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으로 신학함”에서 해석자의 “해석 기준, 자기 신학 표준”을 밝혀야 한다고 제시했었습니다. 그것은 성경 본문이 객관적인 의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fact)는 존재하지 않는데, 현재는 절대로 고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1초만 지나도 현재는 과거가 됩니다. 과거의 사실(fact)인 현재는 반드시 미래에서 말할 때에 사실(fact)가 아닌 해석을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해석을 받은 사람은 다시 해석해서 전달자의 언어를 해석해서 수용하게 됩니다.

성경 본문에서 도출된 의미가 반드시 진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해석에서 주요한 요소를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해석함”을 제언하고 있습니다. 서철원 박사는 중생한 이성(ratio renata)이 신학함을 제언했는데, 중생한 이성(그리스도인)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서 기독교 가치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딤전 3:15). 진리(veritas)는 대학들이 외치는 구호인데, 진리의 기둥과 터로 세워진 기관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를 아는 것이 고유 임무입니다. 주 예수께서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요 8:32)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유는 얽매는 것에서 풀어짐과 합당한 권세 안에서 획득한 권리입니다. 예수께서는 귀신이 나간 뒤에도 아무것도 없으면, 더 많은 귀신을 데리고 와서 거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2:43-45).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은 교회에 진리가 없고 탐욕(돈)과 무지에 근거해서 우상숭배적인 미사를 거부했습니다. 교회는 탐욕이 없어야겠지만, 거룩하고 진리가 세워져야 합니다. 19세기에 형성된 자유주의는 탐욕은 부정하지만, 거룩과 진리가 없는 이성주의입니다. 개혁파들은 교황 권위에 의존한 부패를 개혁하기 위해서, 새로운 권위로 성경을 제시했습니다. 교황주의에서는 미사를 통한 주의 살과 피를 먹음(화체설)이었는데, 개혁파들은 선포된 말씀에 의한 진리를 취함으로 구도를 개혁한 것입니다. 개혁파들이 성경을 높이 세운 것은 주의 말씀을 회복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교황주의도 처음에는 교황에 대한 자기부정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황주의로 고착되어 본래 상태로 회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볼 것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달을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황주의도 처음 시작은 고대교회를 따라 그리스도를 바라보다가 교황으로 시선이 옮겨 타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파들도 오직 성경의 원리로 신학함을 시도했는데, 성경으로 신학함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망각한 형태가 등장했습니다. 성경으로 신학함도 손가락이며,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는 언제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진리)로 세워지고 유지되며 종료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사역자가 성경을 해석해서 말씀을 선포할 때에 그리스도 예수를 믿도록 선포해야 정당한 설교가 됩니다. 아무리 성경으로 해석하고 설교해도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지목하면 윤리 설교 혹은 자연 설교에 불과할 것입니다. 설교는 진리를 전달하는 유일한 체계입니다. 설교는 설교자에 의해서 이탈하게 되기 때문에, 설교자 양성은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구원하시고 사역자로 부른 자가 합법적으로 전할 때에만 효력이 있습니다. 교회와 설교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가들의 글을 보면 그 점에서 강조를 많이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교회와 설교자에 대한 존중이 완전한 수준에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종교개혁가들의 자기부정도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잉글랜드 청교도주의에서는 국교회에서 이탈된 사역자들의 사상이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이해가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그러한 영향에서 선교회가 형성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으로 신학함, 혹은 성경을 해석하며 설교함에서 그리스도 예수, 주 예수 그리스도께 위임을 받은 사역자와 교회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를 섬긴다는 명목으로 교회와 사역자를 소홀하게 여기는 현상이 있으며, 성경을 강조하면서 예수 믿음에서 이탈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으로 신학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수용되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성경으로 신학했을 때에 심판관이 있으며, 그 심판관도 성경이지만, 심판할 기준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목표점입니다. 우리사회에서 차별금지법을 찬성하는 진영에서는 성경을 통해서 차별에 항거하는 예수를 목표로 하는 해석(손가락)을 제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손가락을 통해서 어떤 예수를 보여주어야 할까요? 성경만을 외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가리키는 목표를 외쳐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믿고 고백해서 구원을 얻음을 외치고 있습니다. 구주의 이름이 예수임을 고백하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잊어버린 YWHW의 이름,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시어 만유가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모두가 부르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그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 구주요, 우리를 악에서 구원할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불러야 합니다.

그러한 성경해석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죄와 악을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하여 자기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사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막 2:7, 히 9:22, 11:6). 하늘의 기쁨은 믿지 않은 영혼이 돌아오는 것입니다(눅 15:1-15, 눅 19:7).

성경을 해석함으로 믿지 않은 영혼이 돌아오며, 믿는 영혼이 강건할 수 있도록 합당한 의미를 도출해야 합니다. 영혼의 구원과 영혼의 성장을 위한 유일한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령의 사람인 해석자가 성경 본문의 합당한 해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할 때에 택한 백성이 성령으로 주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수 있는 은혜가 부어질 것입니다.

성경 해석자에게 힘써 복음을 전할 의무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성경 해석에서 참된 의미를 도출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힘써 복음을 전할 내용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신학함으로 많은 영혼을 구령하며 영혼의 양육을 도모해야 합니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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