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석운의 묵상일기】 마태복음21:1-11 “아, 예수님은 누구시며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 입력 2021.03.09 09:29
  • 수정 2021.03.09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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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욕망을 채워주는 예수님과 복음적 예수님

방석운 목사 / 용인 하베스트교회 목사, 명지대학교 & 서울신학대학원 졸
방석운 목사 / 용인 하베스트교회 목사, 명지대학교 & 서울신학대학원 졸

인류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최근만이 아니라 너무나 오랫동안 오해와 착각과 무지 가운데 있어왔다. 여기에 믿는 백성들인 교회된 우리도 자주 그분의 정체성을 놓친다. 예수님은 단지 내편, 우리 편을 넘어선다. 예수님은 만인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나와 우리만이 아니라 저기 있는 저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복음이다.

마태복음은 이제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부분을 향해 달린다. 상황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며, 이번 예루살렘 방문은 생애 예수님 사역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십자가로 가는 길이다. 이 직전까지 주님은 몇 번에 걸쳐서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아직까지는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아무도 모르거나 믿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생각을 쉽게 넘어서지 못한다.

예수님은 오늘 예루살렘 입성에 앞서서 제자들에게 이상한 요구를 하신다. 두 제자를 보내어 맞은편 마을로 가서 어느 집에 매어 있던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시킨 것이다. 그 집 주인이 무슨 말을 하면 “주가 쓰시겠다”라고 말하면 순순히 보내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마21:1-2). 예수님은 이상한 분이신가? 알쏭달쏭한 분인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과거 구약시대에 예언된 자신에 대한 말씀을 그대로 이루려는 것들이 종종 있다. 오늘도 나귀 새끼를 언급하신 것은 스가랴9:9의 오실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응하게 하신 것이다(마21:4,5).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기름부음 받은 위대한 왕이심을 알리려 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찬양 받으실 위대한 왕이시다. 이와 관련하여 이사야62:11에는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시편48:1,2에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라고 기록했다.

예수님의 나귀새끼 요구는 결코 그의 이상하고 야릇한(an odd) 행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이 땅에 오신 당신의 목적인 ‘내가 누구인가?’를 나타낸 것이다. 제자들은 지금 이것을 어떤 퍼포먼스로 보고 있지만 나중에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낸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또 하나의 상황은 군중들의 반응이다. 예수님은 당신께로 끌어 온 나귀 새끼의 등에 타고 예루살렘 성 입구로 등장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바로 뒤를 따르고, 그동안 예수님을 뒤따르는 무리들과 소문을 듣고 나온 예루살렘성 안의 많은 사람들은 길 양옆으로 갈라져서 마치 레드카펫 모양으로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펴서 예수님을 환대하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찬양한다(마21:9).

대체 이들의 샤우팅은 무엇에 대한 것인가? 그들은 자기들이 외쳐 부르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그들은 정말 예수께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분’으로 믿는 것인가? 예수님을 진정 왕으로 인식하고 믿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자기 기대인가? 예수님은 그들의 말대로 그들의 구원이시고, 그들의 승리자가 맞는가?

지금 예수님을 환영하는 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것 같다. 바로 얼마 전 병자들과 맹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며 다가온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들을 질병과 질고에서 구원해주실 분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중들이 여기 예루살렘 성 양편으로 서서 예수님을 향하여 드높여 찬양하는 것은 이분이 지금까지 자신들을 얽매어 왔던 이 땅에서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해 줄 분임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예수는 이제 이스라엘의 수많은 백성들의 그리스도로 알려지게 되고 기대되고 있다.

예수는 누구신가? 그분은 어느 때보다 예루살렘 온 성에 큰 소동이 일어날 만큼 핵심이 되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마21:11). 사람들의 인식은 예수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선지자’다. 이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예수는 일찍이 모세가 말한 ‘여호와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킬 것이다’(신18:15)라는 그분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요6:14)로 안다. 예루살렘의 군중들은 예수님이 바로 그분임을 믿는다. 과연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건가?

나와 우리와 그들에게 예수는 누구신가?는 복음의 모두이고 핵심이다. 이 정체성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함이 없는 것이지만, 때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나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해는 자기 이해관계와 연결된 선에서 그친다. 이들이 입으로 외치는 ‘우리의 구원자,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도 얼마가지 않아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돌변하는 바로 그 차원이다. 나에게 더 이상 유익한 힘이 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 우리 모두는 그 정도에서 오십보백보다. 십자가로 끌려가도록 배신하는 가롯 유다는 말할 것도 없지만, 십자가의 예수님을 피해 도망가는 열한 제자들의 이해관계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누구신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이며 따르는 것은 확실히 다른 차원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시인하는 것과 상관없이 우리의 육욕적 탐심을 온전히 제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예수님을 잘못 생각하게 된다. 신앙생활과 사역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우리가 하나님을 통해 우리의 일을 하려는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나의 야망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것은 결국 영원부터 변함없이 계시는 예수께서 누구신가를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나와 함께 죽고자하시는 주님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고, 또한 죽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 영광을 아직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을 말하면서 자기확장, 자기인정의 문제는 신앙생활 내내 괴롭히는 나의 아킬레스건과 같았다. ‘내가 죽고 그분이 사는 삶’을 온전히 믿고 바라지 않는다면 어느 새 나는 그 일의 대부분에서 착각하고 산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이것은 그분이 매일 우리에게 물으시는 물음이다. 나는 매일 이 물음을 마음에 담고 대답하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만나는 사건, 만나는 사람, 모든 일에서 나는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해 복음중심적 사고와 복음중심적 태도와 행동을 하고자 하는 대답 외에는 예수님에 대한 다른 어떤 생각이나 기대를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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