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토론회, 미래를 향한 첫 걸음 '기억과 반성'

< 이 글은 지난 7월 19일 개최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토론회  "미래를 향한 첫 걸음, '기억과 반성'"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 

출처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회와 세계>  WWW.Kncc.co.kr

 

일제 식민지 시기 한국교회사와 그 반성

양현혜 교수(이화여대)

 

양현혜 교수(이화여대)

종교 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특별히 이번 토론회는 한국 교회의 역사를 종교 개혁의 정신에 근거하여 고찰해 보는 ‘기억과 반성’을 테마로 하고 있다. 본 발제는 이 주제와 관련해 식민지 시대까지의 한국교회사를 돌아보며 오늘날 특별히 기억하고 반성할 점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1. 서구 근대 자본주의 문명과 기독교

한국 개신교가 전래된 시기는 동아시아 문명의 중요한 전환기였다. 1840년의 아편 전쟁, 1853년 페리의 일본 내항, 1859년 일본 개항, 1860년 영. 불 연합군의 베이징 공격, 그리고 1868년 일본의 명치유신, 1876년 조선과 일본의 강화도 조약에 의해 상징되듯이, 이 시기는 군사력을 앞세운 구미 선진 제국들이 개항과 통상을 요구함으로써 동아시아가 이른바 ‘자본주의적 세계 질서’로 편입되어간 시기였다. 유럽에서 시작된 자본주의의 사회 경제적 시스템은 바로 이 시기에 세계적인 시스템으로 완성되었다. 이 전까지 각 문명권역으로 나누어져 있던 세계가 이제 자본주의적 세계로 하나가 된 것이었다. 이 하나의 ‘세계’가 성립됨과 더불어 ‘세계사’라고 하는 역사적 세계 또한 성립되었다. 이 ‘세계사’란 유럽에서 발흥한 ‘세계사’에 전 세계가 강제적으로 편입됨으로써 성립되는 역사적 세계를 의미했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세계사’란 서구적 ‘세계사’ 인식의 보편주의에 편입됨을 의미했다. 이러한 서구적 ‘보편주의’에 편입하는 것은 그것을 순수히 수용하는 자에게는 굴종이었고 거절하는 자에게는 패자의 불이익이 부과되는 이중의 속박이었다.

1800년대 후반, 서구적 ‘보편주의’의 강압에 대한 일본과 조선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근대 일본은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고 1868년 명치유신을 통해 서구식 제도를 도입하면서 위로부터 급속한 산업화 정책을 추구해 나갔다. 나아가 아시아는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시아로부터 탈출하여 ‘서구’에 진입한다는 이른바 ‘탈아론’(脫亞論)에 근거해 제국주의 국가형성을 도모하며 조선을 압박한 결과,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개국된 조선은 그러나, 동학농민혁명과 독립협회운동의 실패를 계기로 근대 근대국민국가로의 변혁에 실패하고, 마침내 1910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동아시아의 거대한 문명 전환을 배경으로 하며 1884년 전래된 한국 개신교는 근대 조선의 변혁 시도와 좌절, 그리고 식민지로의 전락의 역사와 중첩되면서 스스로를 형성해 갔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가 기독교와 서구 근대 자본주의적 문명을 준별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국가라는 민족적 정체성의 최소한의 보호틀이 붕괴된 상태에서 기독교라는 서구의 종교를 수용한 한국 개신교인들은 서구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힘에 물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노출된 것이었다. 더구나 그들에게 기독교회는 식민 지배국 일본을 통하지 않고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라고 믿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재한 선교사의 80%를 차지하는 미국 선교사들은 그들이 복음이라고 믿었던 ‘자본주의적 복음주의’를 그리 힘들지 않게 조선에 이식할 수 있었다.

19세기 초 찰스 피니(Charles G. Finny)로 대표되는 미국 개신교의 ‘제2차 대부흥’은 17세기 중반이래 미국 청교도들이 격투해 왔던 현세와 초월사이의 균형이라는 어려운 작업에서 사람들은 해방시켰다. 그는 계층 갈등 때문에 몸살을 앓던 중산층에게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고 종업원들을 교회에 이끌어 주는 것만으로 자신들의 의무를 다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피니 이후 미국의 복음적 개신교 신자들은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 체제 속에 몰입하며 열심히 돈 버는 일을 통해서도 청교도들이 그토록 열심히 추구했던 거룩함을 이룰 수 있었다.

미국 개신교에서 이러한 복음적 기독교와 중산층의 결합은 19세기 말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에 의해 완성된다. 그는 19세기 후반 미국 도시 중산층이 가진 낙관주의와 감상적 도덕주의에 호소하며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종교적 소명이 완전히 일치하는 종교적 메시지를 전했다. 이러한 미국 개신교의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해외 선교 기관이 생겨났고 한국에 온 선교사들도 이 들 중 하나였다. 중산층 중심의 주류 교단 출신인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근대 자본주의가 가져온 풍요와 번영을 신의 축복으로서 찬미하고 서구 근대의 산업 문명을 신의 질서로서 신성화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선교 모국인 미국 기독교를 기독교의 모범으로 인식한 많은 한국 개신교인들은 십계명과 더불어 육체적 쾌락의 금지, 노동의 존중, 생활의 간소화, 절약, 시간의 유효한 사용, 근면, 계획적인 생활 등의 자본주의 사회의 공리주의적인 덕목들을 기독교의 윤리로 받아들였다. 산업사회에서 ‘행복’이라는 윤리적 목표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의무와 노동을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행하여 그 성과의 축적을 엄격히 자기 심사하고 강제해가는, 말하자면 ‘향상주의적 금욕’이라고 할 수 있는 생활 윤리규범이 기독교의 윤리와 혼동되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기독교의 하나님은 근대 산업사회 특유의 ‘향상주의적 금욕’의 에토스를 인간에게 강제하는 권위였고 또한 근대 산업 문명의 수호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의 복음과 서구 자본주의 문명의 ‘힘’이 혼동되었던 과거의 역사를 돌아볼 때, 우리는 과거 신앙의 선배들이 자본주의적 세계 질서 최하위의 식민지 조선에서 생(生)을 이어가면서, 기독교와 서구 자본주의 문명을 준별하기에는 너무나 미숙했고 생존에 절박했었으며 여유가 없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제는 기독교가 생산과 이윤의 극대화를 최우선적 가치로 하는 자본주의 문명과 동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대치되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예수님의 발아래 값비싼 향유를 붓는 저 여인처럼 ‘사랑’이라는 ‘고귀한 낭비’를 가르치는 기독교의 정신은 자본주의적 정신을 비판하며 그 대안적 삶의 방식을 모색하게 하는 전혀 다른 ‘정신’ 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은 예전에 우리가 너무 가난하고 생존에 절실했으며 여유없었을 때의 저 혼돈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강화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교회는 현세의 부와 성공을 신의 축복으로 강조하고 신자들에게 유능한 자본주의적 생산인이 될 것을 복음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촉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가 자본주의적 기업으로 변형되어 가고 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교회 수 5만에 신자 수 약 860만이라는 통계를 가지고 있다. 5만의 교회 가운데에는 주일 예배에 성인 신자들이 평균 10,000명 이상 모이는 메가처치가 19개가 존재하고 그 대부분이 서울 수도권에 있다. 이들 메가처치를 포함하여 신자수 1,000명 이상의 대형 교회는 전체 교회수의 불과 2%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교회의 60%가 50명 미만의 영세한 교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교회들이 소수의 대형화에 ‘성공한’ 교회를 선망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대다수의 교회들이 이들 대형 교회의 조직 원리와 신앙 언어를 모방하고 대형화를 성공한 목회, 올바른 목회의 척도로 삼고 있는 것이다. 성공한 목회, 올바른 목회의 기준을 대형화에다 두다 보면, 교회와 기업이 혼동되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데이빗 마틴(Martin David)과 같은 학자는 한국 개신교의 면모를 ‘영적 기업 문화(a spritual enterprise culture)’에 비견한다. 교회와 기업에 혼돈되어 ‘고귀한 낭비’로서의 기독교적 사랑으로는 성숙하지 않는 ‘기형적’ 종교가 되었다는 뼈아픈 지적인 것이다.

2. 개신교와 민족적 정체성

기독교가 서구 자본주의적 문명과 동일시됨으로써 파생된 또 다른 문제는 한국 개신교와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이다. 기독교를 서구 자본주의 문명과 동일시할 것인가 준별할 것인가는 ‘서구 보편주의’에 편입되기 이전의 자신들의 전통 사회에서 방어해야 할 어떠한 가치를 발견해 내고 그것을 인류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로서 어떻게 재해석해 내는가의 문제와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전통 사회에서 계승해야 할 어떠한 가치도 공감하지 못 한 사람은 민족적 정체성을 자발적으로 해체하고 서구적 ‘보편주의’에 즉각적이고 신속하게 투항한다. 그들에게 민족적 정체성 자체가 ‘열등’의 낙인이요, 감당할 수 없는 수치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서구 자본주의적 문명을 동일시할 때, 조선의 전통적인 가치는 ‘반가치’의 덩어리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 서구 자본주의의 ‘힘’을 숭배하면서 그 ‘반가치’의 덩어리들인 전통적 가치와 정신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혹은 ‘애국'의 이름으로 해체해야하는 것이었다. 결국 서구인의 역사와 경험과는 현저하게 다른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의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어떻게 절대자와 대면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자각하고 씨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가 수용되기 이전의 조선 문화에 깃들어 있는 복음적 요소로 읽어 내고 그것에 기독교를 접목해야 한다는 김교신의 사상은 특기할 만하다. 그는 조선 재래의 정신적 전통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정신적인 이상주의를 매개로 할 때 조선인은 보다 훌륭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고귀한 낭비’로서의 사랑이라는 기독교적 실천을 통해 조선 유교가 “형식으로서는 파괴되고 내용으로서는 완전한 의미에서 성취된다”고 했던 것이다. 그가 외래 종교인 기독교를 전통으로부터의 탈출과 배제를 위한 매개로서가 아니라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매개로서 파악했다는 점은 개신교가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과 어떠한 관련을 맺을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해 시사하는 바 크다.

오늘날도 한국 개신교인들은 자신의 정신적 유래와 전통에 자긍심을 가지고 그 기억의 연속선상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데 하염없이 취약하다. 그리고 한국의 어느 집단 보다 친미적이다. 하나님은 그 섭리 아래 미국이라는 나라를 존속시키는 것과 마찮가지로 한국이라는 나라에 그것이 지속되어야 할 필연적 사명과 천직을 주셨고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특유의 아름다움을 주셨다. 이제 한국 개신교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전통적 정신과 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대로 마지막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세상 만국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문화 안에서 발양된 최선의 선한 것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타자의 것을 모방한 모조품으로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한국 개신교인들이 가지고 들어 갈 선한 것은 기억의 연속선상 위에서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인가, 역사 속에서 우리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를 물으며 빛과 그늘을 동반한 과거 역사의 모든 짐을 스스로 걸머지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려고 할 때만 만들어 지는 것일 것이다.

3. 복음과 예언의 공속성의 회복

한국 개신교 선교의 초기에 한국에 왔던 미국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원칙의 신봉자들이었다. ‘정교분리’란 원래 신앙의 자유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방지하기 위한 논리였다. 그것은 인간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내면의 신앙․신념의 문제에 국가 권력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사상의 배후에는 국가는 인간의 삶 전체에서 단지 일부분에 관여하는 것이 허락될 뿐이라는 근대 국가의 자기 한계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 따라서 ‘정교분리’의 원칙은 개인의 신앙․신념의 귀중함이 존중되어 인권의 기본을 확립하는 것이 근대 국가의 전제 조건이라는 것으로, 근대 시민사회의 중요한 원칙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교분리’의 원칙이 최초로 헌법으로 규정된 것은 종교 박해를 경험한 청교도의 후예가 건국한 미국 헌법에서였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미국 헌법에 규정된 ‘정교분리’ 원칙의 신봉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의 역사적 정세와 맞물려 한국 개신교에는 특이하게 변형된 ‘조선형 정교분리’의 원칙을 강요했다. 초기 한국 개신교인들의 왕성한 정치적 민족운동에의 참여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선교사들은 이미 1901년에 「정부와 교회 사이에 교제할 몇 조건」을 만들어 공문으로 각 교회에 회람하게 했다. 그 내용은 “1. 우리 목사들을 대한 나라 일과 정부 일과 관헌 일에 대하여 모두지 그 일에 간섭 아니 하기를 작정한 것이오 2. 대한국과 우리나라들과 서로 약조가 있는 데 그 약조대로 정사를 다 받으되 교회 일과 나라 일은 같은 것이 아니라 또 우리가 교우를 가르치기를 교회가 나라 일 보는 데가 아니오 또한 나라 일은 간섭할 것도 아니오(중략) 5. 교회는 성신이 붙인 교회요 나라 일 보는 교회 아닌 데 예배당이나 회당 사랑이나 교회 학당이나 교회 일을 위하여 쓸 집이요 나라 일 의논하는 집이 아니요 그 집에서 나라 일 공론하여 모일 것도 아니오 또한 누구든지 교인이 되어서 다른 데서 공론하지 못 할 나라 일을 목사의 사랑에서 더욱 못 할 것이오”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직 신학적으로 미숙한 조선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사회 정치적인 영역을 포함한 인간의 총체적인 삶의 원리로서가 아니라 좁은 의미의 종교적 영역인 교회 생활에 한정시키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우기 초기 미국 선교사들은 카츠라 테프트 밀약에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익에 대해 암묵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제시한 매우 특이한 내용의 ‘정교이원론(政敎二元論)’에 동조했다. 이토는 당시의 한일 감리교회의 감독이었던 해리스(C. M. Harris)와 다음과 같은 의견을 교환했다. 즉 “정치상의 일체의 사건은 제가 그것을 담당하지만 금후 조선에서 정신적인 방면의 계몽․교화에 관한 것은 바라건대 당신이 그 책임을 담당해 주시오. 그리하여야만 조선 인민을 유도하는 사업은 비로소 완성될 수 있습니다”라고. 즉 이토는 종교의 영역은 기독교가 그리고 정치․사회적인 영역은 조선 통감부가 각각 분담하자는 역할 분담론을 선교사들에게 제시하며 조선 통치에 대해 상호 협력할 것을 제안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토식의 ‘정교이원론’은 한국 교회의 ‘안전’과 선교사들의 ‘애국심’을 동시에 만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후 선교사들은 이것을 대조선총독부 대응 방침으로 하고 조선 개신교에 정치에의 불참여와 무관심을 강요하였다. 나아가 정치․사회적인 영역을 복음의 사회적 응답의 영역으로서 파악하고 신앙적 양심을 가지고 대응해 가려는 조선 기독교인들의 시도를 비신앙적․ 정치적인 것으로 정죄하기조차 했다.

1905년 약 4만이었던 교세를 2.6배로 성장시킨 1907년의 대각성운동은 이러한 선교사들의 ‘정교 이원론’을 한국 교회에 확실히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1907년의 대각성운동은 기독교적 죄의 회개와 성령의 움직임을 체험하게 하고 커다란 부흥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05년의 을사늑약이후의 일본의 국권 침탈로 격화된 조선인의 아픔과 분노를 성령 운동이라는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희석시킴으로써 민족적‧정치적 비극에 대해 한국 개신교인들이 얼굴을 돌린 비정치화‧ 탈역사화가 시작된 시발점이기도 했다.

실제로 조선이 1910년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조선 개신교인들의 민족 독립 운동에의 참여가 대가없는 고난임이 확실해 지자, 이러한 선교사들의 방침은 한국 기독교인의 역사적 좌절감과 맞물려 한국 개신교의 정신적 토양에 더욱 강고히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토식의 ‘역할 분담론’이 조선 기독교의 대정치․ 사회적 원칙으로서 확고히 자리를 잡아간 것이었다. 한국 개신교의 탈역사화를 더욱 확고히 한 것은 3.1운동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이 실패로 막을 내린 후, 많은 개신교인들이 좌절하고, 현실의 역사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개인적 신비체험이나 경건에만 집착하는 부흥회적 신앙이나 비기독교적 신비주의적 신앙이 대세를 차지했던 것이다.

개인 구령만을 중시하고 현실의 역사와 사회적 공공 역역에 대한 무관심을 올바른 신앙 형태라고 하는 ‘조선형 정교이원론’은 사실은 ‘정교분리론’의 특수한 변형으로서 그 내실은 탈정치적․ 탈사회적 교회중심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정치․ 사회적 원칙을 가진 조선 기독교회의 정신적 풍토는 시대와 역사의 흐름을 꿰뚫으며 복음의 사회 윤리적 차원을 조망해 보려는 예언자적 통찰력이 성숙하기에는 지극히 취약한 토양이었다.

이렇게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설정하고 사회적 공적 영역에 대해 무관심할수록 좋은 신앙이라고 한 결과는, 사회적 공적 영역에 대해 응답하는 역사의식과 기독교적 사회 윤리의 성찰의 부재로 나타났다. 세계에서 가장 전쟁 위험이 높은 나라에 살면서도 평화 문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고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면서도 통일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 해방 70년이 되었지만 종군위안부 문제 등을 비롯한 한일 과거사 문제나 친일 청산 문제 등에 대해도 한국 개신교는 무관심하다. 한국 개신교회에는 ‘신앙이 좋은 신도’와 ‘사회적 공공성’을 자각하고 행동하는 ‘좋은 시민’ 사이에 간극이 너무나도 큰 것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에는 예언과 복음의 공속성의 회복이 절실히 필요하다. 인간을 해방하여 참 주체로 세우는 기독교의 복음은, 피조물적 존재이면서 마치 창조주인 것처럼 인간을 억압하려는 모든 의식이나 제도에 비판·항거하며, 가장 작은 자의 자존을 보장하는 신적 공의의 공동체를 대망하는 예언과 늘 어깨를 나란히 한다. 예언이 없는 복음이란 추상적일 뿐만 아니라 위선적이고 때로 사악하기조차 한다. 또한 복음이 없다면 예언은 그것을 지탱할 희망과 용기를 어디에서 공급받겠는가. 이렇게 상호 공속적인 복음과 예언의 관계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몰고가 ‘복음만’을 주장하며 기독교를 ‘성공의 종교’로 오도하려는 모든 ‘영적 기업가 문화’에 저항해야 할 때이다. 복음이 가진 정치 사회적 의미를 복원하여 개인 윤리뿐 아니라 국가, 사회, 민족적 정체성, 국제 정치, 전쟁 등에 대한 기독교적 사회 윤리를 총체적으로 전망하고 실천하는 것이 오늘날 요청되고 있다. 복음과 예언의 공속성을 회복하려는 신앙 교육이 시민적 공공성과 책임성 그리고 연대성을 깨우는 시민 교육과 함께 가야함은 이 때문이다.

4. 평화와 전쟁에 관한 올바른 인식과 대응

기독교는 공동체적 이상으로서 무엇보다도 생명 존중과 평화를 제시하고 있다. 생명 존중과 평화를 논할 때 가장 일차적인 대립 개념은 전쟁이 될 것이다. 전쟁은 광범위한 스케일로 인간의 자연적인 삶의 흐름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인간의 폭력이라는 가장 치명적인 비극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데 참여시키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와 그 속의 인간 집단 모두가 체계적인 살상과 파괴의 도구로 전환되는 것이다. 전쟁은 인간에 대한 가장 총체적인 폭력이 자행되는 공간이다. 따라서 전쟁과 평화에 대해 기독교가 어떠한 인식과 대응을 보이는가는 그 기독교의 성격과 질을 압축적으로 설명해 주는 좋은 척도가 될 수 있다.

한국 개신교는 근현대에 들어 적지 않은 전쟁을 경험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식민지 시대의 중일전쟁과 태평양‧아시아전쟁, 해방 후 1950년의 한국전쟁을 경험했던 것이다. 1894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의 러일전쟁기에 한국 개신교는 선교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는 유아기의 상태로 ‘전쟁’에 대해 충분히 숙고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의 ‘전쟁’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아하게 한 것은 세계 제 1차 대전이었다. 근대 과학의 지식을 전쟁 병기에 이용하여 인류가 경험해 보지 않은 대참화를 일으킨 이 전쟁은 한국 개신교로 하여금 ‘전쟁’ 문제의 중대성을 자각하게 했다. 개신교는 전쟁의 원인을 국가지상주의, 과학만능주의, 자본주의적 경쟁체제 등에서 구하면서, 모범으로 여겼던 서구 근대 문명의 한계와 모순 그리고 개혁의 필요성에 눈떠갔다. 한편 전쟁에 대해 기독교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도 모색하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인류의 대참사인 전쟁과 기독교는 모순되며, 기독교는 비전적 태도를 견지해야 함이 마땅하다는 논의가 개진되었다.

그러나 평화를 향한 이러한 지향들과 사상적 모색들은 1931년의 만주 사변을 계기로 잠잠해 진다. 중일 전쟁과 이어지는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자신을 절대선으로 그리고 타자를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타자의 멸절을 주장하는 ‘성전론’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들 주장이 전시 통제하라는 사상적 억압 상황에서 행해진 것임으로 충분히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 개신교계에 그 때까지 알지 못 했던 ‘성전론’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음을 분명하다.

이러한 ‘성전론’은 잘 알려진 대로 해방 이후의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을 통해 한국 개신교에 광범위하게 침투되어, 전쟁에 대한 한국 개신교의 반응으로 일반화되었다. 해방 이후 이렇게 성전론적 전쟁관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국 개신교의 풍토 속에서 비전평화론은 물론 ‘정당한 전쟁론’ 도 숙고될 여지가 없었다. 상대방을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그의 존재 자체를 멸절하려는 성전론의 분위기 속에서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정당성의 기준이 무엇이며, 일단 시작된 전쟁이라고 해도 그것이 정당하게 수행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 아래 전투가 진행되어야 하는가 등등, 전쟁의 비참함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기 위한 제반 조건에 대한 성찰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오늘날 남북이 서로 대치한 한반도는 전 세계에서 전쟁 발발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의 하나이며, 최근의 한반도에 사드 배치로 인해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개신교가 생명 존중과 평화의 구현이라는 기독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식민지 시대에 모색되었던 비전평화주의적 전통과 더불어 ‘정당한 전쟁론’이 주장하는 바, 정당한 전쟁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제반 조건들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정치적 분쟁과 이해관계의 충돌을 어떻게 중재하며 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고뇌를 경주해야 할 것이다.

5. 이성을 포괄한 신앙

한 교회의 수준은 목회자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 개신교의 목회자 양성 기준은 이후의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남겼다. 이 문제에 대해 세워진 최초의 기준은 1896년 William D. Reynolds(이눌서)가 기조한 「현지목회자 양성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교역자의 지적 수준’은 “일반 평신도보다 약간 높게 하고 유학을 금지하고 오히려 신령한 훈련에 역점”을 둔다는 것이었다. 잘 아는 것처럼 당시 한국 교회의 평신도 대부분은 여성과 하층 계급의 구성원이었다. 이들 보다 지적 수준을 약간 높게 하고 해외 유학을 금지하며 ‘신령’인지 ‘성령’인지가 분명히 이해되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 ‘신령한 훈련’에 역점을 두고 목회자를 양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결과 한국 개신교의 질적 수준은 현저히 저하되었고, 마침내 3. 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이후에는 교회가 사회적 선구자· 계몽적 지도자로서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광수, 문일평 등이 기독교가 초기의 사회적 변혁력을 잃어버리고 몰이성적 미신적 집단이 되었다고 비판하기 이르렀다. 개신교가 건전한 회의와 질문에 정직하게 직면하고 건강한 이성과 소통하고 대화하기 보다는 이성을 억압하고 맹목적인 믿음만을 강조하며 ‘신령한’ 것에 집착한 결과였다. 1930년대가 되면 감정적 분출과 신령한 체험을 갈구하는 부흥회적 신앙에서 더 나가 열광적이며 신비적인 종파가 생겨 극단적인 경우에는 강신극(降神劇), 입신극(入神劇)이 연출되기도 했다. 김교신과 같은 개신교 신자들이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유지하는 것에 의해 기독교의 건전성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면서 “기독 신자가 되기 전에 우선 이성의 정상과 교양을 힘쓸 것이다. 이성이 왜곡된 데는 신앙도 구원도 없느니라”라고 비판한 것도 이 때였다.

이러한 ‘이성 배제의 믿음만의 강조’는 1934년 ‘아빙돈주석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한국 개신교는 선교 50주년기념사업의 하나로 1930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The Abingdon Bible Commentary』라는 성서 주해서를 감리교회 목사 유형기(柳灐基)를 편집책임자로 하여, 당시 한국 교회의 유능한 신학자와 교계 지도자 53명을 동원하여 번역하기로 했다. 이 책은 미국과 유럽의 유수한 성서신학자들이 공동 집필한 것으로 “그 당시 세계적으로 통용되었던 성서 비평학을 사용하여 일반 독자들에게 성서 주석의 현대성(1930년대)을 밝혀 주어 미국 교계에서 크게 환영”받고 있던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오자마자 근본주의 신가의 토대 위에서 ‘성서무오설’을 신조 제 1로 삼고 있던 장로교회에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1935년 장로회 제 25차 총회에서 제소되어 정치 문제화되었다. 총회에서는 이 책을 ‘장로회의 도리(道理)에 불가함’을 말하고 관련자에 대한 처벌을 지방 노회에 맡겼다. 노회 중에서도 송창근, 한경직, 채필근, 김재준이 소속되어 있던 평양 노회에서 처벌 문제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평양의 원로급 지도자인 길선주는 이 책을 ‘이단서’로까지 정죄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성서 해석의 원칙을 들고 공개적으로 토론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축자영감설을 근간으로 하는 근본주의적 성서관에서 배척되는 성서 연구의 모든 학문적 방법이 ‘자유주의 사상’으로 배척된 사건이었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도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다. 신앙은 물론 이성을 초월한다. 그러나 신앙은 이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포괄하며 초월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이성은 배제한 신앙이 아니라 이성과 대화하고 소통하며 이것을 포괄하며 초월하는 건강한 신앙을 추구해야 할 때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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