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성이라는 회전축으로 시대를 조망하는 말씀사역자
대언자는 자신이 서 있는 시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시대의 징조를 알고 그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조짐을 보고 시대의 흐름을 감지하는 것은 자신을 아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은 대언자의 사역이 펼쳐지는 장(場)으로서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회전축 역할을 한다. 현실 감각이 뛰어날수록 과거를 해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통찰력이 예리하다. 자신의 일생만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한 시대를 조망할 수 있음은 대언 사역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메신저가 시대정신에 뒤처지거나 시대의 흐름을 꿰뚫지 못하면 시대를 위한 메시지를 전하기 어렵다. 이미 한물간 시대용 메시지를 웅얼거리거나 딴 세상의 이야기처럼 먼 미래의 환영을 좇는 듯한 취언을 쏟아내기 십상이다. 시대를 정확히 파악하는 혜안은 메신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우선적인 덕목이다. 같은 시대, 동일한 시간대를 살며 편차가 매우 심한 삶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간의 이질감을 극복하며 공동선을 이루어내려면 무엇보다 메신저의 먼저 보고 먼저 알아 먼저 행함이 실체화되어야 한다.
선지자는 선견자로서 “먼저 보는 사람”이다. 선지자는 ‘남들보다 먼저 보아서 먼저 아는 자’다. 오늘날에는 사물이나 사건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을 가리켜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다고들 말한다. 누군들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을까? 예측을 잘못 해서 낭패를 본다든지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파국에 처하게 되었을 때 소위 선견지명이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일수록 상처가 크고 깊다. 선지자의 선견 능력은 이런 선견지명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것은 지성의 정상에서 획득하는 전리품이 아니라 영적 단련의 어느 시점에서 우러나오는 내적 존재의 충일함이다.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나누는 다림줄인 선견성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며 성령에 뒤덮인 영혼에게 베푸시는 선물이다.
현실을 간파하고 미래를 스케치하는 말씀사역자
오늘 선지자라 일컬어질 만한 말씀 사역자들에게 이런 능력이 있는가? 앞일을 알 수 있다는 관점에서 신화 속에서나 운위될 내용이라며 손사래를 치는 것은 아닌가? 선지자의 선견성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을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용한 점쟁이의 술력 따위가 아니다. 각 시대마다 역사하는 하나님의 뜻을 간파해냄이며 물처럼 흐르는 시대정신의 움직임을 감지함이다. 사람들은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미래는 고사하고 내일 일조차 생각할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간다. 매일 싸워 극복하며 지키고 차지함으로 소중한 삶을 이어가야 하기에 다가올 내일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 내일도 오늘 같은 하루로 맞이해야 할 긴박함 때문에 미래의 관문으로서 내일을 맞이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사는 사람들에게 선견성이란 별나라에 속한 개념이리라. 메신저는 달라야 한다. 메신저로 부름 받았기에, 그 길을 가기로 결단했기에 그런 일상에 매이지 않고 초연할 의무가 있다. 적어도 선지자는 현실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때때로 역사와 운명, 시간과 영원, 삶과 죽음을 관조하며 자신이 먼저 보고 들은 일을 본 대로, 들은 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줄 사명이 있다.
선지자의 먼저 보는 능력은 그 자신의 학문이나 인생 경험의 산물이 결단코 아니다. 이는 오로지 영적인 지각으로 말미암은 지혜다. 지난 역사의 의미를 깊이 있게 해석하고 현실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어보며 다가오는 미래를 스케치할 수 있는 입체적 안목의 능력이다. 혜안(慧眼)이라고도 부른다. 단면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새가 공중에서 사물을 통시적으로 관찰하듯 그렇게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안력이다. 사색의 영역에서는 일종의 '창조적 동시성'(creative synchronism)을 확보함이다. 공상과 망상의 수렁을 지나고 상상의 안개 지역을 통과함으로 앎과 깨달음이 융합되는 지각(知覺)의 찬란한 이상에 도달함이다. 알을 깨고 나오는 괴조(怪鳥) 아프락사스처럼 선지자는 형식지(explicit knowledge)의 틀을 깨고 암묵지(tacit knowledge)의 생명을 보인다.
우주의 역사로부터 개인의 생애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
다윗에게는 이와 같은 능력이 있었다. 그의 안력은 영력에서 비롯된 열매였다. 그가 성경에 남긴 고백의 글들은 삶의 필사였고 영혼의 율동으로서 높고 깊은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전혀 시간에 속박됨 없이 영원에 결탁된 한 영혼으로 다윗은 자신의 시대가 오로지 주의 손에 있음을 절절이 고백했다. 이는 주님의 주권이 우주의 역사로부터 개인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 세밀하게 미치고 있음을 고백한 내용이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에게서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시 31:15)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당신의 시대(나의 앞날)는 오직 주님의 손에 있다. 당신을 영원하신 뜻에 따라 택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정한 때, 정한 곳에서 정해진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도 주님이시다. 당신의 가족을 이루게 하시고 숱한 사람들을 친구와 원수로 만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
당신으로 생존케 하시며 삶의 모든 과정을 겪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당신이 겪는 모든 일들은 주님이 허락하신 삶의 환경이다. 당신의 영혼을 정하신 때에 정하신 곳에서 정해진 모습으로 거두어 가실 분도 주님이시다. 천 명이 당신 왼쪽에서, 만 명이 당신 오른쪽에서 엎드러져도 죽음의 재앙이 당신을 덮치지 못하는 것은 당신을 품으신 하나님의 날개 그늘이 워낙 크고 안전하기 때문이다. 당신 인생의 시작처럼 마지막 역시 오로지 하나님의 장중에 놓여 있음을 기억함이 곧 은혜요 능력이다. 오늘의 당신이 있기까지 당신의 앉고 서는 것, 동하고 정하는 모든 것, 오름과 내림, 나아감과 물러섬, 이 모든 것이 당신 뜻대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실상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당신은 자유롭게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만 누리는 자유이며 원한다고 해서 당신이 한시라도 하나님의 영역을 벗어날 수는 없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형통과 곤고, 흥망성쇠, 생사화복과 같은 삶의 다양한 체험들이 모두 주님의 손에 있다. 욥의 고백처럼 “주시는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시는 자도 여호와”이시다. 당신을 흥하게 하시는 이도 주님이시요 당신을 망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모든 일들이 오로지 주님의 손에 있다.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의 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당신의 실상이다. 작게는 개인의 삶에서부터 크게는 인류의 운명에 이르기까지, 짧게는 이 순간에서부터 넓게는 인류의 전 역사에 미치기까지 모든 것이 주님의 주권 하에 있다. 이 세상의 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고가는 세대를 거쳐 영원의 끝자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하나님이 뜻하시고 정하신다. 이 사실을 모름에서 인간의 모든 탐욕과 비정한 술수들이 활개를 친다. 이 사실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당신의 삶은 보다 외경심으로 진지해질 것이다.
안으로는 인내 밖으로는 관용이 성도의 삶
인간과 세상을 향하신 주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 어찌하여 악인이 번성하며 의인이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해야 하나? 왜 세상이 어긋난 길로 나아가는데도 하나님은 침묵만 지키는 것일까? 왜 살만한 사람은 일찍 데려 가시고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은 사람은 계속 머물러 두실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면서 세상의 불공평을 그냥 내버려두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역사상 이런 질문은 주로 의인 그룹에서 쏟아졌다. 시편 기자들이, 욥이, 예언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도들이 답변 없는 질문에 괴로워했다. 우리 역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시다. 아마 세상 역사가 끝나는 시점에 이르러서도 이에 대한 해답은 얻지 못할 것이다. 성경은 이와 관련하여 문제에 대한 해답 대신 근본적인 정답을 ‘심판’의 그림에 담아두셨다. 각 시대마다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를 여는 심판이 있었다. 지금껏 행해진 제국과 인간 역사에 대한 심판들은 미구에 들이닥칠 마지막 심판에 대한 밑그림들이다. 최후의 심판대에서 모든 의문들에 대한 해답이 하나의 정답으로 드러날 것이다.
시대의 징조가 수렴되는 꼭짓점이 곧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모든 징조가 이 한 가지 표적에 집중된다. 성경은 주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야 할 성도들의 모습을 분명히 제시한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빌 4:5) 세상 사람들은 성도가 보이는 관용의 삶을 통해 시대의 징조를 느낀다.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의 표적인 때의 징조와 연관하여 세상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 초점을 맞춘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8) 안으로는 스스로의 인내, 밖으로는 타인을 향한 관용이 시대의 징조를 의식하고 사는 성도의 생활 태도임을 강조한다.
왜 전능자께서 반역하는 인간을 처단치 않으시고 길이 참으시는 중에 그의 뒤를 가만히 추적하시는 것일까? 영원한 세계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한낱 미세한 먼지 한 조각에 불과할 뿐인 인간에게 마음을 기울일만한 하등의 이유도 없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쏟으시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사랑 외에는 달리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성경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과 심정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한 공의로운 심판이 유예되긴 했어도 마지막 심판은 필연적으로 실현된다. 모든 뒤집힌 것들이 제자리를 잡고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번성이라는 난제도 그때 풀릴 것이다. 종말의 마지막 휘장을 거두실 하나님은 그 미래의 정점에서 오늘을 바라보시며 빙그레 웃고 계실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 경륜을 믿는 이들은 그래서 현실의 벽 앞에서 선악 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분의 선하신 뜻이라고 밖에는 달리 대답할 말이 없다. 그것은 체념이 아니라 가장 거룩한 신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