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코로나 정국에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한국 기독인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매우 크다. 소돔과 고모라 도시를 향한 그의 기도는 기도자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이 관영하고 영적으로 완전히 타락한 도시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질문을 한다. 그 땅에서 의인 50명을 찾는다면 그 땅을 멸하시겠습니까? 40명을 찾는다면, 30명을 찾는다면, 20명을 찾는다면, 10명을 찾는다면 그 땅을 멸하시겠습니까? 그 땅에서 의인 10명만 있어도 그 땅을 멸하시 않겠다고 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소돔과 고모라 도시에서 살고 있는 조카 롯만 살려달라는 기도가 아니다. 모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끝까지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는 간구였다. 오늘 기독인들이 우리 사회를 향해서 품어야 할 마음의 자세이다.
소돔과 고모라성은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당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통해서 조카 롯은 구원을 받았다. 조카 롯이 의인이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창19:29). 이것이 중보 기도의 위력이다. 우리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 의인의 중보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힘이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테러 앞에서 우리 기독인들이 좀더 마음을 진정하고 예수님의 존전앞에 다시 서서 중보로 이땅을 섬기는 것 부터 시작하면 좋겠다.
"코로나에 대한 상반된 견해"
오늘 우리 사회는 이념 논쟁에 휩싸여있다. 코로나에 대한 상반된 견해을 가지고 있다. 정부가 코로나를 통해 프레임 전쟁으로 우리 사회를 몰고 간다고 생각하는 국민들도 많다. 한 측에서는 국민들의 건강과 생명과 안전을 위해 정부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곡해하고 있다고 본다. 각자 진영 논리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책임이 교회에 있다고 프레임을 만들고 공격하는 것은 교회의 영향력이 급격히 감소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조롱받는 이유-복음의 변질"
교회가 정치지도자들과 국민들로부터 조롱을 당하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복음이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복음의 변질은 두 가지이다. “반공이란 이름으로 복음이 이념화”되었고, 복음이 “물질화” 되었다. 또한 변질된 복음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일부 목회자들과 극 보수 그리스도인들의 강성 발언이 교회가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정죄하고 비판하고 나는 정의롭고 너는 잘못되었다고 손가락질하고 말하는 것은 아주 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사랑과 긍휼로 감싸고 눈물로 기도하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정신으로 복음으로 무장된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한국교회가 다시 시작점을 찾으면 좋을 듯하다.
"누구 의인인가? 누가 악인인가?"
소돔과 고모라성은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당했다. 여기서 의인은 누구이며, 악인은 누구인가? 의인이란 의로운 사람이다. 의란 다른 말로 정의라고 한다. 한글을 풀이하면, 모든 바른 일을 말한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근본적인 의란, 불의를 행하지 않는 청렴결백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뛰어넘는다.
성경이 말하는 본질적인 의는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다면 그것이 의인이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의이다.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가 씻김 받았음을 믿는 것이 의이다.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이 의인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것이 의이다. 천국과 지옥과 부활과 심판을 믿는 것이 의이다.
오늘날 코로나 정국에서 교회는 예배를 드려야하는가? 아니면 정부 당국의 협조하고 예배 드리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의인가?
기독교 역사를 뒤돌아보면 예배를 좋아했던 정부가 없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시절에 로마 정부가 기독교를 탄압할 때 교인들이 비밀히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던 지하 동굴 교회가 카타콤이다. 카타콤에서 생명을 걸고 예배를 드렸다. 동굴내부에 크리스챤을 표시하는 물고기 모양의 그림을 그렸다. 물고기를 헬라어로 “익투스”(lchthys)이다. 이 뜻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란 의미이다.
방역당국의 협조를 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의”이다. 예배 포기는 가장 쉬운 결정이다. 예배 인원을 줄이고, 예배 시간을 많이 만들어서 교인들이 예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더 성경적인 방법이다.
카타콤은 소수들이 모여서 들였던 예배이다. 카타콤에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예배를 드렸던 그 숭고한 본질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오늘날 비대면 사회에서 영상이 모든 것을 대치하는 만능 키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보완책은 되지만 영상예배로 성도들이 굳어져서는 안된다. 코로나 시대에 영상 예배를 우려하는 분들은 영상 만능주의로 예배가 변질될 우려가 있다고 본다. 모든 것을 영상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예배는 편하게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드리는 것이다. 방역을 철저히 하며 교회 장소에 따라 작은 인원들을 나누어서 드리면 얼마든지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인간상호간의 올바른 관계가 의이다.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고,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정직하게 행하는 것이 의이다. 반대로 인간 상호간의 올바른 관계가 깨진 것이 악이다. 원수, 상처, 배반, 불신, 차별, 모욕, 성취행, 동성애, 양성애등은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버린 행위이다. 그래서 악인 것이다.
코로나 확진자임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가지 않고 치료받지 않고 불특정 다수가 있는 곳에 버젓이 다니는 행위는 악한 행위이다. 반대로 코로나 확진자나 확진자와 접촉한 경우가 있다면 자가 격리를 해서 바이러스를 차단하는 것이 의이다.
자기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가 의이다. 자기가 소중한 존재인 것을 아는 것,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고, 세월을 아끼며 하나님의 비전과 사명을 실현해가는 것이 의이다. 인생을 낭비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꿈도 없이 생각없이 제 멋대로 살아가는 것은 악이다.
성도와 교회 사이에 바른 관계를 형성한 것이 의이다. 성도는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고 내 몸처럼 정성을 드리는 것이 의이다. 성도는 자신의 신분에 맞게 주어진 사명을 헌신적으로 감당하는 것이 의이다.
국가 방역에 협조하는 것이 교회가 사회에 내놓아야할 "의"이다. 바이러스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과 관련된 일이다. 철저한 예방에 협조하고 공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교회가 확진자의 양성소처럼 일부 정치가와 언론에 이용당해서는 안된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처신이 필요하다.
의인이란 바른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이다. 악인이란 정직하지 않은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다.소돔과 고모라성이 멸망당한 이유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버렸고,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버렸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바른 관계를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의인을 찾고 계신다. 말세에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을 함께 공유할 사람을 찾고 계신다. 말세에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헌신적인 의인을 찾고 계신다. 교회도 악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의인을 찾고 있다. 국민들도 정부를 향해 희망을 품고 있다. 이 땅을 밝게 비출 의로운 지도자를 찾고 있다.
의인과 악인은 반드시 결산할 때가 있다. 의인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같이 빛나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악인은 풀무불에 던져진다. 국가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국민을 위해서 헌신하면 반드시 인정받을 날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좇는 무리들은 반드시 결산의 때에 버려짐을 당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