인 신기한 현상에 압도당해 10번 이상 찾아가 배우기로 했단다.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이 되고 빙수위지 한어수(氷水爲之 寒於水)가 되어 초고수가 나타나면 영계에 어떤 지각변동이 일어날까? 주력 은사가 신유며 예언도 8년에 걸쳐 정확도를 검증받아 너무 바쁘게 쓰임 받는다고 자증하는 B목사가 영력의 초고수가 되면 과로하게 될까 걱정이다. 한국교회를 성령으로 새롭게 하고 세상에서 오직 L목사 한 사람과만 다투겠다고 도전장을 내며 그를 자신의 스승이라 받들었다. 거룩한 경쟁이라 이름 붙이고 성결, 성령의 기름부음, 신유, 예언, 축사의 권능, 성령에 대한 신학적 이론, 성령세미나 사역의 영향력과 규모 면에서 그를 넘어 가겠다는 것의 정체를 모르겠다. 계시록에서 말한 찬란한 두 별이 되리라 장담하니 영계는 역시 어둡기 짝이 없다.

이런 동역이라면 재앙이다. 스승으로 받들어 스승을 넘어서겠다는 의욕, 그것도 반드시 넘어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허탈한 웃음을 짓게 한다. 이런 저런 계획을 밝히면서 성령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거침없이 무한정으로 나타남을 현재의 우선적 목표로 정했단다. 끝 간 데를 모르는 그의 목표는 동역의 여지를 죄다 틀어막는다. B목사는 자신이 스승으로 삼고 넘어서야 할 고지라 천명한 L목사에게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나는 그를 내 남은 생애 평생의 친구요 동역자로 여기고 그를 가장 아끼리라. 그를 사랑하리라. 그를 위하여 내 모든 것도 주리라.” 그렇게 될 수 있다면 보기에 좋으리라!

그런데 그가 구상하며 꿈꾸고 공포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계획에서 나온 것일까? 하나님이 창안하신 흔적이 있는가? 하나님을 빙자한 개인의 야망이 아닌가? 거룩함에 감싸인 세속적 영달의 내용이 아닌가? 하나님이 너무 쉽게 이용당하고 역사되는 모습이 걱정스럽다. 내가 보기에 B목사는 이미 지닌 능력만 해도 초절정의 고수(?)다. 이 수준이면 세상의 1/4 정도는 뒤집어졌어야 한다. 아, 허황된 이들의 허망한 말로 인해 사라지는 것은 허탄한 세월이고 남는 것은 허술한 해프닝들이다. 자칭 역대급 영적 고수들의 굿거리가 지친 영혼들을 낚아채는 이 현실을 어쩌나?

 

복원되어야 할 아름다운 신화

크리스천 국회의원이 부적절한 행위로 구설수에 오르고 크리스천 기업가가 노동력 착취로 성토의 대상이 된다. 성폭력의 피의자인 전직 고위 간부는 골프나 예배 후에 피해자를 찾아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 하니 그에게 예배는 무슨 의미였을까? 드러나지 않은 치부들이 오버랩 되어 양미간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들이 바치는 고액의 헌금은 속죄금에 해당한다. 1899년 3월1일자 <대한 그리스도인 회보>와 <황성신문>의 기사다. “지방관들이 야소교가 있는 마을에 부임하기를 꺼려한다.” 이유는 기독교인들의 반발로 관리들의 부정한 수입 근원이 근절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구 1천2백만 중 세례교인은 1만 명도 안됐지만 교회의 대 사회적 영향력은 컸다. 신화 같은 삶은 생생한 실화였다. 아름다운 신화는 복원시켜야 한다.

아직도 농어촌 일부와 낙도나 산간벽지에서 월 3-40만원으로 생활하는 목회자가 있다. 이에 비해 연봉 1억을 훨씬 웃도는 사역자도 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힘차게 찬송하던 헌신자들은 신학교의 문을 나서면서 아골 골짝 빈들이나 소돔 같은 거리를 지나쳐버린다.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인의 소리를 애써 외면한다. 그들은 일단 대도시를 목표삼고 여의치 않으면 차선책으로 중소도시의 현실에서 숨고르기를 한다. 언제든지 기회만 되면 옮겨가기 위해서다. 모두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것이 하나의 추세요 경향이라면 심각한 일이다.

임지는 갈수록 부족해서 이제 100명 정도의 교회에서 후임자를 구하면 평균 수백 통 이상의 이력서가 쌓이고 그중의 30%는 박사학위 소지자란다. 하나님이 파송하시기 전에 정치 유단자들이 촌지와 인맥 쌓기를 고려하고 쓰리 쿠션처럼 절묘한 바꿔치기 기술을 이용하여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을 집어넣는다. 교회는 목회자를 고른다 하지만 이사회로 변해버린 당회는 월급 사장을 선발하고 있다면 무슨 목회가 이루어지겠는가? 인간들 목소리 높은 곳에 하늘의 음성은 잦아든다. 영육 간에 목회의 현실은 참담하다. 밥벌이라면 차라리 포장마차나 일용직 근로자가 속 편할 것이다. 교회주식회사는 해체되어야 한다.

한쪽에선 임지가 없어 울상이고 다른 한편에선 목회자가 없어 아우성이다. 서로의 니드가 맞지 않아서다. 조금이라도 위를 바라보고 애초에 부르신 자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모든 것에 앞서 전능자의 로드맵에 따라 나아가게 될 것이다. 현실, 시대적 동향, 추세에 눈이 멀고 귀가 막혀 마음까지 어두워졌다. 여전히 생각하지만 사색의 범위는 궁창 위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늘 궁창 아래에 머문다. 무수한 실패자의 시신을 밟고 성공의 깃대를 꽂지만 이미 천상의 사역과는 멀어진지 오래다. 정상에 가까울수록 동지는 줄어들고 난적들이 주를 이룬다. 소위 성공을 이루어 동무를 버린 한 인간을 보았다. 가난한 벗에게 등을 보인 그가 못내 안쓰러웠고 외면당해 볼 품 없던 상대는 무척 애처로웠다. 외로운 길에서 자신의 길만을 오롯이 걷던 그의 의연함이 되레 날 위로했고 씁쓸함이나 괘씸함을 잊은 그의 천진함에 눈시울을 붉혔다.

갈렙은 여호수아 못지않은 지도력과 영력의 소유자였다. 마흔에 정탐꾼으로 부름 받아 약속의 땅으로 침투했던 열혈아는 45년 동안이나 자신의 꿈을 가슴에 파묻고 웅지를 펼칠 때를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가나안 정복전쟁의 대미를 장식했던 그로 인해 택한 백성은 오랜 방랑을 끝내고 가나안의 정착시대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가 만일 역사의 무대 정면에 나서기 위해 여호수아와 경합을 벌였다면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인품과 능력과 자질의 차이가 드러날 경우 누가 앞서고 누가 뒤에 설 지는 판가름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모든 면에서 대등한 두 사람일 경우에 한 사람이 뿌리처럼 묻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거목으로 성장하기는 쉽지 않다. 갈렙의 위대함은 동역을 위해 스스로 뿌리가 되는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동역이 어려운 것은 우리가 많은 경우에 실천 단계에서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알고 그런 내용에 감동하고 박수를 보내면서도 정작 우리 자신의 문제가 되었을 때는 쉽사리 선두권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땅의 선취권을 양보했을 때 우리는 그가 내린 결정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잘 안다. 과연 ‘양보의 신’이라 할 만큼 아브라함은 뒷자리에 서기를 원했다. 수하의 목자들 간에 숱한 다툼이 있었지만 그들이 오랜 동안 동행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아브라함의 동반자 의식이 빛났기 때문이다. 갈라서야 할 극한 상황에서도 아브라함은 롯에게 선취권을 넘겼다. 동역 의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결단이었다. 이것이 삶이라면 그렇게 살아야 하고 신화라면 반드시 복원되어야 한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