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80)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7. 사모하며 듣는다.

말씀 듣는 자세를 3주에 걸쳐 다루는 것은 그만큼 말씀 사역에서 경청이 차지하는 비중이 실제로 크기 때문이다. 들은 말씀을 깨달아 구체적 실행으로 이어가려면 바른 경청이 무엇보다 전제되어야 한다. 말씀을 사모함은 영혼의 특권이다. 정금보다 귀하게 여기고 송이꿀보다 더 달게 여기는 마음의 열정이다. 시냇물을 찾아 갈급해하는 목마른 사슴의 갈망이다. 사모함이 지나쳐 숨이 차서 못 견딜 만큼 넘쳐흐르는 사모함이다. 은혜와 능력의 역사는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에 비례한다. 어린 사무엘은 자신을 불러내신 분이 엘리 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알자 세 번째 부름을 손꼽아 기다렸다. 놓쳐버린 두 번의 부름을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간절히 사모했다. 다행히 하나님은 사무엘을 세 번째 불렀고 사모하는 마음을 불태우던 그는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

언니의 분주함을 알고도 마음 빼앗기지 않을 정도로 마리아에게는 말씀 사모의 영이 가득했다. 비난을 감수하면서라도 주님과의 말씀 교제를 최상으로 여긴 마리아는 보다 나은 선택의 길에 있었다. 마르다는 주님의 입에 무언가 채울 것으로 몸 달아 했지만 마리아는 주님의 입에서 나올 말씀이 무엇일지, 어떤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을 채울 지에 가슴 뛰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최선의 삶은 주님을 위한 최선의 섬김보다 자신을 위한 최선의 말씀을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다.

최선의 섬김보다

최선의 경청

8. 믿음으로 듣는다.

정신을 집중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마음을 열어 사모하면서 말씀을 들어도 결국 믿음이 수반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말씀은 믿음으로 들어야 한다. 잡생각을 버리고 정신을 집중할 때도 믿음을 붙들어야 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도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마음을 열고 말씀을 들어도 믿음에 뿌리내려야 한다. 말씀을 향한 사모의 마음도 믿음과 나란히 동행해야 한다. 듣는 말씀에 믿음을 화합해야 실질적인 유익을 얻는다. 주님의 모친 마리아는 십대의 어린나이에 엄청난 말씀을 들었다. 느닷없는 천사의 방문에 이어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이 해일처럼 마리아를 향해 덮쳐왔다. 아무런 전후 설명도 없이 예언의 성격을 담은 말씀이 일방적으로 그녀에게 선포되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이 아들이라 일컬으리라(1:35)

천사와의 간단한 문답이 있은 후에 마리아는 아무런 주저 없이 반응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1:37)는 가브리엘 천사의 선언이 마리아의 믿음에 불을 댕겼다. 말씀의 무궁한 능력을 믿지 못했다면 마리아의 고백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간의 의혹이 안개의 걷힘같이 사라지자 말씀의 실현이 햇빛처럼 그녀의 마음을 믿음으로 꽉 채웠다. 말씀의 내용이 자신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확신하고 동의하면서 고백했다. 이 짧은 고백은 말씀과 연관하여 한 인간이 하나님께 올린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언어로 우리 모두에게 기억되고 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1:39)

믿음으로 말씀을 듣는 사람이 위대한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 황홀한 운명의 개척자가 된다. 탁월한 문제의 해결사가 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을 수 없는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의 모친이 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믿음으로 듣는 말씀

9. 졸면 안 된다.

오늘날 설교자가 가장 많이 경험하는 것이 청중들의 졸음이다. 피곤하면 졸음이 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인간의 육체가 지닌 한계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상적인 연락을 즐길 때는 피곤이란 것도 눈 녹듯 사라지는데 말씀을 들을 때 조는 것은 잘못이다. 말씀을 듣는 시간에 습관적으로 조는 사람은 그것이 육체적 피로의 결과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영적인 문제이다. 설교만 끝나면 그렇게 활기찬 모습을 보이는 자들이 유독 설교 시간에 습관적으로 조는 것은 변명할 길이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설교 시간에 습관적으로 조는 것은 육신의 현상이기 이전에 마귀의 장난이요 악령의 역사이며 귀신의 수작이다. 심한 표현 같지만 이것이 영적 실상이다. 졸면서 은혜 받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졸면 본인의 영혼에도 유익이 없고 설교자의 시선을 흐트러지게 하므로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졸음을 물리쳐야 한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20:9)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설교 시작하면서 졸면 듣는 이의 문제지만 설교 도중에 졸면 설교자에게 책임 있음을 주장했지만 그렇게 단정 지을 수만은 없다. 육체의 피로감이나 무기력한 설교만이 아니라 졸음의 배경에는 사탄의 개입도 있기 때문이다. 졸음은 육신의 현상만이 아니라 영적 문제임을 인정하고 졸음 퇴치를 위한 기도와 더불어 말씀에 임하는 영적 자세 확립에 만전을 기함이 옳다. 졸음을 쫓기 위한 여러 방법을 고려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설교 듣는 자세를 확립하기 위한 경건의 훈련을 거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혼자의 힘으로 어렵다면 영적 지도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믿음의 초기에 설교 도중 나타나는 졸음 문제를 다스리지 못하면 신앙 성장에 큰 장애를 일으킨다.

마귀는 말씀 역사를 가장 경계하기에 할 수만 있으면 말씀을 못 듣게 한다. 교회를 나오지 않으면 일단 마귀의 밥이 된 것이다. 교회에 왔으면 다음 단계로 신자들이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발악한다. 설교자의 마음을 상하게 만든다. 회중의 말씀 듣는 자세로 설교자를 올무에 걸리게 한다. 설교자는 신자를 바라보고 설교한다. 허공에다 소리를 냅다 지를 수는 없다. 회중의 불순한 태도는 설교자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영을 괴롭힌다. 잘못된 태도는 설교자를 죽이기까지 한다. 설교자를 죽이면 자기 영혼이 죽는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까지 죽게 만든다. 불청객인 졸음을 죽여야 한다.

졸음을 죽이지 않으면

영혼이 죽는다

마귀가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마귀는 말씀의 권능을 알기에 말씀이 역사하는 길목마다 장애물을 설치한다. 한 곳이 뚫리면 다른 곳을 막는다. 말씀 듣기를 방해하다가 실패했다고 해서 마귀가 쉽사리 물러서지는 않는다. 마귀는 끈질기다. 다음 단계를 진행한다. 주님의 비유에서처럼 마음 밭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을 새가 와서 쪼아 먹는다. 깨닫지 못하도록 말씀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말씀을 듣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도록 무진 애를 쓴다. 때로는 이성적 답변을 요구하며 마음에 의심의 연기를 일으킨다. 어떤 때는 말씀의 의미를 약화시키고 깊이 생각하는 자세를 접게 만든다. 모든 시도가 실패하면 들은 바 말씀을 소중히 간직하지 못하게끔 아예 말씀을 탈취해간다. 깨달으면 영혼의 구원으로 직결되기에 마귀가 한사코 이 일에 총력을 집중한다.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8:12)

마귀는 말씀이 강하게 역사할 요처를 잘 알고 있다. 마귀의 졸개들은 말씀이 역사할만한 요처마다 매복해 있다. 그들은 사람의 영혼이 빛의 통제 아래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고도로 훈련된 어둠의 전사들이다. 마귀나 그 졸개들은 말씀 자체를 공격하지 않는다. 대신에 말씀을 듣거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한 자들에 대하여 집요한 공격을 퍼붓는다. 경성한 영혼에 대해서는 기회를 엿보다가 급습을 감행한다. 취약한 곳을 뚫고 들어가 흑암의 진지를 구축한다. 진리의 영이 이르기 전에 거짓의 영이 재빠르게 비집고 들어가 교묘한 해석으로 영혼이 지닌 원래의 미미한 지각력마저 없애버린다. 영혼을 혼미하게 만들 신화들을 조작하여 퍼뜨린다. 바른 진리에 눈을 뜨지 못하게끔 거짓 가르침들을 대량 살포한다. 말씀이 역사할 틈을 아예 원천적으로 봉쇄시켜버리는 것이다.

말씀을 듣는 태도는 말씀을 전하는 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다르다. 말씀의 권위는 상당 부분 화자(話者)의 정체성에 달려 있다. 존귀한 화자일수록 듣는 사람들은 자세에 신경 쓴다. 나쁜 자세는 말씀의 의미를 격감시키고 화자의 의욕을 꺾는다. 물론 존귀한 화자라 해서 청중의 바른 자세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말씀의 선포는 주님의 권위 아래에서 행해진다. 청자(聽者)는 말씀을 전하는 자의 뒤에 서 계신 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에는 반드시 주님께서 영으로 임재하신다. 설교자는 단순한 말의 전달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다. 설교자의 권위는 성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말씀 사역자에게 천상의 권위를 부여한다. 설혹 설교자의 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자세를 확립한 사람에게는 공허한 말씀 대신에 다른 은혜라도 주어진다.

듣는 자세가 그토록 중요함은 들음에서 믿음이 나기 때문이다. 복음은 한 사람의 증거에서 시작되었다. 에스겔에게 강하신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 성전을 뒤로 하고 인적이 끊긴 골짜기로 들어선 에스겔에게 외칠 말씀이 채워졌다. 버려진 들판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외친 에스겔의 말씀에 들을 사람이 없자 마른 뼈들이 들었다. 그들은 듣기만 하지 않고 적절한 반응을 보였다. 적절한 반응은 말씀 듣는 자가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자세이다. 흩어졌던 뼈들이 모였다. 산 사람으로 변한 그들은 여호와의 큰 군대를 이루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말씀의 흡인력이요 다른 한편으로 말씀의 활력이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바로 이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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