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언자의 자세 "성실함, 진지함, 담대함 그리고 열정"

  • 입력 2021.10.07 10:47
  • 수정 2021.10.07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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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71)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대언자의 자세. 성실함, 진지함, 담대함 그리고 열정

대언자는 바른 자세로 말씀에 임해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인간의 영혼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염원이 대언자의 마음에 가득 고여 있어야 한다. 말씀으로 영혼을 각성시키려면 대언자의 영혼이 먼저 각성되어야 한다. 대언자에게 눈물이 없으면 듣는 이들에게서 뜨거운 눈물을 솟구치게 할 수 없고 대언자에게 말씀으로 인한 감격과 감동이 없다면 그들에게서도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청중들의 욕구가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따르고 회중들의 필요를 채우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관철시키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청중의 욕구를 의식하거나 내용에 대한 반응을 염두에 두면 비겁해지기 쉽다. 청중의 눈치나 살피는 못난이가 되어버린다. 대언자는 말씀에 정통하고 진리에 밝은 말씀의 전달자로서 말씀에 수종들려는 종 의식이 무엇보다 투철해야 한다. 청결한 마음과 깨끗한 양심, 거룩한 삶과 복음에 대한 열정은 그 다음이다.

대언자는 권위 의식이 아니라 겸비로 스스로를 무장시키고 말씀이 지닌 권위 안에서 말씀으로 영적 권위를 발산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담대함과 하나님 앞에서 갖는 두렵고 떨림은 대언자가 지닌 영적 권위와 겸비의 양면이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담대히는 대언자를 위한 황금률이다. 메신저가 견지해야 할 외적 자세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변화를 보일지라도 내적 자세는 예언자들이 보여주었던 확고한 길을 따라야 한다. 많은 자세를 생각할 수 있지만 성실함, 진지함, 담대함 그리고 열정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다. 이 넷을 조합하면 확신의 모습이 뚜렷해진다. 확실한 진리를 확신 있게 전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확신은 용어와 표정과 몸짓에 그대로 묻어난다.

성실함으로 전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렇게나 전할 수 없다. 정성과 진실함으로 전해야 한다. 정성스러워야 함은 말씀 선포가 사람의 영혼이 누릴 영원한 운명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진실해야 함은 말씀의 내용이, 말씀이신 하나님 자신이 진실하시기 때문이다. 정성과 진실함은 말씀 사역자가 진리의 말씀 속에서 진실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얻을 수 있는 덕목이다. 오늘날 대중의 인기와 영합하여 말씀의 위엄찬 대언을 가벼운 만담으로 대치하는 풍조는 악의 산물이다. 희극적인 요소로 사람들의 웃음을 끌어내는 동안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에서 아찔한 줄타기를 하던 영혼은 돌이킬 수 없는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떨어지는 장본인도 비극이지만 그렇게 방조한 전령에게는 화이며 저주이다.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놓인 영혼들의 비참한 운명을 알았기에 지난 세기 대각성 운동의 선구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목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함으로 일관했다.

중생치 못한 영혼들의 비참함을 보았기에 17세기 중반의 조셉 얼라인(Joseph Alleine) 목사 역시 진지한 회개의 메시지에 불을 붙였다. 주님의 메시지에는 희극적 요소보다 단연코 진지함이 돋보였을 것이다. 정성이 사라지면 말씀 사역자에게 남는 것은 볼품없는 경망스러움뿐이다. 말씀 전달에 있어서의 가벼운 처세는 진실성을 갉아먹는 해충과 같다. 대언자는 자신이 전하는 말씀을 확신해야 한다. 확신으로 꽉 찬 상태에서 전해야 진실한 대언이다. 확신 없이는 진실도 없다. 바울 일행의 고백은 성실한 말씀 전달자의 자세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진리를 거스를 수 없는 말씀의 전령에게서 쉬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성실함이다. 진실함(truthfulness)이 곧 성실함(faithfulness)이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 13:8)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23:28)

 

오늘 불성실한 말쟁이들의 메시지에는 천편일률적인 만담은 있으나 예언의 소리는 없다. 영적 희열이 아닌 가벼운 웃음에 말쟁이들의 영혼만이 아니라 말씀까지 가벼워지는 것 같아 마음 아프다. 말씀이 조롱당하고 진리의 영이 업신여김을 당하는 오늘의 강단을 직시하면서 아무런 의분도 느끼지 못한다면 슬픈 일이다. 아픔을 아픔으로, 슬픔을 슬픔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현실이 기막힐 뿐이다. 청중들이 환호하고 교회가 환영하는 이 시대의 대언자가 과연 누구인가? 부드럽고 감미롭고 화사하고 친절한 가이드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시간과 물질의 대가를 지불했으니 그에 상응한 대접을 기대하는 관광객 같은 심리가 청중들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닌지! 말씀을 통해 최선의 서비스를 받는 것이 아니라 최상의 섬김(service)을 베풀어야 한다.

청중의 기대감을 따르지 말고 언제나 말씀을 주신 분의 뜻에 초점을 맞추라! 하나님이 만족하셔야 그 말씀이 살아난다. 성실한 대변자는 자신을 뜻을 섞지 않는다. 대변인이 성명을 발표한 후에 기자들의 질문을 답변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해석을 가미한다면 대변인 자격이 없다. 대변인은 나팔이요 북이다. 불면 부는 대로, 두드리면 두드리는 대로 울리는 하나의 소리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가감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빠뜨리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심각한 것은 뭔가 더하는 것이다. 말씀에다 자신의 생각을 섞으면 말씀의 영광이 가려진다.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30:6) 뜨거운 용광로에 일곱 번을 단련한 정금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무흠하고 완전무결해서 더하거나 뺄 요소가 없다.

 

진지함으로 전하라!

솔직히 당신은 너무 안일한 웃음에 길들여져 왔다. 지옥과 죄와 심판에 관한 설교에 얼굴을 찌푸리거나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이미 당신 자신이 성공과 축복과 자기긍정의 메시지에 중독되었다는 반증이다. 당신은 내면의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지 않기에 비쩍 마른 자기 영혼의 모습을 알아채지 못한다. 이럴 때엔 당신에게 익숙한 말씀들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적당히 타협되고 각색된 말씀들은 이미 말씀 특유의 힘을 잃어버렸기에 당신의 귀를 지나 영혼까지 이르기도 전에 소멸되어버린다. 천국의 소망은 있으나 천국의 실체를 느끼지 못한다. 가벼운 말씀이 당신에게 전해준 것은 천국에 관한 가벼운 스케치에 불과하다. 성경 자체가 노래하는 천국의 장엄한 실상이 빠져 있다.

영원을 노래하면서도 당신의 관심은 온통 현세의 삶에 집중되어 있다. 더 많이 추구하고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는 만인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시대정신이 되다시피 했다. 탐욕의 처절한 끝이 보임에도 그 끝 간 데를 보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은 성경을 손에 쥐고 교회를 드나들며 종교 란에 기독교라 적어 넣는 것 이외에 별반 다른 차이가 없다. 불신자보다 결코 나을 것 없는 당신의 삶이 말씀의 결핍을 인정케 만든다. 당신이 처한 시대상황은 웃음보다 담즙 같은 말씀을 필요로 한다. 포복절도보다는 방성대곡하게 할 말씀, 편안히 앉아 말씀을 들을 수가 없어 무릎 꿇고 가슴 치며 들어야 할 말씀, “우리가 어찌 할꼬?” 울부짖으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기다리게 하는 말씀, 아프더라도 환부의 종양이 제거되어 시원함을 느끼게 하는 그런 말씀, 깊은 잠을 깨우는 말씀, 화재 경보음처럼 화급을 다투는 그런 말씀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예언이 그 입술에 담기지 않는 말씀 사역자, 예언자의 심장이 없는 대언자는 이 시대에 필요하지 않다. 기도에 불이 붙어 기도하기를 밥 먹듯 하는 종, 말씀에 파묻혀 그 입에서 이한 검처럼 말씀이 역사되는 대언자, 영혼 사랑으로 그 마음이 불타오르는 불꽃 사역자가 필요하다. 바람 앞에 가물거리는 촛불이 아니라 타오르는 횃불이 되어 이 강산을 밝힐 말씀 사역자들이다. 이들은 한 방향을 응시하는 시선의 힘을 모은다. 동일한 비전의 시대적 실현을 위해 동무들과 더불어 몸부림을 친다. 브니엘의 새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얍복 나루터에서 함께 뒹군다. 기도로 시커먼 밤을 새하얗게 새운다. 말씀의 용광로에다 모두의 마음과 생각, 언어와 행동거지마저 녹인다. 그렇게 해서 한 줌의 누룩으로 화해 간다. 주님의 손에 쥐어진 한 줌의 누룩이 되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억 만의 가루도 맡겨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여! 한 줌의 누룩들을 일으켜 복음의 최전선마다 그들을 세워 주옵소서! 가루 세 말을 부풀리는 것은 한 줌의 누룩이면 족하옵니다. 가루 한 말조차 부풀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누룩을 모두 합쳐도 반 줌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을 부풀리는 것은 제대로 된 누룩이 아니라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입니다. 우리가 순전한 누룩이 되기를 거부하는 동안 괴악한 누룩이 세상을 뒤덮었나이다. 주님! 우리의 불충을 용서하옵소서! 이제라도 우리를 거룩한 누룩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그래서 변질된 영혼들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놓게 하옵소서! 그러기 전에는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없사옵니다. 저를 쓰시고자 하신 뜻 그대로 사용하신 후에 버리시더라도 마음껏 쓰시고 버리시옵소서! 저는 단지 무익한 종일뿐이옵니다.

 

진지한 말씀을 우스꽝스럽게 여기는 경청자도 있지만 진지하게 들으려는데 경박하게 전하는 자들도 있다. 복음은 지상의 옷을 입은 천상의 언어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늘의 운율이 있다. 노래 가락이나 시를 읊는데도 운율이 따르면 신이 나고 흥을 돋운다. 하늘의 말씀이 울려 퍼지면 영혼은 전율한다. 전율은 영혼이 하늘의 운율을 감지할 때 일어나는 자연적 반응이다. 신중함이 지나쳐 실기(失期)하는 경우도 있지만 말씀 전파에 진지해서 잃을 영혼은 없다. 진지함이란 신중함보다 심각함에 가깝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두고 다투는 영적 싸움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일이다. 가볍게 다룰 사안이 전혀 아니다. 진지하라!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라! 대언자는 하나님의 입이 되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한다. 하나님의 심정을 세상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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