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1966년 내가 농촌 개척교회를 할 때의 일이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골 개척교회를 시작하니 참으로 힘들고 어려웠다. 내가 처음 교회를 시작했을 때는 가마니를 깔고 두 명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당시 나에게는 한 영혼이 참으로 소중하기 그지 없었다. 그 중에서 잊지 못할 성도 한 분이 있었는데 70이 넘은 최춘이라는 어르신이다. 그 동네에서는 그냥 최 영감으로 통했다. 최 영감은 키가 자그마하고 연약해 보이지만 옛날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당시로서는 지성인이었다. 

그는 5년제 숭실학교 재학시에 학습을 받은 후, 광복군에 들어가 김좌진 장군 아래서 독립운동을 했다. 후일에는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한국광복군에도 가담을 했다. 그는 만주에서 광복군으로 활동할 때 김좌진 장군과 철기 이범석 장군의 휘하에 있었다. 특히 이범석 장군은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이범석 장군은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 1,200명을 사살하고, 2,400여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와 반대로 한국 광복군 제2대장인 이범석 장군 아래의 우리 아군은 불과 130명의 전사자와 200여명의 부상자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범석 장군은 한국 광복군의 주역이자 청산리 대첩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해방 후 임정요원들과 귀국해서 대한민국의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 되었고, 한국군 창설의 아버지가 되었다.

최춘 어르신도 독립 운동을 하다가 혈혈단신으로 귀국해서 의지 할 곳도 의탁할 것도 없는지라 과거에 상관으로 모셨던 이범석 장군 곧 국무총리를 만나고자 했으나 쉽지가 않았다. 과거에 최춘은 이범석 장군과 일본제국주의와 맞서 독립운동을 했고, 일본군을 척살하는데 운명을 함께 했지만, 이미 철기 이범석 장군은 최춘과 만날 수 있는 격이 아니었다. 최춘은 몇 차례 면담을 시도해 보았으나 무위로 돌아가자, 최춘은 이범석 장군에 대한 섭섭함은 물론이고, 생명 걸고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우던 자기를 몰라주는 조국에 대한 배신감과 무력감과 아울러 원한이 쌓였다. 그래서 외롭게 시골로 내려와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하나를 얻어서 근근이 거지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노병이 되어 있었고 일감이 없으니 수입이 없어 근방에 있는 미군 부대에서 군인이 먹다 버린 이른바 꿀꿀이 죽을 먹으며 겨우 연명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전도사로서 가끔 그의 방을 심방하고 오랫동안 말 동무를 해 드리고 기도해 주었다. 그런데 1967년 11월 최춘 노인이 심각한 얼굴로 풀이 죽어 사택으로 왔다. 내가 살던 사택이라야 최춘 노인이 살던 집과 같이 한 칸 짜리 오두 막에 불과했다. 그는 내게 검찰 출두 명령서를 보여 주었다. “자기는 병 치료를 위해서 집 앞 화단에 양귀비 세 뿌리를 심었는데 이웃에서 고발하여, 검찰의 출두 명령을 받고 지금 가는 중이니, 이 겨울을 어찌 감옥에서 견딜런지 전도사님 기도해 주세요!” 라고 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외적들과 용감히 싸우던 노병이지만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갈 처지이니 그의 손은 떨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최 노인에게 말하기를 “잠깐 기다리십시오”하고 백지에다가 「탄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54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담당 검사의 이름을 기억한다. 그 이름은 김주식 검사였다. 나는 의정부 지검의 김 검사에게 교회를 시무하는 전도사로 최춘 노인에 대해 전후좌우를 자세히 썼다. 검사에 대한 예를 표하면서도 그간의 경위를 자세히 기술했다. <이런 애국지사를 국가에서나 지방 정부에서 살피지는 못할 망정, 이렇게 방치하고 꿀꿀이 죽을 먹고 살 정도로 푸대접 하는 것이 옳은지? 도대체 대한민국 정부와 지방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라고 썼다. 그리고 탄원서의 마지막 글에는 1967년 11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샘내교회 전도사 정성구 라고 직인을 찍었다. 

정성구 박사

그리고 최춘 노인에게 말하기를 “겁내지 말고 검사 앞에서 설 때 이 편지를 드리십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최 노인은 검사 앞에 서서 내 편지 곧 「탄원서」를 드렸다. 이 편지를 읽던 김주식 검사는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다른 방을 향해 “정부와 경기도는 뭘 하는 집단인가!”하고 외쳤다. 그러자 옆 방에 대기하던 중앙지, 지방지 신문기사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이 사건을 취재 했다. 나의 탄원서 사건으로 경기도가 발칵 뒤집혔다.
그날 오후, 감옥으로 간다고 인사하고 갔던 최춘 노인은 경기도에서 보내 준 찝차를 타고, 그 당시 박경원 내무장관의 선물과 쌀 한 가마니와 각종 선물을 싣고 마을로 돌아왔다. 그 이튿날 신문 지방판에 최춘 영감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박스 기사로 크게 실렸고, 정부의 무심함에 대한 사과도 받았다.

최춘 영감이 감옥으로 가려다가 만연의 웃음을 띄고 금의 환향하게 되었다. 그날부터 마을에서는 최춘 영감의 명칭은 <최춘 노인>, 또는 <최춘 어른>으로 바뀌었다. 그에게 독립운동가로 모두 예를 표했다. 그날부터 시골개척교회의 전도사의 힘이 온 마을에 퍼지고, 동네가 교회를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교회에 대한 부정적 소문이 긍정적인 소문으로 나기 시작했다. 그 후 교회는 삽시간에 부흥되었고, 나는 자력으로 교회당을 지어 하나님께 헌당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런 사건을 통해서도 교회를 세우시고 지키기는 것을 확신했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