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목회란 하나님과 인간의 동역

목회는 홀로 쌓는 금자탑이 아니다. 더불어 빈 곳을 메워가는 낱말 퍼즐과 같다. 비슷하지만 칸에 적어넣으면 서로 교차되는 낱말과도 연결되지 않는다. 정해진 단어만 상하좌우로 연결될 때 의미가 드러난다. 홀로 집중하면 독창력은 빛나지만 탁월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개인적인 탁월함이 뛰어난 사람도 있지만 여럿이 모여 하나를 두고 씨름하다 보면 한 사람이 볼 수 없던 바를 꿰뚫어보고 탁월함의 보화를 캐낸다. 이것이 하나보다 둘, 둘보다 셋이 나은 이유다. 삼위는 공존의 형태며 일체는 독존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홀로 하나이며 더불어 존재를 빛내신다.

솔로의 아름다움도 듀엣의 조화로움에는 모자란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지으셨다. 그런데 아담의 홀로 있음을 선하지 않게 보셨다. 하나님이 지어 아담에게 주신 하와는 아담의 존재를 더욱 풍성케 하는 존재였다. 둘이 합하여 하나가 되는 이 놀라운 신비를 통해 하나님은 충돌이 아니라 충족, 차이의 서먹함이 아니라 합일의 신비를 보이고자 하셨다. 동역자는 그런 배경에서 이해할 때 영적 반려요 동지며 한 사역자를 완성시켜주는 나머지 짝이다. 동역은 실로 아름답다.

목회는 우선 하나님과 인간의 동역이다. 목회는 세상의 많은 사업과 다르다. 사업의 원리와 방도를 총동원해도 어느 시점에 가면 한계에 부딪힌다. 그것은 만 사람이 모여 머리를 짜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다. 다름 아닌 정신적 한계요 나아가 영적 한계다. 목회는 성령이 하신다. 성령이 사람을 통해 하신다. 하나님의 공전과 인간의 자전으로 지구의 역사를 밝히는 것이 목회다. 하나님의 햇빛과 인간의 달빛으로 인간만사의 하루를 만들어가는 것이 목회다. 하나님의 날줄과 인간의 씨줄이 엮여 삶의 의복을 직조해가는 것이 목회다. 하나님의 들숨과 인간의 날숨이 합해져 생명의 합창을 부르는 것이 목회다.

성령의 능력과 도우심을 배제한 것은 목회일 수 없다. 아무리 외형적으로 거대하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 다양한 사역을 펼치고 감동적인 예배가 진행되어도 성령을 외면한, 성령이 외면한 교회는 단연코 목회가 아니다. 다곤의 신상처럼 고꾸라져야 할 우상들이 성공 신드롬으로 포장되어 산당처럼 포진하고 있다. 소수의 사람이 모여 웬만한 사역은 꿈도 꾸지 못하고 존립의 위기를 넘기면서 예배라 하기에는 너무 열악한 모임을 갖더라도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이 함께 하시는 교회에는 목회가 이루어진다. 목회를 목회답게 만들고 인간의 헌신과 열정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목회라면 한 영혼은 과연 천하보다 귀하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최대의 찬사를 쏟아냈다. 많은 문제점이 있고 격한 책망의 대상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동역자(고전 3:9)였다. 혹자는 헬라어의 문법적 해석을 강조하여 “하나님의”란 속격이 주격 속격으로서 ‘하나님의 동료’라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동료’라는 해석이다. 그럴 경우에 하나님께 속한 바울과 아볼로가 동역자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바울 일행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 6:1)로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동역자”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로 해석해서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들은 믿음직스러운 일군이었다. 사역자로 부름 받았다 해서 모두 하나님의 동역자이지 않은 현실에서 일반 신자들을 향해 동역자라 칭함은 최고의 영예였다. 사실 바울은 너그럽기보다 정확한 품성의 사람이었다. 그의 인간 평가는 야무졌기에 아무나 하나님의 동역자라 부를 리 없었다. 하나님도 아무하고나 일을 하실 리 없다. 그런 바울에게 인정받을 정도였다면 그들의 동역 수준은 하나님의 안목에도 합격점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동역자(synergoi, co-worker)란 업무를 함께 취급하는 동료이며 멍에를 함께 진 자(yoke-fellow)를 뜻한다. 뜻을 같이한 동지에 가깝다. 하나님의 동지 된 정체성의 인식은 우리가 하는 하나님의 일에 한없는 긍지를 불어넣는다.

 

칼을 날카롭게 하는 것은 역시 칼

모세에게는 동역의 기쁨이 넘쳤다. 하나님께서 인류 최고의 달변가 아론을 그의 대언자로 붙여주셨다. 우리는 목회에 있어 설교의 수위권을 인정한다. 기도와 그 외의 다른 사역들이 많이 있지만 신자들을 자주 접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수 있는 매체로서 설교의 중요성을 당연히 인정한다. 그런데 모세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의 사역이란 보다 큰 틀에서 말씀 전파는 하나님의 사람이 펼칠 사역의 협력 수단이 된다. 자세히 살피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을 주셨고 모세가 아론에게 계시의 말씀을 알리면 아론이 군중들에게 그 말씀을 풀어서 전했다.

결국 모세에게는 계시의 말씀이, 아론에게는 계시를 풀어 전달하는 설교의 말씀이 있었던 것이다. 모세에게 임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임한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성경이 계시에 있어 절대적 수위권을 갖고 해석과 적용에 있어선 설교가 또한 상대적 수위권을 갖는다. 모세에게 따르는 표적과 능력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셔서 아론을 통해 증거한 말씀들을 세워주었다. 이런 동역자들은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경우다. 동역이 마찰과 충돌을 피하고 조화로운 상승효과를 얻으려면 교회의 유익과 성도를 섬김에 부족한 부분들이 채워지는 측면에서 동역자를 구함이 마땅하다.

칼이 칼을 날카롭게 하여 상대의 얼굴을 빛내주면 좋은데 돕는 사역자의 칼날이 너무 예리하면 주 사역자의 사역을 무디게 할 수 있다. ‘어찌 그런 일이!’ 하겠지만 현실에서는 다반사다. 자신보다 말씀에 탁월한 사역자를 들여와 적당한 시기에 분립 개척을 시킬 마음이 없다면 위험한 도박은 애당초 말아야 한다. 바나바가 바울을 데려와 자신의 후임으로 삼듯 탁월한 말씀 사역자를 세워 교회를 빛나게 하려는 의도가 없다면, 그런 넓은 심성을 갖추지 못했다면 흉내 내지 말라! 칼이 칼을 날카롭게 하여 상대의 얼굴을 빛나게 함은 아름다운 일이나 흔한 일이 아님을 명심하라!

바울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는 기피인물1호였다. 그런 그를 집요한 설득 끝에 사도들과 교제의 악수를 하게 만든 것은 바나바였다. 두려워하는 성도들에게 바울이 경험한 극적 회심의 과정을 설명하며 변호한 것도 바나바였다. 마가 문제로 바나바가 바울과 심히 다투어 일시적으로 갈라섰지만 바나바는 끝까지 바울의 칼을 날 서게 하여 사도의 얼굴을 빛나게 한 귀인이요 은인이며 본받을 만한 선임자였다. 오늘 우리 시대에 바울이 없는 것은 바나바가 없기 때문이며 마가 같은 일군이 버림받은 상태로 있는 것도 바나바가 없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갈렙과 동역의 기쁨을 나누었다. 적지를 정탐하는 위험한 길을 나설 때부터 둘은 호흡이 맞았다. 열 정탐꾼이 회의와 불신의 보고를 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아졌을 때 옷을 찢으며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 듀엣의 함창을 한 것이 그들이었다. 모세에게는 아론, 아론과 훌, 아론과 훌과 여호수아라는 동역 팀이 절묘하게 짜여졌다. 여호수아에게는 그런 절묘한 인적 짜임새는 없었으나 갈렙이란 분신의 동역자가 있었다. 그들의 동역은 40년을 이어갔지만 아무런 잡음이 없었다. 여호수아의 탁월함이 그 바탕에 있었지만 갈렙의 태산 같은 인격이 둘의 동역을 가능케 했다.

갈렙은 여호수아 못지않은 용력의 장수였고 지혜자였으며 신앙과 열정의 인물이었다. 그런 갈렙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지목한 이후 단 한 차례도 무대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무대 뒤편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여호수아의 그림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군중들이 여호수아를 대적할 수 없었음도 그의 바람막이가 되어준 갈렙의 영적 크기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갈렙이었기에 노구였지만 누구도 꿈꾸지 못했던 산지 점령의 꿈을 이루고 지루했던 가나안 정복 전쟁을 마무리했다.

 

네 마음도 내 마음처럼 진실하냐?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용사였다. 블레셋과의 믹마스 전투에서 사울은 피곤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매한 금식령을 내렸다. 요나단이 숲속에서 꿀을 발견하고 먹어 힘을 얻었다. 저주에 주저하던 백성들은 꿀을 먹고 눈이 밝아진 요나단의 뒤를 따라 가며 적군을 쳤으나 극심한 피곤에 빠졌다. 승리 후에 사울이 야간 습격을 위해 하나님께 물었으나 응답이 없었다. 사울은 제비뽑기를 통해 요나단의 허물을 알고 죽이려 했다. 백성들이 요나단을 변호하고 나섰다. 이유는 그가 하루 종일 ‘하나님과 동사’했기 때문이었다. 사울은 자신에게 크신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첫 단을 쌓았지만 요나단은 그날 하루만 해도 온종일을 하나님과 동사했다.

여기에서 동사(同事)란 “하나님의 도움으로 일함”(did with God's help)을 뜻한다. 동사목사라는 표현을 쓰는 교회들을 여럿 보았다. 동사목사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일하는 목사다. 그런데 동사목사란 명칭이 부목사로 부르기는 부족하고 담임목사는 둘이 될 수 없으니 고육지책 끝에 내놓은 명칭일 뿐 성경적인 동사를 하는 목사를 보지 못했다. 다윗의 일생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는 하나님과 동사한 인물이다. 하나님과 동사를 하다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인간으로서 이만한 영광도 없을 것이다. 지혜는 하나님 곁에서 창조의 동사자가 되었다(잠 8:30).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과 동사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동사하지 못하면 동역은 없다. 다윗과 요나단은 동사자와 동사자의 복된 만남이었다.

예후는 여호나답과 동역의 기쁨을 누렸다. 예후는 이스라엘의 장군이었다.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의 죄에 물들게 만든 철녀 이세벨을 죽음으로 내몰고 거짓 선지자들을 숙청하는 대역사를 이룬 인물이다. 강장인 그에게는 경건한 동역자가 있었다. 예후는 여호나답의 됨됨이를 알고 있었다. 여호나답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후손인 겐 족속의 후예였고 레갑 족속의 족장이었다. 그는 후손들에게 집도 짓지 말고 포도원도 재배하지 말고 포도주를 입에 대지도 말고 평생에 장막생활 할 것을 명했다. 그의 명령은 300년간 준수되었고 하나님은 선민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을 때 선민이 아니었음에도 선민 같이 살았던 그들을 축복하셨다.

여호나답을 병거로 끌어 올리는 예후 (이미지출처:http://www.steventuell.net)

예후는 여호나답을 향해 진실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질문을 던졌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여호나답이 답했다. “그러하니이다.” “그러면 나와 손을 잡자!” 여호나답은 예후의 손을 잡고 달리는 병거에 올라 하나님을 위한 열심에 동참했다. 둘의 동역으로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사역 이전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다. 예후는 이 원리를 알았다. 마음의 진실이 일치됨에 사역의 출발점을 두었다. 그는 옳았고 가장 적합한 동역자를 얻었다. 마음이 일치하면 손을 건넬 수 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큰일을 도모하려는 자가 내미는 손을 뿌리치지 말라! 나는 오늘도 나의 여호나답을 찾는다. 당신의 여호나답은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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