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비아 김용현.심윤미 선교 story, "강도만나 피흘려 쓰러진 곳에 도서관이 세워지다"

  • 입력 2020.04.02 23:30
  • 수정 2020.04.02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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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살았다"

잠비아 김용현. 김윤미 선교사
잠비아 김용현. 김윤미 선교사

"2015년 10월 28일 강도 만나다"

20151028일 강도를 만났다. 1030일 눈을 떴는데, 내가 잠비아 병원에 누워있었다. 머리는 여기 저기 깨져서 꼬맨 상태에서 붕대로 감겨져 있었고, 팔과 손가락이 부러져 있었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온통 멍이 들어 있었으며 간도 상했다. 옆에 있는 아내에게 물었다. “내가 왜 지금 병원에 누워있는 거야?”

이틀 전 밤에 강도가 들어 왔었고, 내가 강도에게 당해서 피를 흘리며 교회구석에서 죽어가고 있었고, 강도가 아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와 위협해서 돈과 귀중품과 자동차를 가지고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했다.

강도가 도망간 후에, 아내는 남편인 내가 안보이자 강도들에게 잡혀간 줄 알았다. 그래서 한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한인들이 교회로 들어와서는, 강도들이 도망갔어도 몇몇이 계속 남아 있어 다음 계획을 세운다고 하면서, 교회를 둘러보던 중에 바깥에서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하고 엠브란스를 불러 병원으로 이송했다. 이송하는 사람들이 내가 피를 토하는 것을 보고선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단다. 그러나 잠비아 병원으로 옮겨져 급하게 깨지고 찢어진 곳을 꿰맸는데, 문제는 얼굴뼈가 다 부러졌고, 부러진 손가락을 잠비아 병원에서는 의술이 없어서 수술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냥 그렇게 살으라는 것이었다나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지 않아서 하나님께 화를 냈다. 그리고 이렇게 다짐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사건에 대해서 납득할 만한 말씀을 안해주신다면 나는 목사를 그만 두겠다

 

교회 동네 잠비아 아줌마 몇 명이서 나를 찾아왔다. 꼬깃꼬깃 몇푼 안되는 돈을 가져와서는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돈을 건네주는 것이었다. 나를 찾아온 그분들이 고맙다.

 

"치료과정에 은혜를 허락하시다"

아내는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서 기도를 요청했다. 그리고 얼굴을 찍은 엑스레이 사진을 딸 보미가 공부하는 미국 대학교에 보냈다. 간호공부를 하는 딸의 친구가 그 사진을 보고, 심상치 않아서 의사 선교사이신 자기 아빠에게 보여주었더니, 그 의사선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 상태로 정상적인 생활이 힘드니 얼른 한국으로 가서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것은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다. 나같은 환자는 비행기 기장이 탑승허락을 안한다는 것이었다. 혹 탑승을 한다 해도, 간호사 한사람이 따라 가야 한다는 것이었고, 비행기 좌석을 10개를 사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한국 공항에 엠브란스가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들에 대해서 기도요청을 했고,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졌다.

비행기 기장이 탑승을 허락했다.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다. 아내가 간호사 경력이 있기에, 잠비아 병원에서 아내가 대신 간호사 역할을 하도록 조치를 해주었으며, 비행기 좌석은 비지니스를 구하게 되었고, 한국공항에는 안양샘병원 박상은 원장님께서 엠브란스를 약속해 주셨다.

잠비아 병원비만 한국 돈으로 500만원이 나왔다. 잠비아인으로서 한국명예대사인 줄루가 병원비의 절반을 해결해 주었다. 또한 잠비아 한인들이 나머지 병원비를 해결해 주었다.

한국에 도착해 곧바로 안양 샘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가장 심한 것이 얼굴뼈가 골절된 것이다. 안양샘병원에서는 얼굴 수술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안되어서, 박원장님과 함께 아프리카 미래재단을 섬기시는 고대 안암병원 의사분을 소개받고 안암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얼굴의 뼈들을 지지대를 사용하여 맞추었으며 부러진 팔과 손가락까지 함께 수술을 하게 되었다. 수술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온 나는 하루가 지나서 갑자기 딸꾹질이 시작되었다. 딸꾹질이 멈추질 않는다. 5초에 한번씩, 하루 종일 , 밤새도록...그렇게 딸꾹질을 하니까 온 몸이 마비가 되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굴 수술을 한 직후라 침을 삼키는 것도 힘들었는데, 침을 삼키는 순간 딸꾹질을 하게 되면 숨이 멈추어진다. 누군가 내 등을 쳐 주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아내가 나의 생명의 은인이다. 내 등을 잘 쳐주었다.

병원에서 딸꾹질을 멈추게 하는 약을 주었지마는 효과가 없었다. 아내는 검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위장에 구멍이 난 것이었다. 다시 급하게 위장수술을 받았다. 기진맥진 하였지만 딸꾹질을 안하니까 살 것 같았다.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이제 살았다

병실에 누워서는 다시 하나님께 따졌다.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우리 가족이 아무것도 없이 잠비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왜 지켜주지 않으십니까? 내게 말씀으로 응답하시지 않으시면 나는 하나님 떠나겠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팍 떠오르는 것이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하나님이 나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사시는구나... 이 말씀이 깨달아지면서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 “이제 살았다.”, 몸이 아파서 죽을 것 같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떠났다는 것이 죽을 것 같았다.

병원비가 문제였다. 병원관계자가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어떤 특혜가 이번에 생겼는데, 혹시 거기에 해당될지 모르니 지원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 특혜대상은 그 병원에 속한 환자들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신청했을 때, 다른 병원입원환자도 해당되는 조항이 한 가지 생겼던 것이었다. 기적처럼 그 순간에 생긴 것이었다. 그 일을 담당했던 병원관계자가 아내에게 고백하기를 자기는 크리스천이 아닌데, 어떻게 당신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많은 분들이 도움의 손길을 주셨고, 심지어 천주교 신부님께서 전화하셔서 위로해 주시고 도와주셨다.

병원에서 퇴원하여 요양할 곳을 찾아야 하는데, 성남 산 밑에 있는 아파트를 고마운 분이 빌려주었다. 매일 약수터로 오고 가는 운동을 할 수 있었다. 2달이 지나, 어느 교회의 선교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도서관, 교회 다목적으로 사용하는 시설에서 찬양하는 아이들
도서관, 교회 다목적으로 사용하는 시설에서 찬양하는 아이들

 

말씀으로 깨달음을 주신 하나님

기도실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많이 원망했다. 어느날 기도하면서 시편 23편의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하셨는데,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데, 왜 내가 해를 당합니까? 이해가 안됩니다.”라고 기도하고선 금요기도회에 참석했다. 금요기도회에 말씀을 전하신 목사님이 택하신 본문이 방금 전에 내가 하나님께 따졌던 시편 23편 말씀이었다. 내 뒤통수를 한대 때리시는 것 같았다.

그 다음날 밤, 역시 홀로 기도하면서, 나의 고통에 대한 억울함과 울분이 터져 나와서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다. “! 하나님을 인정하기 싫어요.” 그리고 다음날 새벽예배에 참석했는데, 설교하신 목사님이 대뜸 하시는 말씀,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요소름이 끼쳤다. 하나님은 내가 말하는 하나하나를 들으시고 그대로 응답하셨다.

그것은, 내가 고통을 당하는 순간에도 나와 함께 계셨다는 것이며, 내가 고통을 당했지만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개월을 교회 선교관을 찾아다니면서 몸을 회복하게 되었다.

세례를 베푸는 김용현선교사
세례를 베푸는 김용현선교사

 

잠비아 포비아, 다시 선교지로 가야 하나

여수의 MTI 선교훈련원에 참석하게 되었다. 6개월의 훈련기간 동안 한 가지에 집중하게 되었다. 내가 다시 잠비아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잠비아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렸는데, 이제는 가야 되는가? 말아야 하는가? 기도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마음이 떠올랐다.

 

네가 잠비아에 가면 그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 나는 다 잃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들처럼, 몸도 아픕니다. 당신들처럼, 누군가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나도 굶습니다. 당신들처럼, 그럼에도 내가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분이 나에게 생명을 주셨고 힘을 주셨습니다.” 이 말을 하면 다 될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2년 동안의 치료를 마치고 다시 잠비아로 돌아왔다. 잠비아로 돌아와서는 밖에 나가기가 겁이 났다. 아내도 물론 그러했다. 그러나 내가 상처 난 곳에서 상처를 낸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보니, 오히려 내 상처가 씻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이곳에 대한 상처가 회복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상처받은 곳에서 그 상처와 대면하다보니 어느새 상처를 이기게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학교에 못가는 아이들을 위해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학교에 못가는 아이들을 위해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

 

내가 흘린 피 위로 도서관 기초를 놓다

강도를 당했던 그때, 마을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을 지으려고 준비하던 때였다. 약 가로 세로 10미터의 크기로 도서관을 지어서, 마을 아이들이 책도 읽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재료들을 알아보고 있었던 차에 강도들에게 타켓이 된 것이었다.

2년 동안 치료를 마치고 다시 돌아와 보니, 교회 집사님께서 내가 처음에 계획했던 크기 보다 3배로 더 크게 기초를 다져 놓으셨다. 내가 강도에게 맞아 피를 흘리던 곳이 도서관 옆이었다. 내가 흘린 피 위로 도서관 기초를 쌓은 것이었다. 사실, 도서관을 건축할 돈은 다 사라진 상태였다. 그냥 기초만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한국의 어느 대형교회 담임목사님께서 잠비아에 오셔서 잠비아 한인선교사님들을 만나시고 우리교회도 방문하셨다. 도서관 기초를 보시고 내 사정을 들으신 후에 그 자리에서 도서관건축 비용을 약속해 주셨고, 도서관이 완공될 수 있었다. 지금 도서관에서 매주일 아이들이 예배로 모이고, 성경공부와 찬양팀을 훈련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아이들을 위한 모든 선교 사역을 도서관에서 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쁘다. 이 아이들이 잠비아의 진정한 리더들이 되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앞으로, 아이들에게 태권도와 컴퓨터를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모든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기도이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기도는 정말로 강력하다. 지금도 나와 교회와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한국교회와 목사님들과 성도들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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