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제언】코로나 한국교회, 지금이 1세기 원형교회를 재현할 기회다 (1)

  • 입력 2021.04.19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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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색적인 성경 대신 설교가 중심이 된 교회

이대희 목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Th. M).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성경학박사과정(D.Litt)을 졸업했다. 예장총회교육자원부 연구원과 서울장신대 교수와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그동안 성경학교와 신학교, 목회자와 교회교육 세미나와 강의등을 해오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에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평생말씀학교인 "예즈덤성경대학"을 20년째 교수하고 있으며 극동방송에서 "알기쉬운 기독교이해" "크리스천 가이드" "크리스천 습관과 인간관계" "재미있는 성경공부" "전도가 안된다구요"등 성경과 신앙생활 프로그램 담당했으며 다양한 직장 소그룹 성경공부 사역을 하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현장 사역 경험(소형.중형.대형교회,개척과 담임목회)과 연구를 토대로 300여권의 저서가 있으며 "이야기대화식 성경연구"와 "30분성경교재 시리즈"와 다양한 실천 프로그램을 제시한 저서(“유대인 밥상머리 자녀교육법” (2016년 세종도서 우수도서 ). “한국인을 위한 유대인공부법” (대만번역 출간), “유대인의 파르데스공부법“ 등 다수가 있다. 현재 꿈을주는교회 담임목사. 예즈덤성경교육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이대희 목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Th. M).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성경학박사과정(D.Litt)을 졸업했다. 예장총회교육자원부 연구원과 서울장신대 교수와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그동안 성경학교와 신학교, 목회자와 교회교육 세미나와 강의등을 해오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에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평생말씀학교인 "예즈덤성경대학"을 20년째 교수하고 있으며 극동방송에서 "알기쉬운 기독교이해" "크리스천 가이드" "크리스천 습관과 인간관계" "재미있는 성경공부" "전도가 안된다구요"등 성경과 신앙생활 프로그램 담당했으며 다양한 직장 소그룹 성경공부 사역을 하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현장 사역 경험(소형.중형.대형교회,개척과 담임목회)과 연구를 토대로 300여권의 저서가 있으며 "이야기대화식 성경연구"와 "30분성경교재 시리즈"와 다양한 실천 프로그램을 제시한 저서(“유대인 밥상머리 자녀교육법” (2016년 세종도서 우수도서 ). “한국인을 위한 유대인공부법” (대만번역 출간), “유대인의 파르데스공부법“ 등 다수가 있다. 현재 꿈을주는교회 담임목사. 예즈덤성경교육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1세기 원형교회를 움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 보이는 교회 건물도 없는데 무엇이 교회를 성장하게 했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중심인 성경 속에서 예배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순서다. 당시 예수님과 바울은 어떻게 회당예배를 드렸을까? 예수님의 회당예배에 참여한 모습은 누가복음 4:16-30에 잘 소개 되어 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참석한 유대인의 회당예배 전통은 성경읽기가 중심이었다.(눅 4:16-20) 토라와 예언서와 시편의 말씀을 읽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묻고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그대로 이어져 설교보다 성경 읽는 시간이 예배의 중심이었다. 초대교회를 연구한 학자들은 초대교회는 설교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초대교회 신앙이 뜨거웠던 것은 원색적인 말씀 자체와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성경 읽는 시간이 예배 속에서 사라지고 설교가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초대 교부들이 성경읽기를 설교로 대치하면서 부터다. 그 배경은 초기 기독교에서는 성경을 평신도에게 주어지지 않은데 있다. 그래서 교회 성도들이 예배 속에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오직 사제들만 성경을 갖고 있었다. 그것도 어려운 라틴어 성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예배 중에 성경읽기가 불가능했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설교가 대신했다. 당시에는 당연한 현상이었다. 교회가 성경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번역을 하지 않았다. 중세 교회는 무려 1000년의 기간 동안 성도들은 성경 없이 신앙생활을 했다. 당시 초대교부인 크리소스톰(chrysostom, 347-407)은 대표적인 설교가였다. 그는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당대 뿐 아니라 지금까지 대부분의 설교자가 본받고 싶은 로망의 인물이다.

콘스타틴노플에서 크리소스톰 설교보다 더 능력 있고 재치 있는 설교를 들을 수 없었다. 그가 전하는 설교는 사람을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고 사람들이 더 잘 들으려고 강단을 향해 몰려들기도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강단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설교자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설교를 듣고 싶게 하는 놀라운 흡입력을 생각하게 장면이다.

초대교회는 강단이 없었다. 예배당 건물이 없었기에 강단 같은 것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유대인 회당이 있었지만 회당 역시 크지 않았기에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강단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

필자가 예루살렘과 미국에 있는 유대인 회당 등 여러 곳에서 예배를 드려 본 경험을 보더라도 그런 곳에서 지금의 설교학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오히려 지금도 랍비들의 설교는 거의 없고 웅변처럼 연설을 한다든지 하는 모습은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기도와 함께 하는 찬양( 찬양 리더가 없는)과 토라와 시편과 예언서 등을 번갈아 가면서 회중이 같이 성경을 읽는 시간이 2시간 넘는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설교 20분에 마치고 예배 1시간 안에 끝내는 방식이 아니었다. 지루하다시피한 예배시간은 설교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유대인은 어린이들까지도 2시간 넘은 시간을 인내하면서 참여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1세기 교회의 성경적인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초대교회 역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전하는 방식이나 작은 모임에서 예배를 드렸기에 지금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보인 예배당에서 설교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교회 건물이 생기면서 강단이 생겼고 강단 설교가 본격적으로 도입이 되었다. 한 사람의 설교를 듣는 일방적 강단설교가 생겼다. 이런 배경을 먼저 이해하고서 지금의 설교를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이런 점에서 크리소스톰은 강단 설교를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유입시킨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콘스탄틴 기독교 공인 후에 성당이 세워지면서 이것은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한 사람의 소피스트에 의해 청중들이 환호하고 박수를 지면서 말에 감동을 받는 방식은 그리스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이것은 교회건물과 연설이 조합된 필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큰 교회당 건물일수록 이런 연설 방식의 설교가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이런 흐름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중세교회의 타락은 성경자체를 읽는 일 보다 탁월한 언변을 가진 1인 설교에게 집중할 때 시작되었고 유럽교회 역시 이런 역사를 반복하여 지금은 교회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지금 한국교회도 이런 연속성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게 우리 교회를 점검해야 한다. 이대로 갈 것인가? 아니면 1세기 초대교회의 원형을 재현할 것인가?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지금 전환하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어쩌면 유럽교회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음을 역사가 교훈하고 있다.

우리 교회가 어떻게 1세기 원형교회의 말씀의 능력을 회복할 것인가? 그것은 말씀 자체에 집중하는 일이다. 그중에 우선적인 일이 성경읽기 회복이다. 설교보다 능력 있는 성경읽기의 힘을 한국교회 성도들이 예배 속에서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위기의 시대를 이기는 원초적인 복음의 힘이다.

우리도 예수님의 방식대로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면 좋을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원형을 회복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지금 한국교회도 이런 방식으로 새롭게 갱신하면 좋을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선교 여행 때 유대인 회당에서 늘 행했던 예수님과 같은 방식을 따랐다. ( 사도행전 13:14-43, 사도행전 17:1-9) 바울은 자기의 모든 일을 그리스도가 행한 대로 그 본을 따랐고 자기가 행한 그 본을 교회를 향해 따르라고 권면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된 것처럼 너희도 나를 본 받으라(고전11:1) 고 말한 것을 따라 우리 교회도 지금의 예배모임을 새롭게 갱신할 필요가 있다. 지금 코로나 시기는 한국교회가 이것을 새롭게 갱신할 절호의 기회다. 초대교회와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은 성경읽기의 회복부터 시작해야 한다. 예수님의 성경읽기 방식은 그대로 초대교회에도 이어져 갔다. 요한이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해 쓴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 부분에 언급이 나온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서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요한계시록1:3) 사도 요한은 성경 읽기의 3단계를 제시하고 있다. 읽기-듣기-지키기 이다. 이런 과정은 초대교회에 행해졌던 방식이고 이것은 예수님이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지상 명령과도 연결된다.

예배를 이끄는 중심은 무엇일까? 우리는 당연히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의 전통에서 보면 성경읽기다, 성경읽기(miqra.미크라)는 성경을 소리 내어(읊조리며) 읽는 것으로 선포의 의미가 있다. 성경 읽기는 설교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성경 본문 없는 설교는 없다. 성경읽기는 설교 보다 더 원초적인 시간이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선포의 시간이 곧 성경 읽기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주객이 전도가 되었다. 이것이 교회를 약하게 한 그동안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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