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자: ‘제자의 도리’ 주제 찬송으로 작사자는 미국 켄터키 주 심프슨 군에 있는 통나무 움막에서 태어났으며, 집이 가난하여 시골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으나 독학으로 대학까지 졸업하였고 모교 교사로 16세에 봉직하였으며, 21세에는 주간지 편집부장으로서 일하다가 27세에 부흥집회에 참석하였다가 회개하고 예수 믿고 구원받아 목회자가 된 토마스 오베댜 치셤(T. O. Chisholm1866-1960) 목사가 오랫동안 너무 많은 굶주림과 고생으로 몸을 많이 상해서 잠시 목회를 쉬면서 요양하는 상태에서 1897년 작사하였다. 치숌 목사님은 휴양 중에도 쉬지 않고 오히려 더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여 1,200여 편의 많은 시를 남겼다.
작곡자: 똑같은 ♪♪♪♩♩ 리듬패턴이 열여섯 번이나 반복되면서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찬송 멜로디 론디넬라(RONDINELLA)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 태생의 작곡가 윌리암 제임스 커크패트릭(W. J. Kirkpatrick;1838-1921)이 자신의 음악교사이었던 파스퀘일 론디넬라의 이름을 따서 찬송 곡명으로 삼은 것이다. 그 역시 40세 되던 해에 사랑하던 아내를 잃고 나서 경영하던 가구점을 접고 음악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사람으로 필라델피아 그레이스 감리교회 성가대 지휘를 했으며, 총 100권에 달하는 복음 성가집을 출간하였다.
1절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예수를 닮기 원함이라
예수의 형상 나 입기 위해 세상의 보화 아끼쟎네
예수님 닮기 내가 원하네 날 구원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지금 곧 오사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
1절,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은 예수를 닮기 원하는 것 세상의 보화 아끼잖네
2022년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새해가 되면 사람마다 자기 안에 새로운 소원을 한 가지씩 품게 되는데 찬송가 452장은 우리에게 어떤 소원을 품으라고 하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작사자 치숌 목사는 “예수의 형상을 힘입어 예수님처럼 많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며 살아가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증거하며 살기를 소원하면서도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고 또 실천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의 신앙은 겉껍데기 신앙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병자를 일으키시고 앉은뱅이를 고치시며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로 5,000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를 남기는 그런 위대한 능력과 신비의 장면만 본받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면 그분이 지셨던 고난의 십자가도 함께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가려면 무엇보다 자기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자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주를 쫓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원리를 알지 못하는 어떤 부자 청년이 주님의 그 소문만 듣고 주님께 나아와서는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선한다 하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6-17.막 10:17-21)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은 이 때 아주 당당하게 “선생님! 저는 어려서부터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등의 율법을 철저하게 잘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런 젊은이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권면하기를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아라.”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청년은 재물이 많은 관계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마 19:21-22).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시며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막 10:23)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성도가 선한 사업과 선한 행실로 자기의 의를 이루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줄로 착각하고 많이 벌어 많이 헌금하며 교회에서 생색을 내고 있지만,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 의를 위해서 드리고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들의 외식을 경계하고자 예수님은 두 렙돈의 헌금을 드린 과부의 모습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를 드린 것보다 얼마나 남은 것이 있는가를 보십니다. 다시 말해 자기의 전부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가장 귀한 생명, 단 하나뿐인 생명을 아버지께 드려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런 헌신과 사랑과 섬김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런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합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물질을 겸하여 나를 섬길 수 없느니라.”(마 6:24)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의 형상을 나 입기 위해서는 세상의 보화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의 형상이 내 안에 이루어지기 위하여 세상 부귀영화 쾌락 다 떨쳐버리고 오직 주안에서 섬김의 본으로 주를 좇읍시다. 내가 없어질 때 자연히 내 안에서 주님의 형상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2절 무한한 사랑 풍성한 긍휼 슬픈 자 위로하시는 주
길 잃은 죄인 부르는 예수 그 형상 닮게 하옵소서
예수님 닮기 내가 원하네 날 구원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지금 곧 오사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
2절, 무한한 사랑 풍성한 긍휼 슬픈 자 위로하시는 주 그 형상 닮게 하옵소서.
성경에 보면 무한한 주님의 사랑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죄인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유대인은 그 당시 선민이라는 즉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대하여 많은 자긍심과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치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같은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세리나. 죄인들하고는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오셔서 친구들을 빛으로 생명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세리장 삭개오와 세리 마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마다하시고 오직 그 중심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모함이 있느냐 없느냐만 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사랑하사 다 용서해 주시고 수가성의 여인에게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둘째, 병든 자 소외된 자를 찾아 사랑하시는 주님의 모습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는 항상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이 치료의 손길을 바라며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보시고 늘 따뜻한 사랑으로 돌봐주셨고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소경 바디매오와 38년 된 혈루병 환자. 중풍병자 등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자신을 죽이러 온 적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가룟 유다와 군병들이 칼과 몽치를 들고 찾아왔을 때, 베드로는 칼을 빼어 군사 말고의 귀를 내리치므로 떨어졌을 때 그 귀를 다시 붙여주시며 “네 검을 도로 집에 꽃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47-55,요 18:1-11)며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며 본을 보이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팔 유다 에게 떡 한 조각을 나누어주시는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이 보여주어야 할 그리스도 사랑의 모습에 대하여 왼뺨을 치는 자에게 오른뺨도 돌려대며,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까지 주며, 오리를 가자는 자에게 십 리를 가주는 그런 사랑을 가지고 주께 나오기를 주님은 요청하고 계십니다.
넷째, 자기를 버리고 떠난 자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요 21장).
집 나간 탕자를 반기는 아버지의 사랑은 주님의 사랑을 잘 보여주는 아름다운 예화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자신의 곁을 떠났건만 주님은 다시 찾아가셔서 사명을 맡기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실 것을 약속하심으로 베드로가 회개하고 돌아와 오순절 성령체험의 역사를 통하여 베드로가 설교할 때에 하루에 3,000명씩, 5,000명씩 회계하고 돌아오는 대역사를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끝없는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누구든지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기만 하면 주의 자녀로 받아 주시고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그런 사랑의 예수님이십니다.
다섯째, 자신의 몸을 내어 죽기까지 한 십자가의 사랑의 모습
사랑의 완성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부끄러움의 상징이 아니라 기쁨과 영광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침 뱉음과 옷 벗김,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쓰는 고통, 그리고 그 가시관 쓴 머리를 갈대로 맞았으며, 군병들이 손바닥으로 따귀를 때렸으며, 끝에 납이 박힌 채찍으로 수 없는 매를 맞으시고 골고다에서 숨지셨습니다. 33년 예수님의 인생은 모함, 배신, 추방, 배고픔, 멸시 천대. 목마르심, 학대, 십자가, 죽음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매 맞음과 채찍을 통해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었으며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게 되었습니다(벧전 2:24).
3절 겸손한 예수 거룩한 주님 원수의 멸시 참으시사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은 구주를 닮게 하옵소서.
예수님 닮기 내가 원하네 날 구원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지금 곧 오사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
3절, 겸손하시고 거룩한 예수 내 마음속에 지금 곧 오사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
예수님의 사랑을 논하고 우리의 소원이 어떤 것이든 간에 지식적인 고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직접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해 보지 않고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겸손하시고 거룩한 예수를 문자적으로 소개한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이 가까웠을 때 예수님께서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시는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을 설명할 수가 있고, 원수들의 조롱과 빌라도의 채찍 앞에서도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아니하시는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내와 고통을 설명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이 과연 얼마나 우리에게 큰 영적 변화를 가져다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제기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고난을 말로 이야기하지 말고 직접 몸으로 체험해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 고난에 참여해 보지 않고는 주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의 최고의 소원은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빌 3:8) 오직 내 안에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이 이루어지기 소원하며 주님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한 근거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며 그의 죽으심을 본받으려 한다.”(빌 3:10)는 바울의 서원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는 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부귀영화와 쾌락과 안일을 구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채워야 할 영적 몫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3-16)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왜 십자가의 고난을 사모하고 사랑해야 합니까? 그것은 내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때에 주님께서도 내 고난에 참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편안할 때에 받는 은혜보다 고독과 가난과 병중에서 고난을 겪을 때 받는 신앙의 위로와 기쁨이 가장 크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떠합니까? 세계적으로 현대교회는 십자가를 벗어 내던져 버렸습니다. 기독교에서 십자가의 인상. 이미지가 점점 흐려져 가고 있습니다. 현대 교인들은 자기 나름대로 편리한 종교, 알미니안 신앙, 맘모스 종교 등 변질된 기독교를 만들어 내놓았습니다. 코로나19는 이런 한국교회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더 아프게 더 아프게 십자가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마 치숍 목사님도 저와 같은 생각으로 이 찬송 시를 썼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가 허약한 몸으로 병상에서 간구한 기도 제목은 오직 하나 “나도 이 같은 주님의 고난을 병상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고 마지막까지 주님의 참사랑을 증거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자비와 긍휼을 구하였을 것입니다.” 이 같은 소망은 치숌 목사님의 소원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나에게 여러 은혜와 이적과 능력도 중요하지만 오늘 예수님 그분 자체를 내 안에 주옵소서! 그분이 당하신 고난 그분이 당하신 괴로움도 모두 다 내가 갖기를 원합니다.”며 기도할 때에 내 안에 예수의 형상이 이루어질 것이며 갖가지 이적과 능력도 더불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하기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서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괴사도 없으시되 저가 욕을 받으셨으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19-24)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고 죄 사함을 얻었듯이 우리도 주님의 고난을 통하여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을 때 비로소 많은 사람에게 순수한 예수님의 사랑을 가식 없이 거짓 없이 몸으로 실천하며 보여주는 사랑의 사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가 하나님을 본 자가 없되 우리가 서로 사랑하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말씀 관주
1절
예수를 닮기 원함 *요 13:15,고전 11:1,빌 3:17,벧전 2:21
예수의 형상입음 *행 20:35,롬 8:29-30,고전 4:6,15:49,골 3:10
세상의 보화 아끼지 않음 *마 13:44,19:21,막 12:44,히 11:26
2절
무한한 사랑과 긍휼 *렘 31:3,엡 2:4-8,빌 2:1-4,살후 2:16-17
죄인 부르시는 주 *마 9:13,막 2:15-17,눅 5:32,딤전 1:15
3절
겸손하신 예수 *사 57:15,슥 9:9,마 11:29-30,빌 2:6-8
멸시와 고난 받으신 주 *사 53:3-5,히 12:2,13:12-13,벧전 2:20-21,4:1
<후 렴>
날 구원하신 예수 주 *눅 1:71,롬 3:23-24,엡 2:8,딛 2:14
마음속에 오소서 *요 1:12,고전 3:16,엡 3:17,요일 3:24
인치심 *고후 1:22,엡 1:13-14,4:30,계 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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