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왕후’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물에 빠져 타임슬립된다. 조선시대 중전의 몸에 현대 허세남의 영혼이 깃들어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요리하는 남자, 사냥하는 여자 등 기존 사극에 없던 역할 바꾸기로 인기를 모았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형제가 되시는 것은 잠깐 찾아왔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다. 하나님이 전능의 옷을 벗고 인생이라는 드라마에 찾아오신다. 그는 범사에 형제와 같이 되신 것은 마땅하다. 함께 웃고 껴안고 울어주며 즐거이 먹고 마시는 사소한 일까지 같이하는 형제가 되신다. 정현종의 시 ‘방문객’은 ‘사람이 온다는 건 /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 그는 과거와 / 현재와 / 그리고 / 그의 미래가 오기 때문이다’라고 시작한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형제로 오신다는 것이야말로 실로 어마어마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신다. 예수님의 온전한 인성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부분적으로 인간이거나 거의 인간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다. 죄가 없으신 분이다. 그래야만 했다. 인간에게 약속된 통치는 오직 인간을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사장은 사역을 위해 우선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야 한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분리되었던 제사장과 다르다. 그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하나님이시다(요 1:1). 그는 사역을 위해 먼저 형제들처럼 되었다. 이런 자격으로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는 그가 자기 형제들과 완전히 같아져야만 했던 것이다. 형제들과 같이 되심, 즉 성육신은 구원 사역을 위한 준비였을 뿐 아니라 구원 사역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의 삶에 의해서도 구원을 받는다. 왕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확보하신 것은 정확히 말하면 ‘육체대로’ 오셔서 형제들과 같이 되시고 죽으심에 의한 것이다. 신학에서는 그의 오심을 성육신이라 부르고, 그의 죽으심을 속죄(atonement)라 부른다.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은 단지 그리스도가 아니다. 또한 단지 하나님도 아니다.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곧 참되고 완전한 의미에서 동시에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신 분, 또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를 모두 대표하면서 또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독특한 자격을 가지신 그 분이다.
1.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형제들과 같이 되다
‘성육신’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영어 단어 incarnation은 ‘육신이 됨’(enfleshed)을 뜻하는 라틴어 in carne에서 유래했다. in과 caro(육신)이 합쳐져서 발전된 단어다. ‘육체대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신약성경의 중요한 진술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디모데전서 3:16에 ‘그는 육체로 나타나셨다’고 노래한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아바타가 아니다. ‘아바타’는 본디 산스크리트어다. 인도의 힌두 철학에서 ‘아바타’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강림한 신의 육체적 형태를 뜻한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형상을 취하신 방식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하나님이 형제들과 같이 되심으로 인간의 죄를 담당하고 죽음으로써 단번의 희생과 화해 행위를 통해 인간을 위한 속죄를 이루시게 된다(고후 5:10-21). 그가 성육신하므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있다.
성육신은 결코 목적이 없는 것이 아니다. 즉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기 위한 특별한 목적이 있다. 자기 백성의 죄를 속량하기 위함이다. 구원이 목적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이 되셔야 했다. 그래야 십자가에서 죽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혈과 육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의 감정과 감성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형제들과 같이 되심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가 대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이다. 그의 성육신의 목적은 그의 죽음을 가능하게 하고, 그로써 백성의 죄를 속량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죽으신 그분은 영원한 하나님이셨고 또 계속해서 여전히 하나님으로 있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이기를 중단하지 않으셨고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신 그가 인간이 되시는 것은 Greco-Roman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경우와 다르다. 고대 세계에서는 신들, 여신들, 초자연적 존재들이 인간의 몸 때로는 동물의 몸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경우 신이 인간으로 보였을 뿐이지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이 인간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은 Greco-Roman 신화에서 신성을 지닌 존재들이 자의식을 버리고 단순한 인간의 형상을 취하는 것으로 보통 시각적, 청각적 차원에서 인간과 소통하는 것과 다르다. 그들이 잠정적으로 인간의 형태를 취하여 현시되는 것은 그들의 신적인 삶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마치 배우가 가면을 쓰고 있다가 나중에 가면을 다시 벗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형제들과 같이 되신 것은 그의 신성은 포기되거나 감소하거나 축소되지 않았고 또 그는 이전에 그가 가지고 있었던 신적 기능을 행사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신약성경은 오히려 아들의 신성은 형제들과 하나됨을 통해서 감소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사도 바울은 인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다’(골 2:9)고 말한다. 요한일서는 첫마디부터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고 고백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형제들과 같이 되신 것은 신성한 존재가 잠시 인간의 흉내를 내는 식으로 인성을 ‘가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성과 인성이 실체로 결합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형제들과 같이 되신 것, 즉 성육신은 신성의 축소가 아니라 인성의 획득이었다. 아들이신 하나님이 형제들 안에 거주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들이 직접 완전한 인간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형제들과 같이 몸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혼도 자신에게 취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형제들과 같이 되신 것은 인간의 신체적 생활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 생활도 경험하셨다.
2.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형제들과 같이 되시다
방위를 가리키는 동서남북에는 문화적 함의가 담겨 있다. 중국의 전통적 예법 문맥으로는 특히 그렇다. ‘남북’은 종적 질서를 지칭할 때 자주 등장한다. 횡적 배열의 동서(東西)는 ‘주인과 손님’ 구도다.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이 집채의 동쪽에 서도록 규정한 이전 예법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예수님과 우리는 존비의 개념도 주객의 개념도 아니다. 형제 사이다. 예수님은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범사에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 했다. 온전한 인간만이 백성의 죄를 속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한분이다. 무한하신 분이다. 유한한 인간, 그것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비천한 삶을 사셨다. 이것은 부자가 노숙자가 되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더 낮아질 수 없을 만큼 낮아지셔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는 죄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되어야 했다. 그는 그들과 함께 고난을 당했고 그 고난을 통해서 모든 면에 그들의 대제사장이 되기에 완전한 자격을 갖췄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들에게 말한다. 제사장은 사람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말한다. 따라서 제사장은 인간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 중의 하나이어야만 한다. 1971년 미국 항공우주국에서 발사 된 아폴로 15호 조종사 James B. Irwin은 달에 도착해 말했다.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구에 오셔서 지구 위를 걸으신 것이 이보다 더 큰 사건임을 나는 지금 달 위에서 통감 하고 있다.” 우주의 끝은 빛의 속도로 200억 년을 가도 다다르지 못한다. 그 우주를 만드신 성자 하나님이 형제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아들은 원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의 위치에서 제물 즉 대제사장으로서 희생 제물이 되시므로 인간을 대신할 만큼 낮고 천한 분이 아니다. 형제와 같은 위치에 있을 수 없는 분이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되려면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아들은 인성을 지니신다. 그의 인성은 완전하셨다. 즉 그는 ‘인간 그리스도 예수님’이 되셨다. 그리고 그의 인성은 영원하다. 비록 지금은 위로 올라가 계시지만, 그는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 21문에서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구별되는 두 본성을 갖고 있으면서 영원한 한 인격으로 계속 남아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라고 언급하면서 시편 8:4-6을 그 아들에게 적용한다. 이를 통해서 죽음의 고난을 겪은 인간이 된 아들의 겸손함이 설명될 수 있다. 그분은 형제를 대신하여 죽기 위해 형제들과 같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분 역시, 죽음의 세력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사는 사탄을 패배시키기 위해서는 그러한 몸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저자는 그 아들이 범사에 그의 형제들과 같아지고자 했음을 강조한다. 그는 대제사장이 되실 만큼 비천한 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되신 것이다. 그가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즉 인간이 되심이 대제사장되심의 전제조건이다.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아야 한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 그는 당연히 죄가 없으신 분이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아들의 본성과 성품을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아담의 원죄의 상속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은 그가 자신의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도록 매여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들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대속적으로 그리고 대표적으로 죽을 수 있다. 신약 기자들이 전혀 의문시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죄 없음을 제쳐두고, 그분이 형제들과 하나 되시고 연합되심을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이다. 히브리서가 분명히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즉 왕이시면서 아론 계열과는 다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다.
