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순종, 사소한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순종하는 삶이어야

 

▲ 박홍섭 목사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한우리교회 담임)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 ; 다원주의, 상대주의, 세속주의, 신비주의

중세가 이원론에 근거한 잘못된 종교적 권위로 세상을 지배했다면 근대는 이런 종교적 권위를 이성과 과학으로 뒤집어엎고 이성을 종교의 자리로 대치한 시대였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세계는 이성만능주의와 과학주의로 치달으면서 과학이 가져다 줄 유토피아적 미래에 대해 낙관하게 되지만 이마저도 2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처참하게 깨어지고 사람들은 이제 그 무엇도 믿지 못하고 각자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다원주의 사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종교적 권위가 절대시 되었던 중세, 과학과 이성을 절대시 했던 근대도 모두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드는데 실패했다고 여긴 현대인들은 더 이상 과거에 절대시 했던 어떤 것도 절대시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버리게 됩니다. 다원주의와 상대주의가 자연스럽게 손을 잡게 되는 장면입니다.

그러자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물질과 돈이 절대의 자리에 자리 잡게 되었고, 돈이 하나님 노릇을 하면서 세상을 지배하고 사람을 지배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종교도 아니고 이성도 아니고 오직 더 많은 소유와 돈만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 준다는 지독한 세속주의가 또다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와 사이좋게 손을 잡게 된 것입니다. 작금의 잘 살 수만 있다면 도덕도 윤리도 공동체의 가치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경제제일주의' 현상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무관치 않습니다.

그러면서 한편, 현대인들은 막연히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열광하고 있습니다. 모든 객관적인 절대가치를 스스로 상대화시켜버리고 해체시켜 버린 뒤 그 공허함을 달랠 길이 없자 긍정적인 사고로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죠. 진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져 버린 현대인들의 씁쓸한 모습입니다. 유머가 아닌 개그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사회적 현상을 쉽게 흘려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강단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되지 않고 코미디화 되고 가벼워지는 원인이 거기에 있으니까 말이죠.

놓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포스터모던의 시대적 특징은 저급한 영성의 신비주의적 경향입니다. 이 시대는 영성이라는 이름의 온갖 것으로 만족감을 채우려고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점성술, 요가, 명상, 마술, 기적과 초월을 말하는 사이비 종교집단이 횡횡하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모두 스스로 절대 진리를 해체하고 상대화시켜 버린 현대인들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하는 눈물겨운 시도이죠. 그 어느 시대보다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 이라고 하면 과언일까요?

포스트모던이 몰고 오는 바람, 종교 다원주의와 기복적 세속주의, 그리고 저급한 은사주의

이처럼 현대는 다원주의, 상대주의, 세속주의, 그리고 저급한 신비주의라는 포스트모던적 현상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특징들은 한국교회 안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쳐서 종교다원주의와 기복적 세속주의, 그리고 신사도주의 운동이 이끄는 저급한 은사주의의 바람들이 급속도로 불어오고 있습니다.

로버트 슐러의 적극적인 사고방식, 조용기 목사의 3박자 구원을 이어받은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과 잘 되는 나에 열광하고 있는 교인들을 보십시오. 성령의 역사가 아말감을 금이빨로 바꾼다고 주장하면서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저급한 성령운동을 보십시오. 청교도라는 이름을 도용해서 일어나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성령운동을 보십시오. 방언을 하늘언어라고 주장하면서 강제로 방언을 교육시키는 수준 낮은 은사운동을 보십시오. 지금도 사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직통계시인 예언과 신유를 강조하는 신사도주의 교회나 단체에 교인들이 몰리는 현상을 보십시오. 그리고 교회가 성장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고 좋다는 생각에 프로그램에 목을 매는 목회자들을 보십시오.

성공회의 전도프로그램과 빈야드의 은사주의와 소비자중심적인 가정교회와 성장프로그램인 G12, D12, 두 날개, 그리고 셀 운동 등등. 교인들을 만족시킬 수 있고 교인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다면, 그래서 교회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신학도 필요 없고 검증도 필요 없다는 자세로 모든 것을 혼합해서 시행하고 있는 신학실종의 짬뽕 프로그램이 이 땅의 교회를 야금야금 먹어가고 있는 이 통탄할 현실을 보십시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무관심한 많은 목회자들의 무지와 오히려 그런 것을 요구하는 어리석은 교인들의 실상을 보십시오.

이런 시대, 한국교회는 어디로 가야 하나?

이런 시대 속에서 한국교회가 설 자리는 어디일까요? 시대의 모든 풍조와 더불어 싸워오면서 정립하고 구축해왔던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대를 향하여 어떤 목소리를 발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서 시험을 받았던 사건을 기억합니다. 주님은 “돌을 떡으로 만들어 주린 배를 채워라”고 하는 마귀의 공격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물리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배만 부르고 만족하고 잘 산다고 사람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만 사람이 사람다워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본디 그렇게 창조되었으니까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처음의 인간은 모든 일상에 하나님의 말씀에 통치가 임하였고 그 통치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다스리고 지키도록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았지만 그 자유를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어 매어 복종시킬 때에만 에덴동산의 하나님 나라의 복과 안식이 유지되고 전파되고 완성되는 사랑의 언약을 은혜로 받았던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이 언약에 실패해서 세상에는 비참과 곤고함, 불행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런 세상과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 구원자로 오신 주님은 공생애의 첫 시작을 그렇게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것으로 발걸음을 떼심으로 우리에게 그것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실패한 순종의 사명을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승리하심으로 구원자로서의 생애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주님의 생애도 실로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생애였습니다. 주님의 생은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삶 자체였습니다. 기적과 초월과 신비가 주님의 사역과 삶의 핵심이 아니라 순종, 일상의 순종이 구원자로서 주님의 사역과 삶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점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고 하신 주님, 12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해서 초월적인 방법으로 십자가를 피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신 주님, 우리는 그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일상의 순종, 예수를 따르는 삶

이것은 작금의 현실과 견주어볼 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주님은 기적과 초월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소위 말하는 신비가 아니라 순종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는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교과서입니다. “경제가 최고다!”를 외치면서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이 시대, 할 수만 있다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서라도 배를 채워야 하며 욕심을 채워야 한다는 사단의 속임수를 통쾌하게 물리치신 주님의 승리 지침서입니다.

그렇다면 구원 이후 우리의 삶도 기적이나 초월이나 신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순종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어야 하고 그 선포된 말씀에 언약 백성들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순종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와 가치와 핵심으로 가져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킨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야 한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도 그러한 의미이겠죠.

포스터모던 시대가 아무리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와 세속주의와 저급한 영성을 추구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 물결이 아무리 도도하다 할지라도 이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변하지 않습니다. 기적과 초월과 성공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교회 안에 온갖 기적과 초월과 신비와 물질과 성공과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판을 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 있게 가르치고 전파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아들의 순종의 죽음이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것이었고 이것은 지금도 변함없는 진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도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열망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살아내어야 합니다. 사단은 언제나 이 순종의 삶 대신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기적과 초월,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세속주의로 유혹하고 공격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주님처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말씀에 순종하는 구체적인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거창한 운동이 아니라 일상을 언약 백성답게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되어지는 일상이 될 때 포스터모더니즘의 도도함이 무너질 것입니다. 세속주의와 저급한 영성의 신비주의가 무릎을 꿇고 떠나갈 것입니다. 한국교회 안에 다시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이 회복될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민족의 신뢰가 다시 교회를 향하여 돌아올 것입니다.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 그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한 걸음, 그 한 걸음이 역사를 이루고 그 역사가 주님 오실 때까지 주의 교회를 거룩하게 유지하고 지켜나갈 것입니다. 해답은 언제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것은 가장 평범한 것 속에 있습니다. 일상의 순종,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끌어오는 가장 위대한 시작이요. 과정이요, 완성일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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