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개항이라고 하면 부산항이나 인천항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들 항구는 일본과 ‘병자수호조규’ 속칭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열린 개항장이나, 목포항은 달랐다. 고종이 즉위한 후에 법처럼 구실한 것이 그의 명령인 칙령이었다. 즉 대한제국 황제의 명령에 따라 열린 항구가 목포항이라는 것이고 여기에는 ‘자주적’ 개항이라는 의미가 크게 강조된다.

그러나 당시 열강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국제관계 속에서 목포항이 개항됐고, 개항 직후부터 일본전관조계라고 생각될 정도의 각국공동조계가 조성됐기 때문에 대한제국 황제의 의지 표명이라도 해도 결국 일제 주도의 목포항 개발이 이뤄졌다.

목포항은 개항 이후 항상 수출 초과 현상을 보이면서 호황을 누렸다. 1910년 지방제도 변경 때 전라남도에서 유일하게 府로 지정된 것은 목포부였다. 1911년 전라남도청 이전 논의 때에도 후보지로 목포가 1순위에 거론될 정도였다. 목포항의 흥성을 더욱 가속화한 것은 목포를 출발점으로 하는 국도 1호선과 2호선의 완공이었다.

良港, 호남평야, 면작 성공, 거기다 물류시스템까지 갖춰지면서 목포항은 발전 일로에 놓이게 된다. 목포항에서 수출(이출)되는 물품 중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쌀과 면화였다. 쌀과 면화의 수출을 중심으로 1920년대 목포항의 수출액은 1910년의 20배에 달할 정도로 크게 증가했다.

군산항과 마찬가지로 쌀의 이출이 크게 증가하면서 조선 국내의 쌀이 부족하자, 태국 등지에서 값싼 쌀이 목포항으로도 들어왔다. 목포는 무엇보다 면화의 수출항구라는 특징이 있다.

1905년 이후 고하도에서 육지면 시험재배에 성공하자, 일제는 육지면 재배면적을 공격적으로 넓혀 나갔다. 이 때문에 한국면업주식회사가 목포에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 대규모 조면공장들이 들어섰다.

뿐만 아니라 직접 면포를 짜는 조포공장, 면실유공장까지 면화와 관련된 다양한 산업체가 목포에 들어섰다. 1920년대 면화 값이 등귀하자 목포항으로 큰 선박들이 폭주하고 해안에는 면화가 가득하게 쌓여있고, 거리에는 건축이 성행해 땅의 여유가 없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일제가 기획한 목포의 발전 프로젝트가 제대로 성공하고 있었다.

1920년대 경제 호황은 곧 ‘목포의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1935년 6월 29일자 당시의 한 신문에는 전국 14개 주요도시의 호구수와 인구수가 적혀있다. 인구수로 보면 경성이 압도적으로 많고 그 다음으로는 부산, 평양, 대구, 인천, 목포이다.

이미 1920년대부터 인구가 급증했고,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무안군의 일부 지역을 편입시키면서 도시 외형이 확장되고 있었다. 이즈음에 목포는 전국 6대도시, 부산, 인천 다음가는 전국 3대 항구라는 도시의 타이틀을 유지하고 ‘全南의 王都’라고 호명될 정도였다. 게다가 개항 이래 근대문화가 적극 수용되면서 藝鄕, 문화도시 목포를 형성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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